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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타자성에 대한 심문: 가야트리 스피박

정 혜 욱
I

타자란 동시대 담론이 기반하고 있는 중심 기호이다. 하이데거, 데리다, 푸코, 료타르 등 60년대 이후의 유럽 사유를 이끌었던 사상가들은 근대의 사유의 토대인 동일성의 철학이 이성과 합리성, 혹은 총체성의 범주에 포섭되지 않는 모든 것을 '차이'와 '타자'의 이름으로 배제해왔다고 비판해왔다. 이들 탈근대 이론가들의 사유는 무한히 다양한 세계와 일치될 수 없는 이성적 주체의 한계를 인식함으로써 촉발된 것이다. 특히 포스트식민담론은 이러한 타자의 문제를 전경화시켜 최근의 문화담론의 가장 핵심적인 어휘로 부각시켰다. 사실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은 식민 담론이 성숙/미성숙, 문명/야만, 발전/저개발, 진보/원시 등과 같은 이분법적인 축을 통해 타자를 배제하고, 폭력적으로 전유해온 방식을 드러낸다. 물론 유럽 탈근대 이론가들이 억압된 것의 복권을 주장하면서 타자를 급진적으로 사유하고 타자 논의의 새로운 장을 열어주기는 했지만, 그들 역시 유럽이라는 지정학적 결정항들(geo-political determinations)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본 글은 최근의 포스트식민 담론의 대표주자 중의 한 명으로 알려져 있는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을 통하여 동시대의 타자의 문제를 살피고자 한다.

포스트식민담론의 삼총사 중 가장 선임자인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의 오리엔탈리즘은 푸코의 담론, 권력, 지식의 분석을 확장하여 제국주의 담론의 형성과정을 주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고, 그의 초기 이론은 주로 서구가 비서구를 재현 체계를 통해 어떻게 통제하고 구성하고, 지배했는가를 보여주는 데 역점을 두었다. 반면 호미 바바(Homi Bhabha)와 가야트리 스피박은 식민주체 혹은 하위자(subaltern)의 주체화 과정의 문제점을 보다 미시적 차원에서 지적해낸다. 그들은 '비서구'를 단지 타자라는 하나의 용어로 일반화시킴으로써 '타자'로 망라되는 수많은 민족들과 다양한 집단들 속에 내재해있는 동질화할 수 없는 이질성과 차이들을 인정하지 않았던 종래의 관행을 비판한다. 이것은 서구와 비서구의 경계가 지도상의 구획처럼 명확하게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문화와 문화가 서로 넘나들고 있는 전지구화 시대에 서구/비서구 혹은 문명/야만의 이분법적 구분이 얼마나 유효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볼 때 이 두 사람은 전 지구화된 자본주의 구조 하에서 타자화된 제3세계의 다층적이고 복합적 현실을 보다 면밀히 읽어내고자 시도한다고 볼 수 있다.

우선 바바는 식민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타자성(otherness)이 이데올로기적 고정성에 얽매인 개념이라고 비판한다(66). 즉 전통적으로 식민주의 담론은 서구 형이상학적 사유의 동일화 논리에 근거하여, 서구/비서구의 관계를 고정시키고, 전자에는 선, 문명, 이성 등과 같은 항을, 후자에는 악, 야만, 감정 등과 같은 항을 대입시켜서, 정형화된 타자를 만들어내었다. 따라서 그는 타자라는 용어 대신 "흉내내기"(mimicry), "교활한 공손함"(sly civility), "문화적 차이" (cultural difference), "잡종"(hybrid) 등의 용어로 피식민 주체를 차이의 주체로서 개념화한다. 우선 "흉내내기"는 서구 담론에 대한 비전유의 징표이며, 규범화된 지식과 억압하는 권력에 위협감을 줄 수 있는 차이와 반항의 징표이다. 그는 욕망의 목적인 동시에 조롱의 대상인 흉내내기를 통해 식민주의 담론의 경계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러므로 흉내내기는 타자를 전유하는 조종과 훈육의 전략으로서의 모방(mimesis)이 아니라, 표준 지식과 훈육 권력에 위협을 가하는 차이와 비전유의 기호이다. 이것은 바바 식의 타자의 전략으로서, 끊임없는 미끄러짐을 통해 차이를 산출할 때,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타자를 정초해내기 위한 것이다. "문화적 차이" 역시 총체화를 거부하는 타자의 시각으로, 문화란 고정되어 있는 실체가 아니라, 이산과 접경의 경계 지대들을 넘나드는 유동적인 것으로 언제나 국가라는 인위적 경계를 넘어선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에 의하면 문화란 본질적으로 잡종이다. 따라서 그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본격화된 제국의 확장과 더불어, 문화의 잡종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제3세계의 공간에서 서구적으로 호명되고 구성된 주체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방식을 탐구하는 데 역점을 둔다.

바바와 마찬가지로 스피박은 타자라는 포괄적 용어로 일원적으로 개념화되어온 제3세계 주체들의 본질주의적 정체성을 거부하고, 주체·효과가 생산해내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정체성들의 모순 관계를 읽어내고자 한다. 예를 들어 포스트식민 이주자, 혹은 포스트식민지의 엘리트층은 서구에서는 타자의 정형으로 제3세계를 대표하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제로 그들은 출신 지역의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것도, 그 지역의 소외된 타자를 대변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서구 메트로폴리탄 사회에서 그들은 언제나 인종적 소수자의 전형으로 생각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서구에서 '제3세계'라는 기표가 형성되는 방식을 보여주는 대표적 예가 될 수 있다. 따라서 그녀는 타자를 기존의 타자 개념이 내포하고 있었던 동일화 논리에 의거해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에 근거하여 타자가 여러 가지 정치경제학, 이데올로기, 젠더, 언어 등의 불확정적이며 불연속적인 네트워크 속에서 구성되는 방식에 주안점을 둔다.

