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 안드리치 단편집 - 지만지고전천출 349
이보 안드리치 지음, 김지향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09.05.16]


 번역자인 김지향은 <이보 안드리치 단편집>이라는 제목 아래 작가의 단편들을 묶으면서 "그(*이보 안드리치)의 문학적 사유와 정신적 교감의 틀을 만들었던 유년기 안드리치의 기억을 더듬어보는 것은 오래된 추억의 창고, 보물 상자를 열어보는 것만큼 설레고 흥분된 일일 것"(11)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작가가 태어나고 자란 보스니아라는 나라에 대해 알지 못하는 보통의 한국 독자라면 그의 기억을 더듬는 것이 그다지 설레고 흥분된 일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 단편집에서, 더불어 작가에게 있어 유년기의 보스니아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 비록 이 책이 보스니아의 이야기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수월하게끔 편집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쉽게 와 닿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몇 가지 대표적인 나무만 가지고 숲 전체를 아우를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나는 "1961년 '조국의 역사와 관련된 인간의 운명을 철저히 파헤치는 서사적 필력'이라는 평가로 안드리치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드리나 강의 다리>를 먼저 읽어보았다. 기왕 보는 작가, 숲의 윤곽이나마 파악하고 싶어서. 작가가 유년기를 보낸 곳이 바로 이 드리나 강변의 소도시 비셰그라드였다. 드리나 강의 다리가 작가에게 미친 영향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는 점은 이 소설을 읽어보면, 아니, 이런 소설을 썼다는 그 자체로서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보 안드리치 단편집>과 <드리나 강의 다리>를 읽고 나서 알게 된 점은 작가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가 외세의 부침에 많이 시달렸다는 사실과 작가의 서사전개 방식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소설 작법 스타일. 장편에서도 그랬거니와 단편집에서도, 작가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 혹은 주제를 돋보이게끔 하려는 구성적 의지를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말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소설이라는 장르로 분류될 이 단편들이 내게는 에세이처럼, 특히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쓴다는 점에서 회고담처럼 느껴졌다. 파노라마라는 물건을 축으로 자신이 어린 시절 만난 사람들과 겪었던 일들을 꿈과 현실로 교묘하게 중첩시킨 <파노라마>와, 동물을 의인화하여 우화적으로 써낸(그러나 실은 이 작품만이 거의 유일하게 소설처럼 느껴졌던) <아스카와 늑대>를 제외하면 다른 모든 작품들이 그랬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작가가 글을 쓰면서 특히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아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이 문장을 통해 직접 독자에게 알려주고 있으니까. "회상ㅡ때때로, 그리고 누군가의 회상ㅡ은 움직이는 커다란 힘을 가질 수있다.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하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 동안, 그것들은 망각 속에 누워서 빛도 발하지 못하고 움직이지도 않은 채썩어갈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어느 순간 누군가의 생생하고 힘 있는 기억으로 움직일 때, 그다음에는 끝까지 갈 필요가있다. 모든 것을 모든 면에서 밝힐 필요가 있고, 사실 그대로 있었던 그대로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만약 필요하다면 보충할 필요도 있다."(87-88)


 자신이 사는 곳에서 했던 서커스 공연을 보며 느꼈던 감정들과 그 후 서커스 단원들과 연관된 어떤 사건에 대해 쓴 <서커스>, 유태인들을 공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고 그 후 느꼈던 괴로움과 수치에 대해 쓴 <아이들>, 친구의 나쁜 짓에 대해 함구함으로써 발생한 미묘한 죄책감과, 납득할 수 없었기에 더욱 잊을 수 없는 아버지의 매질에 대해 쓴 <창(窓)>, 탑에서 놀며 느꼈던 공포감과, 그곳에서 만난 소녀에 대해 쓴 <탑>, 고등학교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실수로 손상시키고 그로 인해 겪은 괴로움에 대해 쓴 <책>까지. 거의 모든 단편들이 집착에 가까울 만큼 어린 시절의 기억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얼마나 수도 없이 당시나 그 이후에도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던가. 그렇지만 결코 나는 해답을 얻지 못했다."(106) 작가는 어쩌면 그 해답을 구하기 위해, 아니면 그 해답을 구할 수 없어서 어린 시절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답하려고 했던 걸까. 소설의 내용을 봐도, 보스니아의 역사를 보더라도, 심지어 다음과 같은 글을 접하더라도 어린 시절의 기억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우리가 '어린이'라고 부르는 작은 사람들은 시간이 흘러 현명하고 성숙한 사람들이 되고 난 뒤에는 잊게 되는 자기들만의 커다란 아픔과 기나긴 고통을 가지고 있다."(108) 아니면 <책> 서두에 인용한 다음과 같은 글. "또다시 스스로 묻는다네. 왜 어린 시절은 그렇게 불행한 것일까?"(134)


 하지만 작가는 결국 기억을 떠올리며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있었다. 왜냐하면 "말로도 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바로 그런 생생한 단편적인 광경이 때때로 나타나기도 하고 기억 한편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133)다고 믿었으니까. 사진은 사진이고, 세상은 세상이므로 "그 몇 개 안 되는 사진들의 죽은 풍경과 지역들은 아무것도"(40) 되살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작가 자신의 파노라마로부터 펼쳐지는 세상의 많은 그림들이 빠르게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져버리는 걸 막기 위해서, 혹은 "영원히 존재하는 모습 그대로 남아 있으려는 불가피한 한순간을"(71) 그려내기 위해서, 고통스러웠고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쓴 것이 아닌가 싶다. 결국 그에게는 어린 시절이 소중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ps1.

 단편집 첫 수록 글인 <나는 어떻게 책과 문학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는가?>는 같은 역자가 번역한 <드리나 강의 다리> 해설에는 <어떻게 내가 문학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었을까>로 번역되어 있다. '문학'에 대해 말한다고 하기에는 너무 '책'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딘가에서 급하게 청탁을 받아서 휘리릭 써버린 듯한 느낌이 들어 아쉬운 글이었다.


ps2.
 
 단편집을 읽으면서 계속 히구치 이치요가 생각났다. 이 둘은 소설 스타일도 다르고 주제도 다르고 국적도 다르고 사용 언어도 다르고 활동 시기도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떠오른 이유는 (가라타니 고진의 표현을 빌리자면) 몰이상(沒理想)적이라는 점에서 둘이 유사했기 때문에. 다른 이유가 또 있으려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