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이것은 깐죽거림이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 도시에 가다
이득재 지음 / 문화과학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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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M 쿳시의 소설 <페테르부르크의 대가>에서도 암시된 바 있지만,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무엇보다도 '페테르부르크'란 도시 공간의 작가이다. 그때의 페테르부르크는 근대 러시아의 모순과 운명을 집약하고 있는 상징적 공간이기도 하다. 저자가 이 책에서 제안하고 있는 것들도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비롯한다. 요컨대 '페테르부르크를 알아야 도스토예프스키를 이해한다'는 것.(저자가 왜 '레닌그라드'란 명칭을 고집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레닌그라드의 현재 명칭은 페테르부르크이고, 도스토예프스키 시대에도 물론 페테르부르크였는데 말이다.)

책에서 주로 다루어지고 있는 작품은 <죄와 벌>이다. 그리고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저자에 의해서 도시계획가로 변신 혹은 격상된다. 물론 이러한 관점이 작가와 작품에 대한 기존의 이해에 더 보탬이 된다고 주장한다면 별 문제는 없어 보인다. 다만, 거기에 한정하여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새로운 이해가 아닌 새로운 축소주의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할 듯하다.

그것은 도스토예프스키와 영화를 다룬 4장에서 수많은 영화들을 제쳐놓고, 유독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와 <죄와 벌>을 비교하고,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 두 편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두 편만을 대조시키고 있는 데서도 드러난다.(이왕 브레송 영화를 다룬다면, <백치>에 영감을 받았다는 <당나귀 발타자르>에 대한 분석은 왜 빠졌을까?) 그래서 아쉬움이 남는다. 그것은 저자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면서도, 그 주제들에 걸맞는 내용이 부피있게 다루어지지 않은 데서 느껴지는 아쉬움이다.

아마도 책을 급하게 준비한 탓인 듯한데, 내용들간의 유기적인 연관성이 부족한 한편으로 오타들도 눈에 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온순한 여인>(147쪽)은 <부드러운 여인>(151쪽)과 혼용되고 있고, '니끼타 미할코프'의 형인 영화감독 '안드레이 곤찰롭스끼'(콘찰롭스키가 맞다)는 그 아들로 잘못 소개되어 있다(122쪽). 타르코프스키의 책 <봉인된 시간>도 굳이 <시간 안에 새기기>(143쪽)란 제목으로 바뀔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어쨌든 '위대한'작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국내 저작이 매우 드문 형편에서 도스토예프스키란 이름만으로도 반가움을 갖게 해주는 책이다. 더구나, 저자는 그 '위대함'이란 꼬리표를 떼어내고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보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가 위기에 처한 인문학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말한다.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저자는 '책머리에'의 끄트머리에다 이렇게 적어 놓는다: '아무쪼록 본서가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단순한 깐죽거림이거나 냉소주의로 비쳐지질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니 이 서평도 절대로 깐죽거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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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내적 망명자의 삶과 죽음
닥터 지바고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23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지음, 오재국 옮김 / 범우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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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작가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와 닥터 지바고의 삶은 분리되어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소설의 작가와 주인공의 관계라기 보다는 시인과 시적 화자(poetic hero)의 관계에 가깝다.

러시아 문학의 전통에서 보자면,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이 '시로 쓴 소설'이었다면, 그러한 전통을 마감하는 <닥터 지바고>는 '소설로 쓴 시'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는 바, 이 작품 속에서의 지나친 우연의 남발은 일종의 '고의적인' 시적 기법의 일종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하다.

노벨상 수상과 데이비드 린의 영화로 더 유명해진 이 소설은 덕분에 20세기의 걸작 몰록에도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만한 유명세도 치르는 듯하다. 덕분에 이 작품은 그동안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그리고 지나치게 '멜로 드라마적'으로 읽혀왔다.

'눈덮인 설원에서의 지바고와 라라의 사랑 이야기'쯤으로 요약되어 온 것이다. 물론 그런 면이 없진 않다. 하지만, 작가 자신, 혁명기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동시대인들에 대한 일종의 '빚갚음'으로 이 작품을 구상했다는 고백을 음미해 봄 직하다. 다른 무엇보다는 이 소설은 역사 속에 놓인 한 인간의 삶과 그 의미에 관한 것이다.