타자의 문제는 스피박의 사유를 관통하는 핵심 어휘이다. 그녀는 유럽중심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가 또 다른 억압적 중심을 설정하는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사실 바바가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비판을 다시 비판하는 것이나 스피박이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주변성이나 타자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사이드가 식민주의 담론의 "내적 일관성"(internal consistency)을 상정하는 것은 역으로 서구 중심 담론을 용인하는 것이며, 중심/주변의 이분법에 참여함으로써, 주변을 중심에 대한 주변으로 구성함으로써 중심을 공고화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비서구를 끝없이 주변적인 것으로 이름 짓고 공고화하는 것은 주변부에 대한 중심부의 요구인 것이다"(Teaching Machine 56).

물론 다른 중심을 설정하지 않고서 기존의 중심을 뛰어넘는 것이 어느 정도의 실천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하지만 이 글에서 포스트식민 이론가들 중 특히 스피박에 보다 주목하는 이유는 그녀가 권력, 주체, 욕망의 축을 통해 보다 미시적 차원에서 제국의 공모를 읽어내는 동시에 이론의 수행성을 확보하기 위한 윤리와 책임을 모색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스피박은 유럽의 타자로서 비서구가 정의되면서 만들어진 자아·타자의 이분법의 극복 방안으로서 제3세계의 억압받는 민중의 투쟁과 삶에 대해 윤리적 반응과 책임을 요청한다. 스피박의 이러한 윤리학으로의 이행은 현시대의 포스트식민주의가 자칫 세계화와 국제화 혹은 미국이 주도하는 범지구화의 논리 속으로 함몰되는 위험을 경계하고, 대항담론으로서의 위상을 가지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다른 이론가들과 마찬가지로 19세기 영국문학의 생산과 수용이 제국주의 역사와 어떻게 얽히는가를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스피박은 영미 고전의 제국주의 비판에만 머물지 않고 제3세계 출신의 작가들의 문학 텍스트들의 보다 다양한 양상들에 초점을 맞추고자 노력한다. 즉 알제리의 작가 드제바(Assia Djebar), 영국 작가 쿠레이쉬(Hanif Kureishi), 인도 태생의 영국 작가인 루시디(Salman Rushdie), 남아공 출신인 쿳시(J. M. Coetzee), 카리브 해 출신의 리스(Jean Rhys),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도 출신의 방갈 작가 마하스웨타 데비(Mahasweta Devi) 등이 그들이다. 특히 데비의 소설은 기존의 자아·타자의 이분법이 얼마나 부적절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스피박이 궁극적으로 제기하고자 하는 '윤리적 특이성'(Ethical Singularity)을 설정해준다. 윤리적 특이성이란 일종의 은밀한 만남으로, 너와 나의 진정한 만남은 서로에 대한 반응, 책임 그리고 서로에 대한 설명가능성에서 생겨난다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스피박을 통해 타자의 문제를 살펴봄으로써 기존의 이분법적 시각으로 포착하기 힘든 제3세계의 현실을 읽어보고자 한다.

스피박이 기존 서구의 전통이 만들어낸 보편화된 이분법에 도전하면서, '타자성'이란 문제적 기호에 접근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그 하나는 서구의 전통이 만들어낸 전형적인 '타자'인 "자아를 공고히 하는 타자"(the self-consolidating Other)("Subaltern Studies" 7)를 해체 구성함으로써 그 한계를 짚어내는 작업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 타자의 전형을 벗어나서 "절대적 타자" (tout-autre), 혹은 "전적인 타자"(the wholly other)의 부름에 응하는 작업이다.

전자는 계몽주의 이후의 대문자 인간의 사유에 거주하는 타자성으로 (유럽의) '자아를 공고히 하는 타자'이다. 이것은 사이드를 포함한 많은 포스트식민주의 비평가들이 비판했던 타자성으로, 서구의 자아를 정의하고 서구의 자아를 지향하기 위해 만들어낸 타자에 대한 환상이라 볼 수 있겠다. 예를 들면, 다니엘 드포(Daniel Defoe)의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에서 크루소의 충실한 하인으로 거듭나는 원주민 '프라이데이'(Friday)와 샤롯 브론테(Charlotte Bronte)의 『제인 에어』(Jane Eyre)에서 로체스터(Rocheshter)의 전처이자, 자메이카 크레올 여성인 버사 메이슨(Bertha Mason)은 서구의 인식을 투사한 대표적인 두 가지 형태의 타자에 대한 환상으로 볼 수 있다.

크루소는 자본주의와 근대의 자아의 전형으로, 저자인 드포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무인도에서 크루소만을 인간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그가 보기에 원주민은 인간이 아니라 식인종이거나 원시 자연의 일부이다. 따라서 드포가 창조한 크루소는 마치 자신의 애완동물에게 이름을 붙이듯, 그가 생명을 구해준 원주민과 금요일에 대면했기 때문에 프라이데이라고 이름짓는다. 크루소를 만나기 이전에 프라이데이에게도 원이름[고유명]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가정조차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타자/원주민의 문화는 문화가 아니다. 따라서 그는 타자에게 말을 거는 법을 배울 필요가 없다. 그는 백지 상태의 앵무새에게 말을 가르치듯이, 서구의 언어를 가르치고, 서구의 종교를 각인한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과정은 인간됨과 개종, 그리고 제국주의는 같이 가는 것임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물론 앵무새보다는 훨씬 뛰어난 두뇌를 가진 프라이데이는 주인의 언어를 배우고, 스스로 주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주인의 문화를 대단히 훌륭하고 본받아야 할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내부의 토착문화를 삭제하고 성공적인 식민 타자의 원형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프라이데이의 모습은 서구의 상상이 만들어낸 착한 타자에 대한 환상이며, 서구인에 의해 상상적으로 구성된 타자의 전형이라 할 수 있겠다.

