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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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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이 책은 한 사람의 행적과 감상보다는 수백, 수천만명의 치열한 삶의 투쟁이 적나라하게 그려진 다큐멘터리에 더 가깝다 하겠다. 불과 몇십년 전 우리나라는 세계최빈국 중 하나로서 다른나라의 원조를 받으며 비참한 삶을 살았었다.

 그런데, 최근 1990년대까지 일부분 원조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OECD에 가입한 (나름대로) 경제강국인 우리가 최근까지 도움을 받고 있었던것이다!

한 티비광고에 '나누었더니 내가 먼저 받았다'는 카피를 보고 한편으로는 남을 돕는다는 일이 자기만족이지 하면서도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고난의 길을 자처한 사람들을 보면서 길지않은 인생 어떻게 평생 저러고 있을까싶기도 하다. 어쩌면... 그 카피처럼 그들은 우리가 모르는 무엇인가를 얻고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일을 왜하냐고 물으면 그녀는 '피가 끓는 일'이라고 거침없이 대답한다. 그냥 보람있는 일이 아니라 피가 끓는단다. 그녀가 느끼는 삶은 극에 달하는 오르가즘처럼 강렬한 감정 그자체이다. 우리네 삶에 과연 그렇게 강렬한 느낌은 몇번이나 겪는가? 평범한 것이 좋을까? 우리는 겪어보지 않은 경험에 대해 막연히 두렵고, 무난한 현재의 안정감에서 벗어나고싶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면, 가만히 있는 것이 최선일까? 물론, 아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구호현장에 달려가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치열한 삶의 현장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는 눈과 귀와 심장은 우리에게 있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단 2천원으로도 꺼져가는 목숨하나가 새로운 인생으로 다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간과함은 명백한 생명유기이기 때문이다.

월드비전구호팀장 한비야는 말한다. 더 살리고싶어도 돈이 항상 부족하다고. 어느 마을은 도와줘서 살고, 어느 마을은 돕지 못해 떼죽음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가슴아프다고.

세계도처에 말도 안되는 부조리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은 바로 예전의 우리들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하찮게 여기는 몇푼의 돈으로 죽어가는 목숨을 살리는 현실은 엄연히 존재한다. 값싼 동정따위가 그들에게는 그토록 소중한 생명을 살리는 유일한 희망의 불씨가 된다는 사실. 기가 막히지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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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지음 / 창비 /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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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정신에는 '똘레랑스'라는 것이 있단다. '나와 다른 것을 이해하는 마음'이라는 표현이 적당하리라. 그래서인지, 그 나라는 망명자와 이민자들이 많아 인종전시장을 이룬다고 한다. 그런만큼, 프랑스자체와 상관없는 유혈사태또한 하루가 멀다하고 벌어지며 그로인해 자국민이 피해를 입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그 위험성을 감수하면서도 외국인들의 인권을 존중해주는 그 정신에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지 않을까?

학교에서 배운것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보시라. 물론, 우리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라고는 대학입시문제 얼마나 잘 찍나하는 기술테스트 위주이지만,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말들 몇가지 생각 안나시는가? 나는 '역지사지'라는 말이 생각 나더라. 그들은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고 있으며 토론을 통해 자기발전과 문제해결을 추구하는 자세가 체질화되어 있다. 공동체의 기준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되며 '나'와 '남'의 관계를 바로 '똘레랑스'라는 이해도구를 사이에 놓고 개성을 지켜가는 것이다. 혹자는 그들의 개인성을 몰인정하다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이는 '개인적'과 '이기적'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소리다. 오히려, 우리공동체사회에서 서양개인주의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똘레랑스'는 쏙 빼놓고 '이기적'인 성향만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알맹이는 버리고 껍질만 먹는 것처럼.

암울했던 독재공포정치의 그 시절 '진실'을 얘기하면 죄가되는 그 때, 홍세화는 양심을 지킨 죄(?)로 이역만리 땅에서 역사와 삶의 무게를 한꺼번에 짊어져야만 했다. 동료의 고통을 함께하지도 못하고 혼자 도피해있다는 죄책감과 함께 프랑스현지교포들에게도 위험한 존재로 낙인찍혀 이방인중의 이방인이 되어 살아가야 했던 그의 삶을, 정의가 지켜지지않았던 그 사회를 지금 젊은이들은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그 시대에 우리가 존재했다면 그들을 빨갱이라 손가락질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을까? 박정희를 리더로서의 카리스마가 있다느니, 경제발전의 주인공이라느니 이해하기 쉬운 말 몇마디로 과거를 덮어버리는 우리는 지금 역사왜곡의 장본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결코 심한 비약이 아니다. 지금도 양심수라는 굴레속에서 평생의 삶을 박탈당한 사람들의 존재가 그 증거이다.