여주인공 라라를 놓고 삼각관계를 이루는 두 인물, 지바고와 파샤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혁명과 관계한다. 지바고는 방관자적 지식인의 비겁한 삶을 끝까지 유지하며, 반대로 파샤는 적극적인 행동가로서 혁명(역사)에 적극 개입하지만, 둘다 불운한 죽음을 맞는다. 파샤는 자살하고, 지바고는 자신의 유고 시들을 남긴 채 길거리에서 죽음을 맞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 죽음이 삶의 의미인 것일까?

작가는 이야기가 종결된 이후에 유리 지바고의 시들을 덧붙임으로써 그의 삶이 예술을 통해서 부활함을 암시한다. 한 인간의 삶은 타인들의 기억 속에서, 그리고 그가 남긴 예술적 창작 속에서 촛불처럼 '타오르는 것'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세계를 바꾸는 일을 한갓 하찮은 일로 치부했던 라라와 지바고의 세계관에 다 동의할 수는 없어도, '역사'라는 명분에 굴복(?)하기 보다는 사회와 역사 속에서 내적 망명자의 길을 택한 한 시인의 삶을 존중할 수는 있다.

<닥터 지바고>의 운명은 그러나 주인공의 지바고의 삶과는 대조된다. 이 작품이 1958년 노벨상 수상작으로 선정되면서 내적 망명의 삶에서 꺼내어져 스캔들에 휘말려 든 파스테르나크는 2년만인 1960년에 건강악화로 사망함으로써 '역사'의 비정함을 또 한번 입증하였다. 그리고 우리에겐 파스테르나크의 마지막 시로서 <닥터 지바고>가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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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처럼 > 미술과 범죄
미술과 범죄
문국진 지음 / 예담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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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미술"과 "범죄", 양쪽 모두 조예가 깊지 못하여 읽기 전에 약간의 긴장감마저 들었던 책이다. 그런데 왠걸, 책장을 넘겨가면서 점점 책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가 처음부터 끝까지 내리 읽어내려갔다. 비전문적가인 나의 눈에 그림도 글도 쏙쏙 잘 들어온다.

법의학자인 저자는 이미 그림 속에 드러난 범죄와 범죄 심리에 대해 여러 편의 책을 냈다. 이번에는 "아름다운 명화에 깃들여진 인간의 원초적 범죄 심리"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살인, 참수, 독살 그리고 도둑맞은 그림들로 크게 4장의 구성이 되어 있고 다양한 사례와 그림, 화가들이 소개되어 있다.

서양의 미술이어서 그럴까, "신화"와 "성경"이 가장 큰 키워드라고 생각된다.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성경에서 묘사된 범죄가 오랫동안 서양 화가들의 단골 주제가 되었다. 신화 속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여러 화가들에 의하여 수많은 그림들로 탄생되었고 성경도 마찬가지. 다윗의 경우 소년 시절 골리앗을 죽인 것과 왕이 된 후 세례 요한을 죽인 것이 다른 의미로 다가왔고, 또한 다른 각도로 묘사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침략자의 수장인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미망인 유디트의 이야기는 처음 접하는 것이었는데, 시대에 따라 화가에 따라 유디트가 투사의 모습으로 혹은 요부의 모습으로 다르게 묘사되는 것도 흥미로웠다.

화가 중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던 자는 카라바조. 평생 자신의 자화상을 그림 적은 없지만 수많은 그림의 주인공에 자신의 얼굴을 남겼던 화가였다. 특히 그 주인공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자였다는 점에서 그의 심리 상태를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었다.

예수의 성안포를 받게 된 베로니카 전설에 관한 저자의 해석도 이채롭다. "책형"이라는 그림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세 여인, 성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베로니카. 그들의 자세와 표정을 읽는 저자의 설명은 인상적인데, 그림 자체도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범죄를 소재로 하는 미술 작품을 소개하고 있기에, 흔히 알고 있는 명화가 아닌 새로운 그림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재미도 결코 작지 않다. 주제를 가진 미술 안내서의 재미를 처음으로 느끼게 했고, 저자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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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롭스 & 뭉크 판화전

요즘은 미술 전시회 소식만 전하는 일로도 1년을 다 채울 수 있을 듯하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다"는 말도 진리이지만, "세상은 언제나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 넓다"는 것도 진리이다. 예술도 예외는 아니어서 언제나 이 두 가지 진리를 반복적으로 증언해준다. 펠리시엥 롭스와 에드바르트 뭉크의 2인 판화전에 개최된다고 한다. 솔직히 롭스란 화가의 이름은 이번에 처음 들어보았다. 관련기사들을 옮겨놓는다. 발걸음이 또 미칠 지 어찌 알겠는가...