한편, 스피박이 마셔레이(Pierre Macherey)의 징후적 독법을 전유하여 읽은 『제인 에어』에서 중심적 이념틀로 작용하는 것은 여성의 영역이 '성적 재생산'을 통한 가정의 영역이라는 것과 비서구인에게 '영혼을 부여하고자 하는' 보다 더 큰 제국주의 기획이다. 이 소설에서 제인은 '로체스터와 버사로 구성된 법률적 가족'의 '파괴자'로 등장한다. 그리고 전체 이야기의 전개는 '가정의 파괴'라는 반가족 담론에서 성적 재생산의 영역인 가족 담론의 형성(즉 로체스터·제인의 결혼)으로 옮아간다. 이 과정에서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는 버사와 로체스터 가정의 합법성에 심각하게 의문을 제기하고, 제인이 가족의 파괴자가 아닌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로 거듭나게 만드는 촉매제 구실을 한다. 즉 로체스터는 자메이카 크레올 여성인 버사를 아내로 맞이함으로써, 순수와 사랑으로 가득차야할 자신의 가정이 버사의 야만성과 동물성에 의해 심각하게 오염되었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버사는 인간·동물의 경계선상에 있는 인물로 간주되며, 제인은 이러한 야만성과 수성을 극복해줄 수 있는 일종의 구원자로 인식된다. 따라서 버사가 크레올이라거나, 태생 원주민이 아니라는 피식민지 지역 내의 계층 구분은 최소한 19세기 유럽 사회에서는 거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버사가 거주하는 영역은 그러한 혈통이나 계층적인 세밀한 범주 구분을 넘어서, 서구/비서구, 문명/야만의 '절대적 범주'(categorical imperative)가 작동하는 영역이다. "인간만이, 그리고 그와 함께 모든 이성을 가진 피조물은 그 자체로 목적이다"(90)라는 칸트의 주장을 비서구인/피식민지인/원주민들에게 적용시킨다면, 타자/야만의 범주를 그들에게 각인하는 폭력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범주는 "이성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는, 그리고 기독교 창조주의 피조물이 아닌 [비서구/야만을] "인간으로 만들어 그 역시 자체로서 목적으로 기능하도록 만들어야 한다"("Three Women" 182; Kant 90). 오늘날의 맥락에 보자면 이것은 "발전의 논리"와 부합하는 것이다(Postcolonial Reason 124).

물론 제국주의 기획은 『제인 에어』의 전면에 부각되지는 않는다. 이것은 합법적 가족 담론의 형성을 위해 도입된 이야기의 접선이지만, 제인이 반가족에서 합법적 가족으로 이동하기 위한 필수요건이다. 버사 메이슨을 거의 동물적 존재로 강등시켜서, 간단히 제거해버리는 서사 구조는 제국주의의 논리와 부합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버사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이 소설의 서술 구조는 제국주의의 타자에 대한 인식론적 폭력에 대한 알레고리가 되는 동시에 피식민지인인 타자가 서구 여성을 독립적인 주체로 거듭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방식과 연결된다.

반면 '절대 타자성'이란 용어는 데리다가 레비나스(E. Levinas)의 윤리학을 전유하여 다시 읽은 개념에서 연유한다. 레비나스는 동일자의 논리를 완전히 초월한 절대 타자의 개념을 정초해내었지만, 데리다는 "동일자의 체계와는 관계없는 절대 타자의 존재가 자신이 초월하려는 존재론적인 전통에 여전히 종속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Glas-piece" 22-43; Gift of Death 85). 따라서 데리다에게 동일자와 완전히 분리된 형태의 타자란 존재하지 않으며, 자아와 타자와의 관계는 서로 오염되고, 오염될 수밖에 없는 관계이다. 타자에 대한 정의는 타자에 대한 지식이 아니며, 타자란 자기 동일적 실체나 개념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러한 데리다의 관점을 받아들여 스피박은 주체란 해체된 것이 아니라, '구성된' 것이며, 한 개인이 언어, 성별, 인종, 계급 등 보다 더 큰 문화와 체계를 넘어서서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데리다의 해체론은 오늘날 '예전에는 존재했던 중심화된 주체의 사라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조직화되지 않은 구조를 구조라 부를 수 없듯이, 통합되지 않은 주체는 주체라 불릴 수 없다. 문제는 "진리가 있다고 믿기 위해서 동일성을 특권화시킴으로써"(Spivak Reader 27), 동일성 내부에 거주하는 이질성과 차이들을 배제하는 데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의미 체계가 온전히 지배할 수 없는 "미결정적인 것"으로 결코 "중재될 수도 지양될 수도 없다"(Derrida, Dissemination 221).

따라서 이러한 타자성을 드러내는 방식이 곧 타자에 대한 책임이며, 타자에 대한 반응이다. 다시 말해 데리다에 의하면 타자성은 총체성의 그물망에서 빠져나오는 잉여 혹은 과잉이며, 책임(Responsibility)은 곧 이러한 타자성에 반응(Response)하는 능력(ability)이 되는 것이다("Hospitality" 65).

스피박은 데리다의 '타자' 개념을 포스트식민, 혹은 이산의 공간으로 전치하여 읽는다. 앞서 바바가 오늘날의 문화를 잡종 문화로 개념화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스피박은 자아와 타자의 관계 또한 서로가 서로를 오염시킬 수밖에 없는 관계로서 파악하고, 자아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 타자, 서구 문명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순수 공간을 인정하지 않는다. 타자란 언제나 불완전한 형태의 재현인 언어오용(catachresis)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제3세계' 혹은 타자를 대변할 수 있다는 지식인의 특권과 그 "배움에서 벗어나서"(unlearning) (Postcolonial-Critic 9), 나의 타자를 넘어서는 무한히 다른 타자에 반응할 수 있을 때, 타자의 윤리학과 함께 타자에 대한 책임감을 모색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주장한다("Responsibility" 19-64).