내가 존중받으려면 먼저 남을 존중해야 한다. 과거의 암울한 역사는 잊어야 할 것이 아니라 철저히 밝혀 후세에 보여야 할 본보기이다. 미래에 우리가 이해받으려면 우리가 먼저 과거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정의는 이런 것이다'가 아니라 '우리는 정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어야 한다. 홍세화는 프랑스에서 이러한 똘레랑스의 힘을 보았다. 우리에게 없는 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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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의 허접질
이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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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 한번쯤 해보았을 사소하고, 진지하고, 부끄럽고, 쓸데없는 그 고민들이 이 스무살 조금 넘긴 어린 여자(?)의 독특한 필체와 그림으로 신랄하게 까발려진다. 내가 지나쳐온 차마 누구에게 얘기할 수 없었던 바로 그 것을 그녀도 겪고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놀라울 뿐이다. 이렇게 솔직할 수 있는 원동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누구보다 만만하고 편한 누군가가 대신 나를 얘기해준다면 마음이 놓이지 않을까? 그래서, '쿨한 이다'는 '아무것도 아닌 정한별'의 대변자로 태어났다.

이다는 이다일 뿐인가? 그녀는 이다의 뒤에 숨었다는 표현을 썼지만, 난 숨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다가 주는 혜택을 그녀가 누리긴 하지만, 이다가 받는 아픔또한 그녀가 느끼기 때문이다. 이다는 정한별이고 또,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우리들 바로 그 모습이다.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그 재미. 게다가, 발칙한(?) 그림까지 있다면? 보여주기 위한 일기가 되어버리는 매너리즘이라도 좋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녀의 모든 것이 아니라 '맛'있는 그림과 이다의 인간적인 매력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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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존 그레이 지음, 김경숙 옮김 / 동녘라이프(친구미디어)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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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읽고나서 책의 제목이 참으로 절묘하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화성과 금성은 태양계의 행성에 속한다는 사실말고는 그 성질이 전혀 서로 다른 세계이다. 그런 각각의 세계에 살던 사람이 지구에서 만나 하나의 삶을 공유하려면 그 이질감에 의한 문제는 당연히 발생하리라. 그 문제가 왜 발생하며 어떻게 해결해가야 하는지 알지 못하면 부부사이에 깊은 골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 해결의 출발점은 남자와 여자의 인식의 차이를 인정함에서 시작된다. 서로의 입장에서 이해하면 해결되지 않을 일이 있을까?

남녀는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서 호기심을 느끼고 호감을 가지며 사랑을 하면서도 원래 다른 곳에서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못하고 내 인식의 틀속에 상대를 끼워맞추려 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불만족은 쌓여가고 불만족의 골은 깊어만 가게된다. 어느 한쪽의 희생이 요구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고, 겉으로는 평화로울지 모르나 희생하는 쪽은 평생 마음의 병을 안고 살아가게 되리라. 이런 문제는 대화가 중요한 해결의 수단이긴 하지만, 상대방의 이해에 기반을 두지않은 인식의 충돌은 부부 둘만의 힘으로 문제를 풀어나가기는 어렵다. 대화자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부부의 문제를 잘 아는 누군가가 나서서 사소한 상황들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 세세하게 알려주어야 하는데, 그런 상담을 받으려는 의지를 가진 부부는 그렇게 많지않다. 대부분 자기자신보다는 상대방에게 원인을 찾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문제해결의 시스템에 접근할 방법은 거의 없는 상황이며 많은 부부는 아무에게도 얘기못하고 속앓이로 마음이 곪아가게 되고,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게 되는 경향이 높아져가게 된다.

요즘처럼 자기개성이 강조되고 이기적성향이 두드러져가는 시대에, 에로스적인 사랑은 자본주의 상업성향에 아름답게만 포장되어 이면의 고통에 대한 이성적인 고뇌와 반성은 상대적으로 축소되거나 간과되어 높은 이혼률의 수치가 단지 사회현상의 반영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이 책 한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상징적 의미로서의 방향제시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등을 돌린 부부가 다시 예전처럼 사랑하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이상의 클리닉은 없다.

'남자의 동굴'을 여자는 이해해주고, '여자의 수다'를 남자는 들어주라. 갈등의 무게에 비하면 그정도의 수고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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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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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누이는 사람들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작가의 분신(자아의 표상)이 아니었을까? 작가는 아마도 남들이 결코 알 수 없는 나만이 가진 특별함을 꿈꾸는 그르누이가 되고싶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나또한 지극히 평범하고 세상속에 그 존재조차 희미한 그르누이 그 자신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태어나자마자 생선쓰레기더미에 버려져 썩어가는 악취속에서 세상 부조리의 화신인 것처럼 악을 쓰며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언젠가는 세상을 내 앞에 무릎꿇게 하리라 다짐하듯 말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났지만 결코 인간적일 수 없었던 그는 초인간적인 냄새(바로 이것이 세상과 나를 연결시키는 유일한 열쇠였다)로 세상속의 나를 이루리라 꿈꾸었고 이루는 듯 했으나, 정작 세상사람들이 무릎꿇는 순간 그속의 나는 내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내가 만들어낸 내가 과연 나일까? 존재에 관한 의문속에 그르누이는 갈갈이 찢겨진 고깃덩이가 되어버리고 그모습은 공포라기보다 슬픔이었다. 사람은 스스로의 존재와 삶에 관한 결론을 아마도 죽는 그 순간에나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현재에 살면서 과거를 거울삼아 미래를 추측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르누이는 몸이 찢겨지는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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