한국일보(06. 08. 14) 팜므파탈… 치명적인 아름다움 뒤의 풍자

-유럽 역사에서 19세기 말부터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까지를 ‘벨 에포크’(Belle Epoqueㆍ아름다운 시절)라고 부른다. 풍요와 퇴폐, 쾌락과 죽음이 우아하게 쌍을 이루던 그 시절 문학과 예술의 최고 인기 품목 중 하나는 팜므 파탈(femme fatalㆍ치명적인 매력으로 남자를 파멸시키는 여자)이다. 이건 남자들의 발명품이다. 19세기 중반 여성해방운동이 일어나면서 여성들이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하자 그에 대한 경계심이 팜므 파탈로 나타난 것이다.(*벨 에포크에 대해서는 빌리 하스의 <세기말과 세기초>(까치글방, 1994)란 책이 오래전에 출간된 바 있다. 미술에서의 팜므파탈 이미지에 대해서는 이명옥의 <팜므파탈>(다빈지, 2003) 참조).

 

 

 


-국립현대미술관이 덕수궁미술관에서 열고 있는 ‘롭스와 뭉크’ 판화전의 키워드는 팜므 파탈이다. 19세기 벨기에 판화가 겸 풍자화가 펠리시엥 롭스(1833~1898)와, 그보다 서른 살 아래로 20세기 초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노르웨이 작가 에드바르트 뭉크(1863~1944)의 판화 98점을 선보이고 있다.

-두 작가 모두 미술사에서 중요한 인물인데도, 우리나라에 작품이 오기는 처음이다. 뭉크는 매우 유명한데도 그렇고, 롭스는 이름조차 낯설다. 롭스와 뭉크는 세기말 악마주의, 상징주의 그리고 표현주의에 이르는 미술사조의 흐름 속에 있다.

-롭스는 팜므 파탈의 이미지를 빌어 시대와 사회를 풍자했다. 여자, 어리석음, 그리고 죽음이 주도하는 세계를 표현했다. 치부를 드러내고 눈을 가린 채 돼지(성욕의 상징)의 인도를 받으며 위협적일 만큼 당당하게 걸어가는 창녀(‘창부정치가’)나 칼을 숨긴 채 높이 쳐든 손바닥에 남자를 올려놓고 조롱하는 여자(‘꼭두각시를 든 부인’)는 세계를 지배하는 팜므 파탈의 파괴력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는 사탄이 지배하는 악마적 세계,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 유혹, 파멸을 부르는 어리석음을 팜므 파탈과 연결짓고 있다. “여성의 냉혹한 눈짓, 숨기지도 위장하지도 않고 온몸으로 명백하게 드러내는 남성에 대한 적개심 등 롭스는 현대여성의 잔인한 측면을 묘사하는 데 정말 뛰어나다.”(롭스와 교유했던 프랑스인 공쿠르 형제의 평)

-뭉크에게 여자는 사랑스러우면서도 두려운 존재였다. 그의 대표작 ‘마돈나'는 여인의 멍한 눈과 소용돌이치듯 불안하게 흘러내리는 선으로 쾌락의 절정, 곧 죽음을 암시하면서 웅크린 태아와 정충으로 테두리를 장식해 염세적인 공포를 배가하고 있다. 또 다른 작품 ‘흡혈귀’는 고개를 숙인 채 남자의 목에 입술을 갖다 대는 여자의 모습이 마치 피를 빠는 듯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피해망상에 가까운 이런 두려움은 병약하고 신경질적이었던 뭉크의 기질 탓이기도 하지만 시대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뭉크 자신은 20, 30대 청년시절을 회고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여성 해방의 한복판에서 무상한 시대를 살았다. 남성을 유혹하고, 사로잡고, 기만한 것은 여성이었다. 카르멘의 시대. 이 무상한 시대에 남성은 더 연약한 성(性)이 되었다.”