그러므로 스피박은 '절대 타자성'에 기초하여 전략적으로 허구적 인물들을 창조해낸다. 초기작에서 화두가 되었던 '하위자', '포스트식민 이주자', 그리고 『포스트식민이성비판』에서 새로이 도입된 '원주민 정보원'이 그들이다. 우선 '하위자'는 스피박이 마르크스와 페미니즘의 이론과 정체성의 정치학에 개입하는 과정에서(Worlds 24-68; Postcolonial Critic 143), '포스트식민 이주자'는 미국의 문화정치학과 미국학계의 정전논쟁을 위해(Teaching Machine 255-62), 그리고 원주민 정보원의 논의는 『포스트식민이성비판』에서 북미와 유럽에서 생산된 포스트식민주의의 담론까지 포괄하는 최근의 타자 담론에 개입하기 위해서 창안된 개념이다.

스피박이 타자의 자리에 '하위자', '포스트식민 이주자', '원주민 정보원' 등의 용어를 기입하는 것은 상술했듯이 오염되지 않은 투명한 주체, 순수 담론을 상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장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이론이라 평가되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그리고 심지어 포스트식민주의까지도 서구의 중심적 시각에 의해 굴절되지 않았다고 선언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사실 이러한 이론들의 급진적 비판 자체에 타자의 대변과 재현을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타자를 전유할 위험이 있다.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 공화력 18일』(The 18th Brumaire of Louis Bonaparte)에서 왜 프랑스 소자작농들이 자신들의 계급을 대표할 것 같지 않은 나폴레옹을 자신의 대표자로 택했는가를 기술하면서 그들을 스스로 자신을 대표할 수 없는 존재로, 대변되어야만 하는 존재로 묘사한다. 스피박은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영어 어휘는 재현과 대표를 포괄하는 어휘이지만, 두 개념은 동일한 것이 아니며, 마르크스는 이미 재현(Darstellung)과 대표(Vertretung)의 간극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재현과 대표사이에는 모종의 관계가 있다. 재현은 주로 미학이나 경제의 범주이며, 대표는 정치의 범주이지만, 현실 속에서 대표가 언제나 재현처럼 행사해왔다.

인도의 과부 순장 관습(sati)을 그 예로 들자면, 영국 식민주의자들이나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관습은 "여성의 자살을 강요하는 야만적 문화 혹은 가부장제"로서 당연히 폐지되어야 하는 것이며, 민족주의자들의 입장에서 이 관습을 폐지하도록 강요하는 행위는 "민족 전통의 말살을 위한 전략"으로 "그들의 자살은 강요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항변한다. 하위자 인도 여성을 대신하여 그들의 입장을 말해주는 것은 재현, 혹은 묘사에 해당하는 동시에 그것은 순장을 앞둔 여성을 지식인이 대변해주는 행위이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듣게 되는 음성은 순장을 앞둔 여성 혹은 인도 여성의 목소리 자체가 아니라, 인도 여성이 처한 상황에 대한 지식인들의 입장인 것이다("Can Subaltern Speak?" 90-104). 재현과 대표의 간극을 무시할 때, 지식인은 자신이 투명하게 재현한다고 가장하게 되고, 하위자들의 목소리는 침묵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위자는 말할 수 없다'란 주장은 하위자가 정말로 말할 수 없다는 논리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섬세하고 정교하게 수행되는 인식론적 폭력과 공모하지 않고, 그 이질성을 인정하면서 서구의 배움을 벗어나, 그들과의 관계의 수립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푸코와 들뢰즈에 의존하면서도 그녀가 그들을 비판의 도마 위에 올리는 것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이다. 즉 그들이 재현과 대표를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이 유럽의 지식인들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억압받는 타자들을 투명하게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Can Subaltern Speak?" 66-75).

스피박은 최근의 저서 『포스트식민이성비판』에서 서구 메트로폴리탄 담론이 어떻게 교묘하게 작동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서구 비판 담론의 위대한 세 명의 거두인, 칸트, 헤겔, 마르크스를 해체적으로 읽는다(Postcolonial Reason 1-111). 이들은 사실상 근대적 의미에서 타자를 자아와의 관계 속에서 정초해낸 사람들이자, 타자의 배제를 보이지 않게 정교하게 수행해낸 사람들이다. 이 세 사람의 해체를 통해 스피박은 서구 담론에 의해 완벽하게 폐제(foreclosure)된 원주민 정보원의 흔적을 쫓는다. 여기서 '폐제'란 원래 '저당물의 반환권 상실을 의미하는 법률용어'로서 법원의 판결에 의해 상속인의 자격을 폐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프로이트에게 폐제는 '억압과 구분되는 특수한 방어기제'를 의미한다. 여기서 자아는 용납되지 않는 생각을 그의 정동(affect)과 함께 송두리째 거부하여 마치 그러한 생각이 자아에 떠오른 적이라고는 한번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울프맨 사례"를 읽으면서, 폐제를 어떤 요소가 한번도 존재해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상징계 밖으로 거부해버리는 것으로 정의하고 폐제의 대상은 기본적 능기인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제안한다. 아버지의 이름이 주체에게서 폐제될 때 채울 수 없는 구멍을 상징계에 남긴다. 스피박은 이 개념을 원주민 정보원(native informant)과 연결시켜서 원주민 정보원의 익명성, 혹은 그 이름의 암호화는 이러한 폐제와 연결된다고 본다.

