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흐트와 아들
빌렘 얀 오텐 지음, 유동익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네덜란드 작가가 쓴 소설은 처음 읽는다. 게다가 소설의 화자는 바로 캔버스이다.

그 낯섦을 계속 의식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읽어내기가 수월한 책은 아니었다.

장편소설치고는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이야기는, 아직 팔리지 않은 캔버스의 목소리로 시작된다. 아직 백지의 상태로 누군가에게 팔리길 기다리는 캔버스는 이내 초상화가인 빈센트에게 팔리게 된다. 캔버스는 그를 '창조자'라고 호명한다.

하지만 화자인 캔버스 또한  창조자나 마찬가지다. 

빈센트에게 초상화를 의뢰하러 온 스페흐트가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스페흐트가 의뢰한 초상화의 주인공은 바로 스페흐트의 죽은 아들이다. 

 

당신은 당신이 그린 초상화로 한 생명을 구하게 될 겁니다. (60쪽)

 

스페흐트가 등장하기 전까지 왜 이 소설의 제목이 '스페흐트와 아들'일까를 내내 궁금해하면서 책을 읽어내려갔다.

 창조자가 스페흐트의 아들인 싱어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아 그래서 제목이 이거였구나'싶었지만,

소설의 후반부, 싱어의 정체(?)가 드러나면서부터 다시 고민이 시작됐다.

 

어느 누구도 아닌 스페흐트 씨로 인해 내가 존재했다.

(…) 스페흐트 씨는 나를 이렇게 살아 있는 모습으로 보고 싶어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는 갑자기 그것을 깨달았다. 이 세상에서 나를 보고, 나에게 말함으로써 나를 내 위치에 세워줄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싱어! 네가 거기 있구나. 이제 너는 더이상 죽은 아이가 아니야. 지금 네가 바로 현재의 모습이야. 이렇게 말해줄 유일한 사람은 스페흐트 씨였다.

나는 이제 정말 철저히 혼자다. 나는 스페흐트 씨가 죽은 다음에는 싱어의 모습을 지닌 캔버스에 불과할 것이다. (165쪽)

 

이 문장을 읽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화자인 캔버스 자신이 스페흐트 씨의 아들일 수도 있겠다고.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나서야 나는 왜 이 소설의 제목이 <스페흐트'의' 아들>이 아니라 <스페흐트'와' 아들>인지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번역된 제목이기 때문에 오독일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 사람들은 꼭 아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아빠가 누구인지 몰라도 그렇게 생각한다. 꼭 그래야만 한다. 그들은 자신을 결코 떠나지 않는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206쪽)

나와 스페흐트 씨는 그렇게 몇 분 동안을 계속 앉아 있었다. 스페흐트 씨가 그의 무릎 위에 자신의 아들을 올려놓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되길 원했던 등이 굽은 사람 위에 있었다. 그것은 상상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어떻게 나를 만지지도 않고 손끝으로 내 위를 움직이는지, 위에서 아래로, 찢긴 곳을 따라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나의 발끝에서 머리까지 움직이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222쪽)

 

기자인 민커가 싱어의 정체를 밝히면서 스페흐트는 졸지에 변태성욕자가 되었지만 어쩌면 그건 정말로 오직 민커만의 시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게 마련이니까.

(이건 이 소설을 읽어내는 방법과도 무관하지 않다. 정말 의미가 풍부한 소설이다. 읽다 보면, 탄생과 죽음, 혹은 예술에 대한 의미를 찾아낼 수도 있고, 타인의 시선으로 인해 규정될 수밖에 없는 정체성, 혹은 사랑에 대한 의미를 읽어낼 수도 있으므로.)

스페흐트는 정말로 아버지가 되고 싶었던 사람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사랑했던 모습의 싱어를 다시 살려내고 싶었던 스페흐트의 욕망은 기실 세상 모든 인간의 욕망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창조자는 싱어를 그리면서 자신의 어린시절을 들추어낸다. 바로 테인이라는 친구와의 기억이다. 이 기억은 성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데 마치 스페흐트와 그의 노예였던 싱어와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완성된 그림을 보고난 후 창조자의 부인이 아기를 임신하게 되는데, 그럼으로써 화자인 캔버스는 싱어이기도 하고 테인이기도 하며 동시에 스타인이라고 이름 지어진 창조자의 아들이 되기도 한다. 창조자가 캔버스를 태우고 난 뒤 그의 아들이 태어나게 되는데, 그 순환 때문에 마치 죽음과 탄생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절묘하게 중첩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테인이었다. 나는 그의 아이였다. 나는 리데베이였고, 민커였다. 나는 그의 앞에 서 있는데도 그가 보지 못한 모든 사람들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우리가 얼마나 작고, 얼마나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보호받지 못했고, 우리가 얼마나 가치 없는지를 봤어야만 했다. (205쪽)

 

 

나라는 초상화 작품은 인간에게 보이기 위해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인간은 우리 같은 작품보다 죽음 앞에서 더 두려워한다. 나는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내가 가진 두려움에 천 개의 두려움을 더하면 바로 그게 인간의 두려움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내가 왜 이것을 이해하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잠시 후에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그러나 왜 내가 인간들은 자신의 미래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알 수 없고, 자신들이 사라져버린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하는가?

스페흐트 씨가 누구였든 그는 싱어가 사라져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창조자에게 가능하지 않은 것을 부탁했던 것이다. 그를 살려내라고. (…)

인간들은 자신들이 창조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가질 수 없는 무언가를 만들 뿐이다. 사람들은 괴물을 세상에 내놓는다. 사람들은 우리를 이용해 많은 싱어를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을 만들고, 그런 다음에는 죽음처럼 두려워한다. (182쪽)

 

이 소설을 통틀어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이다.

 

독자는 스페흐트와 싱어 사이의 일에 대해서 완벽하게 알지 못한다. 그들의 감정을 포함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단 하나의 진실은 바로 이것뿐이다.

'그는 싱어가 사라져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

 

이런 생각을 하고보니, <롤리타>의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다.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너와 내가 나눌 수 있는 단 하나의 불멸성이란다, 나의 롤리타.

 

 


'사람들은 괴물을 세상에 내놓는다'라는 문장이 씁쓸하게 읽혔다. 나약한 인간 존재의 모습 때문에, 어쩐지 쓸쓸하다.


스페흐트 또한 '단 하나의 불멸성'으로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선택한 건지도 모른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창조자의 캔버스에 옮겨진 그 많은 모델들도 언젠가는 죽는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스페흐트의 아내인 리데베이가, 죽은 엄마의 입술자국이 찍혀 있는 컵을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는 것처럼, 인간은 그렇게라도 자기 안의 사람들이 존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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