 

 

 



-뭉크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이의 잇따른 죽음과 아버지의 우울증 때문에 평생 죽음의 공포와 불안에 시달렸다. 쾌활하고 방자하게 사회 풍자 놀음을 즐긴 롭스와 달리 뭉크는 철저히 자신의 내면으로 파고 들어 인간 실존의 어둠과 고독을 표현했다.

이번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과 벨기에 트랜스페트롤 재단이 공동으로 기획했으며, 브뤼셀-서울-오슬로 순회전이다. 전시는 10월 22일까지. (02)2022-0600(오미환 기자)

 

국민일보(06. 08. 14) 19세기말 여성 이미지 들춰보기

-팜므파탈, 그 치명적인 이미지가 난무하던 19세기 말 유럽은 새로운 여성상과 남성상이 극렬하게 대립했다. 이 시기에 유럽에서 활동했던 벨기에의 판화가이자 풍자화가였던 롭스(Felicien Rops,1833∼1898)와 효현주의 대표작가 뭉크(Edvard Munch,1863∼1944)는 정치적,사회적 해방을 요구하는 여성에 대한 경계심을 작품에 반영했다.

-국립현대미술관(관장 김윤수)은 이들의 판화작품을 모은 ‘롭스와 뭉크:남자와 여자’ 전을 지난 11일 개막했다. 한국에는 처음 소개되는 두 작가의 작품은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르다. 롭스가 사회를 풍자하면서 시대를 자신의 삶으로 끌어들인 작가라면,뭉크는 자신의 감성을 철저히 파고들어 객관화시킨 작가이다. 롭스의 작품들은 ‘풍자의 손’으로 관람객의 눈길을 잡아 당기지만 뭉크의 작품은 시간이 멈춰버린 듯 정적이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작가는 세대를 이은 상징주의적 표현과 ‘팜므 파탈’이라는 여성관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단 롭스는 세기말 사회에 대한 영향으로,뭉크는 개인적인 경험으로 형성된 여성관이란 차이점이 있다.

-롭스의 어린시절이야기는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다. 가정교사를 두고 교육을 받은 덕에 자유로운 유년기를 보냈고 브뤼셀에 들어가 학교 수업보다는 주간지의 삽화가로 시간을 많이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보들레르의 대표시집 ‘악의 꽃’에 삽화를 그렸던 그는 ‘악마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팜므 파탈의 이미지를 통해 사회를 풍자하고 해악함으로써 시대정신에 입각한 새로운 작품들을 생산해냈다. 대표작 ‘창부정치가’는 벌거벗은 창녀가 눈을 가린 채 돼지의 인도를 받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가릴 곳은 가리지 않고,반대로 드러낼 곳은 모두 가린 묘사로 여인의 누드를 강조해 사악함을 드러낸다. ‘꼭두각시를 든 부인’은 칼을 숨긴 채 꼭두각시를 치켜들고 있는 여자를 묘사해 여자는 남자를 파멸시키는데 그치지않고 사회 전체를 위협하는 악마적인 존재로 그렸다. 이번에 그의 61점의 작품이 전시됐다.



-노르웨이 출신의 화가로서 국내에 많이 알려진 뭉크는 불행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의 우울한 성격,다섯 살 때 겪은 어머니의 죽음, 병약한 자신의 건강,두 살 위의 누나의 죽음 등으로 죽음의 공포와 불안은 평생 동안 그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이런 병적인 상태는 오히려 수많은 걸작을 생산해내는 밑바탕이 되었다.

-대표작 ‘마돈나’는 역동적인 곡선과 함께 여자의 황홀한 표정이 잘 드러난다. 뭉크에게 마돈나는 사랑의 상징이자 죽음에 이르게 하는 팜므 파탈의 여성으로 대변된다. 뭉크는 유화에서부터 판화에 이르기까지 사랑,불안,죽음에 이르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예술작품으로 승화해 표현주의라는 거대한 시대의 물결을 이끌었다.