칸트에서 원주민 정보원은 반성적 판단(Reflective Judgement)의 자율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용되고, 헤겔에서는 정신이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움직여 가는 증거로서 이용되고, 마르크스에서는 생산양식의 서사에 규범성을 부여하기 위해 이용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많은 가면을 쓰고 나타났지만 우리에게 부과된 한계를 극복해주기 위한 것으로 포장된다. 즉 서구는 가난한 제3세계를 도와주어야 하고, 그들을 문명화시켜야 한다는 등의 논리로서 말이다. 하지만 그 역의 경우 즉 유럽의 부, 문명에 대한 제3세계의 기여는 영원히 폐제된다. 이러한 견지에서 스피박은 비판의 대가인 칸트에서 시작하여 서구 담론의 한계를 지적한다. 칸트는 사실 인간학을 최초로 정초한 사람이자, 철학에서 신을 추방하고 그 자리에 이성이 들어서야 하는 이유를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설파한 인물이다. 이러한 칸트에서 스피박은 무엇보다도 그의 미와 숭고의 구분 중 특히 숭고의 개념에 천착한다.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설명한 바에 따르면 미적 경험에서 주체는 객관적인 대상의 속성과 상관없이 인식의 대상을 구성한다. 미의 쾌락은 인지 대상을 재현할 수 있는 주체의 능력에서 생겨나는 쾌락이다. 즉 주체는 재현을 통해서만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 숭고의 순간에 주체는 합리적 의지에 응해야 하고, 합리적 의지가 개입하여 박탈의 순간을 덮어주어야 한다. 즉 숭고는 감각적인 것보다 이성적인 것을 우위에 둔다. 따라서 숭고는 초감각적 판단(Bestimmung)에 의거해서만 감지될 수 있다.

칸트가 『순수이성 비판』에서 거듭 강조했듯이 초감각적 판단은 본래 제시할 수 없는 것인 동시에 재현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현상계에 속하는 인간의 언어와 개념으로 포착될 수 없다.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숭고하다고 명명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의 우위 속에서만 가능하다. 즉 인간의 정신에 있어서도 상상력이나 오성 개념처럼 감각적 현상계에 관여하는 인식 능력이 아니라 초감각적 본체계에 속하는 이성의 이념만이 숭고의 진정한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칸트의 논리를 따라가게 되면 도덕적 관념의 발전이 없는 숭고는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소위 말하는 원주민, 문화의 세례를 받지 못한 야만인들에게 숭고는 단지 무서운 것에 불과하다. 즉 이들에게는 현상계를 넘어선 초월적 이성 이념이 환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칸트에서 문화의 세례를 받지 못한 인간(raw man)은 주체를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그의 논리는 유럽인의 주체성은 숭고의 명명자로, 자연의 장엄함의 정복자로 나타나고 그 반면 원주민은 열등하고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지배의 구조를 설파하는 것이다. 반성적 판단이 특권화 되고 대문자 인간(Man)을 인간들(men)로부터 차별화할 때, 폐제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칸트 비판은 14년 전에 출판된 [세 여성 텍스트와 제국주의 비판]에서 이미 정초된 것이다. 특히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제인 에어』에서 제인의 여성 개인주의는 버사(Bertha)의 희생 위에서 성취된다. 버사를 제인의 분신으로 읽거나 아예 배제해버리는 기존 독법들은 버사의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을 간과하는 것이다. 따라서 스피박은 칸트 철학과 제인 에어의 버사를 연결하여 읽는다. 즉 순수이성에 의해 주어진 보편적 도덕 법칙이 없는 버사는 인간이 아닌 것이다.

물론 이러한 원주민의 '폐제'는 단지 19세기 소설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카리브 해 출신의 진 리이스(Jean Rhys)에 의해 다시 씌어진 『제인 에어』인 『광대한 사가소의 바다』(Wide Sargasso Sea) 역시 원주민의 '폐제'를 행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 소설은 19세기의 버사를 반제국주의/반식민주의의 시각으로 다시 읽게 해준다. 하지만 앙토와네트(Antoinette)라는 원 이름을 회복한 버사는 다시 씌어진 소설에서도 집에 불을 지르고 자살함으로써 제인 에어를 독립적 주체로 만들어주는 결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원주민의 목소리를 제대로 대변하려는 인물로 설정된 하녀 크리스토핀(Christophine)은 사실상 자메이카의 원주민이 아니라 마르티니크 출신이다. 분류학적으로 그녀는 순수한 원주민이라기보다는 선량한 하인의 범주에 속한다. 하지만 크리스토핀은 텍스트에 등장하는 최초의 해설자이며, 이름을 가진 발화체이다. 그러나 이를 인정한다 할지라도 작품의 후반부로 들어서면 그녀의 목소리는 종적 없이 사라지고 만다. 이는 제국주의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로서 원주민/비서구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한편 『역사철학강의』의 서론에서 "세계사는 자유에 대한 의식의 진보"(19)라고 선언한 헤겔은 동양, 특히 인도나 중국에게는 역사가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동양, 혹은 보다 포괄적으로 '비서구'는 그의 역사철학의 기초가 되는 '발전' 과정으로 설명될 수 없기에, "역사의 바깥"에 위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116). 즉 비서구인을 '자유'와 '개인적 자립성'의 결여로 특징짓는 헤겔 역시 타자를 배제하는 유럽 중심적 사유의 대표적 본보기가 된다.

타자 담론의 선봉에 서서, 현재에도 그 영향력을 상실하지 않고 있는 마르크스 역시 이중의 폐제를 행한다. 그에게 두 가지 폐제의 심급이 존재한다. 그 첫째는 그가 자본의 논리 바깥에 거주하는 주체들을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아시아적 생산 양식은 원시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를 거쳐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자본 생산의 선적 구성에 들어맞지 않을뿐더러 인도, 중국, 한국 등 모두가 아시아라는 하나의 틀 속으로 융합된다. 즉 마르크스는 아시아, 아프리카 등의 비서구 공간을 서구적 규범에 입각하여 서술하려고 시도함으로써, 국가와 민족들 간의, 그리고 그 내부의 이질성들을 추방하는 것이다(Postcolonial Reason 72).

