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민주적일까?
책에서 극우의 대척점에 있으면서 바람직한 방향성으로 제시되는 것은 민주주의다. 극우가 혐오와 배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면 민주주의의 가치는 관용일 것이다. 그리고 그 관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올바른 이해와 공감이다. 대상을 바르게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이 곧 민주주의 생활양식이며, ‘민주주의의 뿌리이자 평범한 악을 막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고 작가는 역설한다. 그리고 덧붙여서 이 생각하는 힘은 끝없는 대화와 토론을 통해 길러질 수 있다고 조언한다.
최근 나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돌아보면 나의 판단이 객관적이고 옳다 믿으며 대화와 토론의 과정을 건너 뛰어 난처한 입장에 처하곤 했다. 난처한 상황에서도 위법성이 없다거나 주어진 권한을 행사한다는 논리로 스스로의 판단을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만약 그 상대방과 대화와 토론의 과정을 거쳤다면 위법성이나 권한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무리 없이 그 일들이 처리되었을 것이다. 나의 마음 속에 그 대화와 토론이 무의미하고 어쩌면 원활한 일 처리를 방해하는 지난한 과정이라는 인식이 있는 것이고, 이것이 곧 배제이자 극우적 생활 양식일 것이다.
자녀를 양육하면서도 때때로 내가 정답이라 믿는 사고와 태도를 강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대화와 토론으로 가르칠 수 없다고 생각하였지만, 자녀가 어리면 어릴수록 대화와 토론을 통한 방향 제시는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당장에 내가 편하자고 나의 생각을 자녀에게 일방적으로 주입하고 그대로 따르게 한다면 자녀는 자라면서 나보다 더 매력적인 세이렌의 목소리에 너무도 쉽게 아무런 사고의 과정도 없이 빠져버릴 것이다.
민주주의적 대화는 많은 연습을 필요로 한다. 아이와의 끝없는 대화와 토론은 가끔 피곤한 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시간은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이자 나의 아이를 바르게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이다. 내 옆에 늘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잊는 것처럼 매일의 일상에서 아이와 주고 받는 대화의 시간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 시간들이 너무도 그립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문답의 시간과 기회가 있을 때 한 번이라도 더 묻고 더 들어야 했다.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많은 질문들을 준비해보려 한다. 질문을 준비하는 시간도 아들과 대화하는 시간이라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