-이번 전시에 그 유명한 ‘절규’는 오지 못했지만 ‘마돈나’와 어린시절 죽은 누나의 옆모습을 그린 ‘병든아이’,10대 소녀의 공포감을 나타낸 ‘사춘기’ 등 주요작품 37점이 전시됐다. 한편 ‘롭스와 뭉크:남자와 여자’ 전은 벨기에 크랜스페트롤 재단이 14개 소장처의 작품을 모아 기획한 전시로 10월 22일까지 계속된다.(이지현 기자)

06. 08. 1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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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번역에 관한 철학적 성찰에 대하여

제시카 알바 주연의 영화 <슬리핑 딕셔너리>(2002)의 배경은 1930년대 영국의 식민지 말레이시아의 사라와크 섬이다. 아버지의 유업인 원주민 계몽사업을 위해 영국군 청년장교 존이 섬에 오게 되는데, 총독은 그에게 원주민 최고의 미인인 셀리마(알바)를 ‘슬리핑 딕셔너리’로 붙여준다.

‘슬리핑 딕셔너리’란 주인과 잠자리를 함께 하며 원주민 언어를 가르치는 여자를 가리키는데, 존은 자신의 신념에 어긋난다면 거부하지만 곧 셀리마의 아름다움에 매혹되며 둘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영국과 원주민 양편에서 환영받지 못하며 법적으로도 금지돼 있다. 이들의 사랑은 과연 해피엔딩이 될 수 있을까? 

 

 

 

 

번역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 폴 리쾨르의 <번역론>(철학과현실사, 2006)과 함께 ‘포스트식민주의 이론 해설’이란 부제를 갖고 있는 더글러스 로빈슨의 <번역과 제국>(동문선, 2002)를 읽다가 문득 떠올리게 된 생각은 텍스트간(더 나아가 ‘문화간’) 번역의 중재자로서의 번역자(혹은 통역자)의 위치와 운명이라는 게 바로 ‘슬리핑 딕셔너리’의 그것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비교불가능한 것을 비교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등가성의 창출을 주된 임무로 하면서 동시에 잠자리도 제공해주는 하녀! 

그러한 생각이 연이어 떠올리게 한 건 번역의 ‘일반론’을 제시하고 있는 리쾨르의 <번역론>이 지닌 ‘특수성’이다. 그의 지적대로 ‘이국적인 것의 시련’과 ‘비교불가능한 것의 충격’이 번역의 대전제이지만, 리쾨르는 언어 내적 번역을 외적 번역 못지않은 의의를 갖고 있는 것으로 격상시킴으로써 그러한 시련/충격을 흡수해버린다: “(내적 번역에서처럼) 이렇게 같은 것을 다른 말로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외국어를 번역하는 번역자가 하는 일이다.”(121쪽) 이로써 “(언어) 내적 번역과 언어 외적 번역 간의 가교가 이루어진다”고 리쾨르는 주장하지만, 포스트식민주의의 맥락에서도 그러할까?


로빈슨이 간결하게 정의한바 “포스트식민주의는 지리적/언어적 전치와 지배와 복종으로 서로 얽혀 있는 동력에 의해 야기된 심리/사회적 변형들인 통문화적 권력을 바라보는 방식이다.”(29쪽) 하면, 문제는 단순하게 ‘같은 것을 다른 말로 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않을까? 가령, “어떻게 멕시코의 스페인어로 씌어진 텍스트를 미국 영어로 다시 써서, 가난한 제3세계 국가의 구성원에게 지니는 의미를 지구상의 가장 부유한 나라의 구성원에게 같은 의미로 전달할 수 있는가?”(47쪽)


또한 “우리에게 빵을 달라!”라는 시위대에게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는 마리 앙트와네트의 고전적인 사례는 번역의 문제가 언어 내적 번역에서도 단순하지 않음을 시사해준다. 번역이 다루는 것은 단순히 문화적 관계뿐만이 아니라 지배/복종의 관계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국제관계가 국가들간의 (이념적으로) 동등한 관계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불평등한 관계인 것과 마찬가지이다(FTA를 놓고 벌어지는 논란도 다 그런 이유 때문 아닌가?).

 

세계는 평평한 듯 보이지만, 거기엔 굴곡이 있고 보이지 않는 곡률이 작용한다. 그리고 그걸 평평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힘은 균등하게 분배돼 있지 않다. 그렇다면, 텍스트번역에서건 문화번역에서건 번역은 불가능한가? 그건 아니다. 리쾨르에 따르면, “번역은 이론적으로는 설명 불가능하나 실제로는 수행 가능한 작업”(100쪽)이다.