이것은 스피박이 스스로를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선언하면서도 가장 진보적 이론가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마르크스를 비판의 도마에 올리는 것은 '타자'를 배제하고 원주민을 폐제시키는 데 있어서는 마르크스도 다른 유럽의 비판 이론가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또한 스피박이 여성이라고 해서 유럽 페미니즘을 이 목록에서 제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서구의 역사에서 제1세계 페미니즘의 공헌을 폄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1세계의 페미니즘이 제1세계의 공간을 넘어서고자 할 때, 그들이 다른 세계의 여성들을 '제3세계'라는 편리한 기표로 환원하는 양상에는 위에서 언급한 비판의 대가들과 결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즉 유럽 페미니스트들은 제1세계 여성 중심의 특권과 유럽 지식인 여성 입장을 보편화함으로써, 다른 세계에 속한 여성을 전유하고 배제하게 된다는 것이다(Worlds 134-153).

이글튼을 포함한 많은 동시대의 많은 비판 이론가들 역시 오염되지 않은 재현/대변을 찾지만, 오염되지 않은 재현/대변은 존재하지 않는다. 데리다의 파르마콘의 논리처럼, 이러한 타자의 논리는 헤게모니 문화에 한편으로는 독이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권위를 재확증해줌으로써 그 헤게모니를 초월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따라서 스피박은 자신을 포스트식민 이론가로 입장 정리를 하면서도 솔기 없는 단순화된 포스트식민 담론에 문제를 제기하고 포스트식민 담론이 자신이 폐기하고자 하는 그 구조와 어떻게 공모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자 함으로써 타자 담론의 확실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타자담론에 대한 경의는 또 다른 통일화된 체계와 구조를 창출할 수 있다. 체계화된 저항이 체계의 긍정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스피박은 이 두 가지 가능성에 대한 책임 있는 반응을 요구한다. 즉 타자를 서구의 인식틀로 환원시키지 않으면서 그것의 표현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것을 그녀는 "불가능한 것의 경험으로서의 윤리학"이라고 칭한다("Translator's Preface" xxv). 이것은 윤리학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타자를 서구의 언어와 지식으로 구성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말하는 것이다.

책임 있는 포스트식민의 개입은 대표/재현의 (불)가능성을 통해 수행된다. 이 설명에서 재현(Darstellung)은 타자성을 설명하기 위한 새로운 어휘이다. 포스트식민주의의 거부는 이글튼이 주장하듯, 그 개념의 생산성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타자와의 직접적 관계설정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타자를 직접적으로 대변하려고 하는 순간 앞선 '사티'의 예에서처럼 정작 타자의 목소리는 상실되어 사라지고, 지식인 자신의 입장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글튼의 주장처럼 스피박의 텍스트가 포스트식민 담론의 비판이라면 그것은 포스트식민담론의 본질주의적 환원을 경계하는 것이요, 주체의 신화화에 반대하면서 주체의 탈신화화의 (불)가능성을 전경화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스피박이 '(불)가능성'에서 언제나 부정어 '불'을 괄호 속에 처리하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 설정이 가능해지기 위한 조건의 탐색을 위해서인 것이다.

레비나스와 마찬가지로 스피박은 타자와의 대화의 공간을 열고자 한다. 그러나 레비나스와는 달리 의사소통의 순환을 여는 것은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싸워야 한다. 타자의 재현은 언제나 타자에 대한 지식을 가정하고, 동일성의 구축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스피박은 타자에 접근할 수 있는 결정적 지점이 그 의식을 동일성보다는 차이에 위치시킬 때 보다 잘 드러날 수 있다고 본다. 스피박은 데리다의 그늘 속에서 글을 쓰면서 타자를 지식의 대상으로 구성하지 않는다. 타자가 지식의 대상으로 구성될 때 폐제가 생겨난다. 이 폐제에 대항해서 스피박은 타자를 복수의 대중(multiplicity)에 개방함으로써 타자에 대한 책임감의 긍정적 윤리학을 내세운다. 책임감은 의미체계로 환원할 수 없는 타자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사례로서 19세기 소설을 20세기에 다시 쓴 쿳시의 『포』(Foe)와 인도 여성 작가 마하스웨타 데비의 단편집 『상상의 지도들』(Imaginary Maps)에 실려 있는 세 편의 단편 중 [익룡, 푸란 사하이, 그리고 퍼싸]("Pterodactyl, Puran Sahay, and Pirtha")를 살펴보면서,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타자의 위상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쿳시의 『포』에 등장하는 프라이데이는 『로빈슨 크루소』의 프라이데이와는 달리 스피박이 상정하는 절대적 타자, 전적인 타자로 간주될 수 있다("Theory in the Margin" 157). 드포의 크루소가 타자인 프라이데이에게 말을 거는 법을 배우지 않고 자신의 언어를 가르치는 것과 반대로 쿳시의 프라이데이는 누군가에 의해 이미 혀가 잘려나가고 없으며, 쿳시의 크루소는 굳이 프라이데이에게 서구의 어휘를 각인시키고자 하지도 않는다. 이 소설의 화자는 남성인 크루소가 아니라, 드포의 『록사나』(Roxana)의 주인공과 이름이 동일한 여성인 수잔(Susan)이다. 수잔은 자신의 표류기를 책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프라이데이를 원주민 정보원으로서 활용해야 한다고 느낀다. 따라서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의 "빈 구멍"(Foe 121)을 메우기 위해 프라이데이에게 말 대신 글이라도 가르치려고 노력하지만, 프라이데이의 세계는 도저히 번역 불가능한 것인 동시에 모든 번역 시도는 언어오용에 불과하다. 쿳시의 크루소는 이러한 시도의 무용성을 가장 먼저 보여준다. 그는 수잔에게 프라이데이의 잘려나간 혀를 보여주면서 '라-라-라'라고 해보라고 시키자, 프라이데이는 '하-하-하'라고 반복한다(Foe 22-23). 하지만 수잔은 이에 포기하지 않고 크루소가 죽은 후 프라이데이와 함께 영국으로 가서, 영국 항해에서 죽음을 맞이한 크루소를 대신하여 그에게 그림을 통해서라도 언어를 가르치려고 노력하고, 프라이데이를 드포의 프라이데이처럼 주체로, 그리고 원주민의 대변자로 만들려고 계속해서 시도한다.

