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자리
고민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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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6개월을 백수로 살며 백지의 시간을 즐기면서도 내심 백지로 두면 안될 것 같았던 날들이 떠올라 고른 책이었다. 실제로 택배로 받아 읽기 시작한 <영의 자리>는 그런 감각들을 솔직하고 서늘하게 그려낸다.


살려고, 잘 살려고, 나름대로 늘 부단히 노력해왔는데, 일인 분의 몫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어쩐 일인지 0.1 ver, 0.2 ver, 0.3 ver. 정도의 몫만 해내는 것 같은 갑갑함. 이제 최종 버전의 나를 빚어냈다 싶을 때 다시 파일명만 바뀌고 0.1 ver, 0.2 ver을 반복하고 말아 버리는, 설령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런 생각이 자주 드는 날들을 이야기하는 소설이었다. 0으로 비유하는 허탈함이 영(靈)하고도 닿아, 1인분이 되지 못하고 영의 세계에 너무 오래 남은 나머지 유령이 된 (것 같은) 사람들을 찾는 성실한 매일의 고단함을 그리는 소설이었다.


여름 날 쏟아지는 장대비를 맞고 에어컨이 켜진 장소로 들어갈 때 오소소 돋는 추위와 같은, 매서운 한 겨울의 추위보다는 사소하대도 결고 쉬이 넘길 수 없는 서늘한 마음들을.


다만 작가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 서늘한 마음들을 모아, 0이 가장 어울리는 자리를 찾아, 서로를 기대 놓고 00 무한의 가능성을 만들 수도 있지 않냐고 말한다. 표지의 디자인도 0의 빛나는 가능성을 숨기지 않는다.


문득, 약국에서 아르바이트 했던 기억을 글로 남겼던 다른 0 안부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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