엄마의 딸이 되려고 몇 생을 넘어 여기에 왔어
이순하 지음 / 이야기장수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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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라는 단어를 입에서 굴리다 뱉으면 그게 가장 힘들이지 않은 입 모양으로 내뱉을 수 있는 소리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게 된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자연스럽게 붙여두었다가 목에서 공기를 길어 올려 입술 사이로 띄워낼 때 자연스럽게 처음 나는 소리. (엄)마.

엄마 같은 소리가 난다. 힘들이지 않고 부를 수 있는, 그래서 언제든지 부를 수 있으리라고 착각하다, 아닐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을 때 가장 절망스러워지는 가장 쉬운 대명사. ‘엄마’. 너무 쉽지만 또 너무 무거워서, 지나치게 사랑하고 필요 이상 미워하게 되는 단어, 존재, 역할.

나의 경우 내 엄마 역할은 조미선 씨가 담당하고 있는데, 언젠가부터 조미선 씨를 담기에 엄마라는 말은 어느 순간 너무 쉽고 흔하게 느껴졌다. 그 이후로 나는 내 엄마 역할을 하는 사람을 엄마 대신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조미선 씨를 ‘엄마’로 부르다 나도 모르게 너무 쉽게 자주 부르고 속에서 나오는 대로 토하듯 말하게 되지 않기 위해서.

그런 나임에도, 어쩔 방도 없이 강력히 이 책의 제목에 이끌렸다.
<엄마의 딸이 되려고 몇 생을 넘어 여기에 왔어>

제목에서 미선을 떠올리곤, 고개를 주억거리며 책을 펼쳤다. 펼쳐 든 책에는 미선의 남편과 같은 해 태어난 저자인 이순하 작가가 쓴, 이순하 작가의 엄마, 이순하 작가의 엄마의 엄마, 엄마로서의 이순하 작가 이야기가 열네 편의 글로, 이야기에 얽힌 추억의 음식과 함께 등장한다. 어린 시절 먹었던 갱죽과 단팥빵부터 임신한 때 먹은 미역국과 저 먼 타향에서 불티나게 팔린 국화빵까지. 음식을 매개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작가여서일까 중간중간 문장 맛이 오래 끓여 깊은 맛이 나는 채수 같다 느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좋았던 점은 글맛은 아니었다. ‘엄마’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의 확장, 이를 통해 ‘엄마’란 말과 조금 화해하는 과정이 나에게 있었고, 그 지점이 귀했다.

작가의 가족사와 성장기, 삶을 다루는 에세이의 특성상 ‘작가의 엄마’를 다루는 글은 자칫 잘못하면 개인의 역사를 맛있게 기록하는 데에서 그칠 수 있다. 물론 젊은 작가들의 에세이가 넘쳐 나는 가운데 베이비붐 세대 작가가, 60대의 화자로서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고 발화하는 글이 귀하다는 걸 생각했을 때 그 자체도 의미 있는 작업이란 걸 안다. 하지만 동시대를 살지 않아설까 글의 중간중간 작가에게 완전한 공감만을 보내기 어려운 나와 같은 독자에겐 거기에서 이 책이 멈췄다면 아쉬웠을 테다.

그러나 이 책엔 다른 엄마들이 나온다. 이순하 작가에게 잠깐씩 ‘엄마’였던 존재들. 엄마가 아니지만 ‘엄마’ 된 존재들. 모두가 필연적으로 하나씩 가질 수밖에 없는 생물학적인 엄마를 넘어서, ‘엄마’라는 존재를 재해석 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인물들. 정작 자신은 시린 몸과 망그러진 마음을 하고서도 데우고, 먹이고, 입히고, 돌보고, 품고, 살리는 존재들. 이 책에서 ‘엄마’는 힘들어 입을 겨우 떼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소리를 내뱉게 되는 때에 다양한 얼굴로 찾아온다. 이모로, 사려 깊은 친구로, 부모의 직장 동료로, 성당 교우로, 옆집 이웃으로, 더 얄궂겐 아비의 치정 대상으로.

결국 우리는 시시때때로 서로에게 ‘엄마’인 건 아닐까. 순간순간 상대가 ‘엄마’ 되어 주길 바라고, 순간순간 ‘엄마’ 되어주는 존재인 건 아닐까. 그게 누구든 누군가를 살리는 마법 같은 존재들을 ‘엄마’로 불러도 되지 않을까. 그리고 내겐 나를 가장 많이 일으키고 살려온 존재가 미선이기에, 엄마란 말을 떠올리면 미선이 떠오르는 건 아닐까. 미선을 엄마라는 단어로 대체할 수 없지만, 엄마는 분명히 미선의 큰 조각이기도 하다. 나를 숱하게 살려온 이. 내게 숱하게 ‘엄마’였던 이. 미선.

미선을 엄마에 가두고 싶지 않아 엄마를 미선으로 부른지 수년째, 이 책을 통해서 어쩌면 나는 다시 미선을 엄마라 부르는 빈도가 늘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미선을 더 큰 개별적 주체로 인정한들, 나를 살리며 살아온 시간만이 미선의 시간이 아닌 걸 안다 한들 나는 ‘엄마’란 단어 앞에서 속절없이 미선을 떠올리며 주저앉을 것이다. 실은 지금까지 내게 ‘엄마’란 미선이 아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다만 기회가 된다면 미선에게도 종종 내가 엄마 되는 시간이 있길, 그것이 미선을 먹이고, 입히고, 돌보고, 품고, 결국 살리는 시간이 되길 바라본다. 감사히, 내겐 아직 그럴 기회가 남아있는 듯하다.

미선, 엄마의 엄마가 되려고 몇십 년을 넘어 내가 여기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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