다만, “번역 작업은 이국적인 것에 대한 공포와 증오로 발생하는 내적 저항을 물리치고 이루어진 회상의 작업”이면서도 동시에 “완벽한 번역이라는 이상 자체를 포기한다는 의미에서 애도의 작업”(118쪽)이라는 것을 승인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때 번역은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이며, “이국성을 가진 이방인과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독자”(117쪽)가 그 두 주인이다. 번역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독자를 저자에게 데리고 가는 이국화/외국화(foreignizing)와 저자를 독자에게 데려가는 자국화(domesticating)가 번역의 두 가지 양태이다.


포스트식민주의 번역론에 따르면, 이때의 저자와 독자는 추상적인 무국적자가 아니다. “문화의 번역불가(능)성은 가장 첨예한 문제이지만 동시에 경계 지역에서는 실제 해결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즉 그 국경의 양측에 걸쳐 있는 ‘멕시코인들’(그리고 몇몇 ‘북미인들’까지도)은 두 개의 언어를 동시에 구사하고, 그 다양한 구성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그들의 경험을 양쪽 언어로 번역한다.”(47쪽) 역설적이지만, 이렇듯 “이론적으로는 어렵고 고된, 그러나 실무적으로는 쉽고 순조로운”(리쾨르, 100쪽) 것이 번역 작업인 것이다. 더 나아가 번역은 우리의 일상이기까지 하다.

 


번역의 신화적 기원으로서 흔히 ‘바벨 이후’를 거론하지만, 동시에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그 역사적 기원으로서의 ‘바빌론 유수 이후’이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탑을 쌓으려다가 하느님께 징벌을 받아서 각기 다른 말들을 하게 됐다는 것이 ‘바벨 이후’가 뜻하는 바라면, 바빌로니아가 유대왕국을 정복한 뒤 유대인들을 강제로 데려가 바빌로니아에 억류시킴으로써 언어가 다른 이민족 사이에서 생존하기 위해 다른 말들을 배우게 됐다는 것이 ‘바빌론 유수 이후’가 의미하는 바이다. 이것은 곧 ‘디아스포라’(이산)의 기원이기도 하다.

 


번역의 역사적 기원이 암시해주는 것은 최초의 번역적 상황이라는 것이 항상 제국의 정복/점령과 그로 인한 권력의 분화, 그리고 이산의 문제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로빈슨이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제국의 정복자들은 새로운 신민들과 의사소통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을 발견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종속시키는 새로운 방법을 계발하여 순응적이거나 ‘협력하는’ 신민으로 변모시켜야 했다. 제국으로서 번역의 역사에 대한 초기의 관심 영역 중 하나는, 식민주의자와 피식민지인 사이를 매개할 수 있는 통역가들의 선발과 훈련이었다.”(22쪽) 이것이 바로 ‘슬리핑 딕셔너리’의 탄생 배경이 아닌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보다 확장해서 말하자면, “전체 포스트식민 세계가 번역의 장으로 계속해서 간주되어야만 한다. 이 맥락에서 번역은 하나 이상의 국가 혹은 지역 문화와 관련된 문화적/언어적 재능을 지닌 소수의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들이 수행하는 언어 텍스트의 의미상 전달은 더 이상 아니다. 그것은 일상적 의사소통의 기초이다. 이렇게 번역은 처음으로 번역을 형성해준 식민 권력의 분화에 계속해서 참여하는 것이다.”(49쪽) 물론 이러한 참여가 일방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게 중요하다.


번역에 대한 포스트식민주의적 관점을 요약하자면, (ⅰ)번역은 식민화의 채널로서 교육에 필적하며, 교육과 연관되고, 제도와 시장의 명백한 혹은 숨어 있는 통제를 받는다, (ⅱ)번역은 식민주의의 붕괴 이후 계속된 문화적 불평등을 위한 피뢰침이다, (ⅲ)번역은 탈식민화의 채널이다(51쪽)가 된다. 여기서 핵심은 번역이 식민화의 채널이면서 동시에 탈식민화의 채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리쾨르가 시도하고 있는 ‘번역에 관한 철학적 성찰’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번역과 번역행위에 대한 이러한 인류학적 성찰, 정치적 성찰이다.

