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
천운영 지음 / 창비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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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스타일을 창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예술가에게 있어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처럼 절실한 얘기는 없을 것이다. 단편소설집 한 권을 낸 작가치고 이정도의 스타일을 만들어낸 작가는 드물 것 같다. 자신만의 주제와 문체, 인물의 성격까지 자신만에 틀에서 뽑아낸 것처럼 매끈하다. 그 때문에 천운영의 소설에 신뢰가 가기도 하고, 반면에 신인작가로써는 너무나 명확한 자신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바늘'이라는 작품에서 천운영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선 그녀는 소설을 쓰는 방법을 아는 작가다. 재미있는 소재를 고를 줄 안다는 점에서 말이다. 여성 문신사라는 독특한 소재, 또한 일상적이지 않은 인물 성격, 상세한 세부지식 등을 통해 독자들에게 소설을 읽는 맛을 준다. 요즘의 소설과는 접근방법 자체가 다르다. 현대인들의 일상들을 거울처럼 들여다보게 하면서 낯설게 하는 접근 방식이 아니라, 소설의 구성 하나하나가 독자들의 정신을 뱀처럼 휘어잡아 끌어들이는 것이다.

시적인 문장을 구사한다는 점에서도 소설 한 줄 한줄에 얼마나 많은 땀냄새가 배어있는지 느껴진다. 천운영의 소설을 읽다가 문득 허수경의 초기 시집이 생각났다. 약간 다르긴 하지만 천둥벌거숭이처럼 가꾸어지지 않은 감수성을 이리 저리 펼쳐놓았지만, 소박하고 건강한 들꽃처럼 풀냄새가 났던 시집....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천운영'의 소설에는 더욱 계산적이며 프로다운 느낌이 숨어 있다는 점이다. 어떤 부분에서 감동을 줄 것이며, 이 대사에서 이런 느낌을 주겠다는 철저한 계산 속에서 소설이 쓰여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분명, 이 작가는 손 끝에서 피가 맺히도록 정열을 다해 썼겠다는 생각, 또한 이런 식으로 소설을 계속 쓰다보면 제 생명력까지 갉아먹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 친구 하나는 자기 가슴 속에 새파랗게 갈아 놓은 칼날을 품는다고 했다. 자신을 공격하는 이들의 약점을, 또는 그에 대항할만한 꺼리들을 가슴에 칼처럼 품으면서 절대 드러내지 않는 것. 그건 하나의 자기만족일 수도 있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약자들이 가지는 마지막 수단일지도 모른다. 한번의 독침과 자신의 생명을 맞바꾸는 벌들처럼 말이다.

천운영의 인물에선 그런 절박함들이 엿보인다. 바늘의 주인공은 세상에 대항할만한 무기로 자신의 바늘을 가졌다. 문신을 새기려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 문신으로 타인들에게 강하게 보이려고 하는 내면의 연약함을 지니고 있다. 개인 속의 약함이란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감정이겠지만, 그 속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절박한 심정은 강한 외모와는 정반대의 심리가 아닐까? 문신을 새기는 직업 속에서 전능한 위치를 차지한 여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것이 매우 매혹적인 작업임은 분명하다.

안타까운 점 중에 하나는 소설이 전체적으로 비슷한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그로테스크하면서도 기괴하고 결핍된 인간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인데, 천운영이 바라보는 인간상이 그러한 것이라면 왠지 씁쓸하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스타일이긴 하지만, 너무나 국지적인 형태로 사회를 바라보는 형식이기 때문에 작가의 성장을 위해서는 좀더 크게 볼 필요가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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