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보트 태권 V가 돌아왔습니다.
지난 주에 영화관에 있는 팜플렛 꽂이에서 로보트 태권 V 가면을 보는 순간 어릴 적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어릴 적에 보았던 만화 영화를 내 아이들과 함께 볼 수 있다는 것도 기뻤지만 늘 가슴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어릴 적 추억이 생각나니 기분이 좋더라구요.

로보트 태권 V 3탄이 세종문화회관에서 상영되던 날, 여름방학을 맞아 저는 고모집에 가 있었습니다. 고모네 집에는 대학생 사촌 언니, 고등학생 사촌 오빠, 중학생 사촌 언니가 있었는데 중학생이던 사촌 언니와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제가 함께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그 당시 세종문화회관 앞에는 차선을 넓히는 도로가 한창이었을 때라 가뜩이나 차가 많이 다녀 정신이 없는 광화문에서 언니와 저는 지하도 입구를 제대로 찾지 못해 계속 헤매고 있었습니다. 아마 보초를 서는 미어캣 같았을 겁니다.

세종문화회관이 눈 앞에 있는데도 세종문화회관 앞에 도착을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다보니 언니는 제 손을 잡고 제 눈을 들여다보며,
"너, 내가 경찰관 아저씨한테 길 물어볼껀데 너 절대 성내동에 산다고 말하지 말아라. 알았지? 우리 집이 용두동이라는 것도 말하지 말고. 알았지? 너 성내동 산다고 하면 무시하니까 말하지 마 알았지?"라고 말하며 몇 번씩 다짐을 받더군요.

저는 언니가 저를 버리고 갈까봐 고개를 끄덕였지요.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광화문 한 복판에 서 있던 교통 경찰관 아저씨는 길을 가르쳐주더니 언니가 미리 당부했던 것들을 제게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너 몇 학년이니? 어디 사니? 니네 언니니? 고모 딸이면 고모는 어디 사니? 등등" ^^;;

저는 하늘같은 경찰관 아저씨가 물어보는 대로 나불나불 대답을 했고, 언니는 옆에 서서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지더니 결국 저를 꼬집더라구요.

언니랑 둘이 나란히 걸어간게 아니라 언니 손에 질질 끌려 도착한 극장에서 로보트 태권 V 3탄을 보았습니다. 어찌나 재미있던지...

그러나 속으로는 언니 눈치만 보았습니다. 고모네 집으로 가면 작은 언니가 고모랑 큰 언니한테 분명히 이를 텐데 이 일을 어쩔까 싶기도하고 그냥 세종문화회관에서 성내동 우리 집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만 굴뚝같았지요.

고모네 집으로 돌아와서 언니가 제 푼수짓을 이르기는 했지만 뭐, 고모는 당연히 니가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이시더군요.

며칠 후 집으로 돌아와서 동네 아이들에게 제가 무엇을 자랑했을까요?
로버트 태권 V 영화를 본 증거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동네 아이들에게 척 내민 증거품은 바로 '로버트 태권 V 주제가가 씌여진 악보 한 장" 이었습니다. 영화관에서 기념품으로 그거 하나 달랑 주더라구요.
동네 오빠들이 그 종이를 가져가서 종이가 반으로 찢어지자 저는 할머니께 이르고 울고 불고 난리가 났었답니다.

요즘 아이들은 호기심에 플라스틱으로 된 로버트 태권 V 가면을 보고도 별 반응을 안 보이지만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만화 영화를 극장에서 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활된 로버트 태권 V 덕분에 한동안 연락을 안 했던 사촌 언니 생각도 하고, 동네 친구들 생각도 하고, 뜨거운 여름 날 광화문 사거리에 서있던 경찰관 아저씨도 생각나네요.

참, 로버트 태권 V의 주제가를 불렀던 초등학생이 나중에 어른이 되어 '세월이 가면'을 부른 최호섭이라는 소식 들으셨어요?

당시 소년 훈이의 목소리를 맡았던 성우가 '올드 미스 다이어리'에서 첫째 할머니로 나온 김영옥 씨라는 것도 아셨나요?

혹시 내년에는 마징가 Z나 마루치 아라치가 부활해서 오는 것은 아닐지 기대해 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