노예상인인 무어인이 그의 혀를 자르는 그림을 보여주기도 하고, 주인이었던 크루소가 혀를 자르는 그림을 보여주기도 하면서, 노예상인이 혀를 잘랐는지, 크루소가 혀를 잘랐는지를 질문하고자 했지만, 수잔은 자신이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Foe 70). 사실 그 그림은 프라이데이에게 "크루소가 자애로운 아버지로서 아이인 프라이데이에게 생선 한 덩어리를 입에 넣어주는"(Foe 68-69) 그림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프라이데이에게 유럽의 언어를 부과하려는 시도는 늘 이런 식으로 실패한다. 이러한 시도는 서구의 타자로서 재탄생시키려는 제국주의의 시도에 불과한 것으로 전통적 서구의 의미체계로 프라이데이의 침묵과 소통하려는 그녀의 모든 노력은 무위로 돌아간다.

이것은 그녀가 서구 주체의 한계를 벗어 던질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완전한 타자로 프라이데이가 등장하는 것은 그의 침묵의 세계를 열어보려 했던 수잔의 모든 노력이 실패로 끝난 뒤인 제4부에 이르러서이다. 프라이데이가 석판 위에 반복해서 쓰는 글자 O는 "지배자의 언어가 전유할 수 없는 구멍, 즉 타자성"(Parry 155)을 나타내는 거부의 상징이다. 따라서 수잔이 프라이데이의 전적인 타자성을 인정하는 것은 그의 춤과 음악을 통해서이다. "그는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 있었다 … 춤추는 동안에 그의 목에서는 평상시의 그의 목소리보다 더 깊은 콧노래가 나왔다. 때때로 그는 노래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92).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라이데이의 기호는 수잔에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남으며, 4부에서 새로 등장하는 화자에 의해 "그의 입은 열리고"(157), "그의 내부로부터 흘러나오는 기류는 … 지구의 끝으로 뻗어나간다"(157). 물론 이 장면은 서구의 이성과 인식을 벗어난 곳에서 거주하는 원주민의 존재에 대한 암시가 된다.

그러므로 이 텍스트는 서구가 "타자를 이해할 수 있도록 서구의 인식을 투사하여 타자를 변형시킨 경우만을 타자로 만드는 관습를 깨뜨린다는 점에서 가치 있는 소설"로서 평가될 수 있다(Spivak, "Theory in the Margin" 179). 그러나 비록 이 소설에서 저자가 재현 불가능한 것을 가시적으로 만들어주는 효과는 분명히 있지만, 과연 프라이데이의 몸을 기호화함으로써 원주민을 신비화하는 역설을 낳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게 만들기도 한다. 혹자는 이것이 제3세계 출신이기는 하지만, 백인인 동시에 지식인이라는 저자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원주민만이 원주민을 말할 수 있고 흑인만이 흑인을 말할 수 있다는 본질주의는 타자의 공간을 열어주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는가?

하지만 타자의 윤리학을 세우기 위한 일종의 실천 행위로서 스피박이 직접 번역 소개한 방갈(Bengal) 태생의 지식인인 데비의 소설은 훨씬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데비 자신이 지식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타자의 부름에 보다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피박이 데비를 번역하여 소개하고자 하는 의도 역시 이러한 반응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녀는 『상상의 지도들』의 영역판 서문에서 "하위자와의 윤리적 특이성을 설정하기 위해 요청되는 '수고스러운 노동'을 기술한다(xxv).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는 '불가능한 것의 경험'이다." 이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모든 억압받는 민중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연계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타문화를 서구적인 방식으로 구성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익룡, 푸란 사하이, 그리고 퍼싸]의 서사를 이끌어 가는 것은 진보적 지식인이자 저널리스트이며 남성인 푸란 사하이(Puran Sahay)이다. 낮은 계급 출신의 소년이 벽에 새긴 "익룡"의 그림은 쿳시의 프라이데이와 같은 재현 불가능한 타문화, 혹은 타자의 표상이다. 그리고 쿳시의 수잔과 마찬가지로 비록 서구인은 아니지만, 서구식 교육을 받고 자란 푸란은 그 그림과 퍼싸 지역의 문화를 재현해내지 못한다. 수잔의 서사가 사실을 보증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푸란 역시 퍼싸 지역의 이야기를 공적인 문서로 만들어내지 못한다. 하지만, 쿳시의 소설에서 수잔이 화자로서의 역할을 상실하는 것과는 달리, 이 단편에서 우리는 신문사로 보내지지 않은 푸란의 사적인 기록을 통해 비록 그것이 재현/대변될 수는 없지만, 서구의 배움을 벗어 던지고 타자에 반응하려고 시도하는 푸란을 통해 책임과 윤리학의 가능성을 읽을 수 있다.

이 소설의 초반부에서 푸란은 퍼싸 지역의 부족사회를 취재해달라는 친구이자 정부관리인 하리사란(Harisharan)의 요청을 받는다. 푸란은 왜 그 지역이 기근에 시달리게 되었는지, 정부는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를 묻는다. 하지만 그의 질문은 단지 그와 부족민 사이의 틈새만을 벌려놓을 뿐이다. 그는 서구적 의미의 '발전' 담론으로 부족민에게 접근하지만, 발전이란 부족민들에게 문화적 말살에 다름이 아니다. 그림의 공개와 부족의 박물관화는 같이 가는 것이기에, 그들은 '익룡'의 그림이 공개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따라서 푸란은 퍼싸 지역의 문화를 성공적으로 번역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인식한다. "우리와 익룡 사이에는 소통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두개의 세계에 속하고, 우리사이에 소통의 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익룡에는 메시지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포착할 수 없었다"(195).