 


<슬리핑 딕셔너리>에서 존과 셀리마의 사랑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며 영국군과 원주민은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에서 존은 자신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 셀리마와 재회하게 되며 둘은 서로의 사랑을 다시 확인한다. 이 정념론적인 차원의 확인은 번역의 관점에서 윤리적인 차원으로까지 승화된다. 리쾨르가 제안하는바, “두 주인을 섬기려다가 두주인을 모두 배신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독자를 저자에게 데려가는 것, 혹은 저자를 독자에게 데려가는 것은 결국 언어적 환대를 실행하는 것”(119쪽)이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속에서 셀리마는 존(영국)과 자기 부족이라는 두 주인을 섬기려다가 두 주인 모두를 배신하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 아닌가? 무엇 때문에? ‘(언어적)환대’의 요청 때문에. 그러한 환대의 공간은 지리적으론 접경지대이며, 사회적으론 교통공간이고, 문화적으론 혼합공간이며 인종적으론 혼혈공간이다(셀리마는 혼혈이다). “이국의 언어를 모국어라는 자신의 집에 맞아들임으로써 타자의 언어를 체험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리쾨르, 89쪽)으로서의 번역은 그러한 공간을 확장시키고자 하는 ‘행복한 도전’이다. 더불어, 그것은 디아스포라의 공간에 처한 이주민들이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필사적인 모험이기도 하다.    

 

 

 

 

 

하면, “우리가 읽는 책의 태반은 번역서이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우리의 번역문화는 척박하기 그지없다. 예나 지금이나 오역과 비문으로 가득한 번역서들은 독자들에게 좌절과 환멸을 수시로 안겨주고 있으며, 동서양의 주요 고전들 중 상당수는 아예 번역․소개조차 안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박상익, <번역은 반역인가>)라는 지적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만 뼈아프다. 번역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행복을 위해서도, 생존을 위해서도 너무 안이한 것 아닌가?..

 

06. 08. 27.

 

P.S. 이 글은 북매거진 <텍스트>에 기고한 것이다. 본래는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생각의나무, 2006)에 대한 서평을 기획했었지만, 너무 '뻔한' 얘기들만 늘어놓게 되어 8매 정도를 쓰다가 접었다. 그리고는 결들여서 쓰고자 했던 리쾨르의 <번역론>과 로빈슨의 <번역과 제국>을 중심으로 구도를 다시 짰다. 로빈슨의 책은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긴 하지만, 정독할 만한 성격의 책은 아니다.

 

리쾨르의 <번역론>은 읽어볼 만하지만, 특별히 새로운 이야기를 던져주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국역본의 편제는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단순한 본문에 비하면 너무 장황하다싶은 해제 '논문'이 책의 성격을 딱딱하게 만들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사실 본문의 각주들도 미주로 돌리는 게 가독성을 위해서는 더 좋았을 것이다) 교정상의 실수들도 적지 않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85쪽의 역주18)에서 낭시의 책은 <경계의 미학>이 아니라 <숭고에 대하여>(문학과지성사, 2005)이며, 128쪽 역주23)에서 첼란의 시집 <죽음의 푸가>는 문학과지성사가 아니라 청하출판사에서 나왔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건 전영애 교수의 첼란 연구서(학위논문)인 <어두운 시대와 고통의 언어>이다. 그리고 앙리 메쇼닉에 대한 각주는 같은 내용이 해제(53쪽)와 본문(154쪽)에서 반복되고 있다. 85쪽 역주19)에서 "도야는 독일 신인본주의에서는 인간에게 주어진 고유한 사명으로 주어진 것으로 이해되는데..."라는 건 교정이 안된 문장이다. 117쪽에서 "이국성을 가진 있는 이방인과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독자가..."도 마찬가지이다. 71쪽 역주3)에서는 벤야민의 논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 <기술시대의 예술작품>으로 오기됐다. 그리고, 62쪽에서 '각주(各主)'의 한자는 엉뚱하다. '각주(脚註)' 아닌가?

 

여하튼 이런 실수들이 공들인 번역에도 불구하고 책이 조급하게 만들어졌다는 인상을 준다. 분량에 비하면 저렴한 책도 아닌데, 좀더 세심하게 마무리되지 않은 건 유감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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