하지만 그는 퍼싸에 머물면서 타자와의 소통이란 시혜적인 동정이 아닌 "사랑"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현세기의 태양이 서구의 하늘에 떠 있을 때, 오직 사랑만이 거대하고 고통스럽고 폭발적인 사랑만이 이 작업에 헌신하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 공격적인 문명은 무시무시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역사를 보아라. 공격적 문명은 매번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그 자체를 파괴한다. 사랑, 이 고통스러운 사랑만이 첫 단계이다. 이제 푸란의 놀라운 심장은 퍼싸에 대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발견한다"(196). 푸란은 익룡의 모습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제공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서구화된 지성이 포착할 수 없는 신화적 메시지로서 익룡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푸란은 이성을 폐기하지만, 책임감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성을 넘어선 사랑"이다. 푸란이 익룡의 그림을 보는 장면에서 푸란이 이 종족의 지속되는 역사적 기록의 일부가 되는 것은 이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푸란과 마찬가지로 스피박이 전하는 최종 메시지는 '사랑'이다. 여기서 사랑은 선택이나 동맹이 아닌 궁극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것과의 대면으로, 반응할 수 있는 능력, 곧 책임의 윤리학과 연결된다. 스피박에게 이 텍스트의 이 사건은 푸란이 인도의 농촌 부락 사회의 특이한 조건을 인식하기 때문에 윤리적 반응을 말해주며, "발전의 알리바이가 부족을 착취하고 그들의 생활체계를 파괴하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 사용되는 지 인식하기에" 윤리적 반응이 생겨나는 것이다(256).

사이몬 크리처리(Simon Critchley)가 해체론이란 그 특성상 비정치적이고 관념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듯이(236-7), 스피박의 긍정적 해체론이 지니는 전략 역시 정치적 실천과는 아주 거리가 멀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녀 특유의 난해성과 복잡성은 크리처리의 주장처럼 의심할 여지없이 데리다의 강력한 영향을 입었음을 반증하는 동시에, 그녀가 포스트식민 세계에서 파헤치려 하는 타자성의 동학과 모호함을 도리어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많은 우려를 낳는다. 하지만 본 글은 이러한 난해함을 비난하기보다는, 스피박이 식민지 타자의 역사를 헤겔적 총체성의 자기 실현과정으로 구성/재현하는 것이 곧 "억압을 만들어낸 징후들을 지워버리는 과정"(Prakash 172)이라는 비판 의식과 이분법적 논리에 상주하지 않는 타자의 타자성을 읽어내고자 한 시도에 주안점을 둔다. 이것은 기존의 타자 담론을 해체하고, 식민담론이 타자에게 부여한 본질을 벗겨내고, 그 본질에 포섭되지 않은 '차이'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며, 그 본질의 근본주의적 환원을 경계하는 것이다. 따라서 스피박이 주목하는 이질성과 차이는 타자의 타자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과정이며, 이것은 동질적 서구적 주체와 그 주체의 반영으로서 타자를 상정하는 이데올로기의 작동 과정에 대한 심문이 된다. 따라서 스피박의 이론의 의의는 국가 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자본의 휘하에서 진행되는 전지구화가 이른바 문명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제4세계의 공간까지 침식하고 있는 상황에서 타자를 서구식으로 길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마주할 수 있는 방식을 탐색하고, 그것을 이성을 넘어선 사랑의 윤리학으로 나아가는 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데 있을 것이다.

≪부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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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Questioning the Otherness of the Other: Gayatri Spivak

Jeong, Hae-ook

Throughout the history of western culture and thought, philosophy produces western subjects engendered by simultaneously including and excluding the other. The concept of the other signifies what is unfamiliar and extraneous to a dominant subjectivity, the opposite or negative against which an authority is defined. This essay will explore 'the other,' adopting the strategies of G. Spivak, and read texts of some colonial and postcolonial novels.

The problem of the other is distinctive of contemporary postcolonial studies. While Edward Said raises the question as to how otherness could become a genuine oppositional force and a useable value in Orientalism, he seems to describe the otherness only as the 'non-white, non-West.' Gayatri Spivak, however, tries to displace the fixed Self/Other dichotomy in favor of an ethical response to oppressed people in the Third and Fourth World.

We can distinguish two sorts of otherness in Spivak's works: a self-consolidating Other and an Other who is absolutely Other. The former is an imaginary other, a fantasy other through whom the self comes to know itself. In Jane Eyre and Robinson Crusoe, Bertha Mason and Friday appear as two representative figures of the self-consolidating Other; they are seriously distorted representations of the others as a result of the prejudiced and ideologically motivated stereotypes held by the West.

The concept of the Absolute Other that Spivak appropriates from the ethics of Levinas by way of Derrida is meant to shatter the mirror of narcissism in which the self confronts its other. In J. Coetzee's Foe and Mahasweta Devi's short story, "Pterodactyl, Puran Sahay, and Pirtha," we may find the figures of the absolute Other as well as allegories of the ethical relation. Especially in Devi's short story, the scene that Puran, the protagonist, sees the cave drawing of a pterodactyl, approximates ethical response to the absolute other that cannot be represented or grasped through the modern intellectuals.

By invoking the historical exploitation and oppression of the disempowered, Spivak gives us a message: an ethical affirmation which is described in terms of love. We, as a third-worldian, need to learn how to step out of the cultural essentialism and start experiencing otherness.

key words: Otherness, Spivak, Devi, the 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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