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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검 1
김혜린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1999년 11월
평점 :
절판
너무 어둡게 마음이 가라앉을 때, 나는 김혜린님의 만화를 본다. 김혜린님의 만화는 주체적인 여성이 드러나 있어서 좋다. 희생적이지만, 남자에게 강요당하는 종속적인 모습이 아니라, 끝없이 삶을 지키고 투쟁해나가는 여주인공이 나타나서 좋다. 특히 불의 검에서 아라는 그런 여성성의 전형을 보여준다. 비천무에서는 미미하게 드러났던 부분들이 점차 그림에 내용에 육화되어 나타난다.
가끔 불의 검이 완결되지 않는 것이, 작가의 부담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이 작품은 완결되기도 전에 너무나 큰 명성을 얻어...작가에게는 참...고민스러운 작품이겠구나라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불의 검'은 우리 만화사에 남을 작품임에는 틀림 없다. 스케일적인 면에서나, 내용, 그림, 인물 설정 등...어느 하나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수작이니 말이다. 부족 국가 시절의 삶의 모습들, 그리고 철기가 도입되는 과정, 전쟁의 역사, 계급화, 신과 인간이 교감하던 시대임을 알려주는 무녀...그리고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사랑의 감정을 숨겨야 하는 연인...
특히 사랑에 있어서 김혜린님의 인물 묘사는 대단하다는 말로밖에 표현하기 힘들다. 고귀한 사랑, 즉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사랑은...문학이나 시에서만 가능하지 않은가라는 내 생각을 완전히 뒤엎어 버렸기 때문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아라'는 처음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불의 검'을 만들지만, 점차 가면 갈수록 그 의지는 대의를 위한 것으로 바뀐다. 자신의 아이를 지키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것으로..그래서 더욱 포용력있고 설득력 있는 연인과 어머니의 모습을 합쳐서...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여성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있다. 물론 전에는 연인으로서, 어머니로서 고귀함을 획득한 캐릭터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런 큰 사랑이 그 둘을 넘어서 자식, 연인을 넘어서 민족에 대한 사랑, 적에 대한 사랑으로까지 승화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물론 전쟁에 대한 묘사도 마찬가지다. 싸움이 일어나 죽는 것은 평민들이지만, 그들의 지도자들은(아마도 진정한 지도자) 그 민족의 일원 하나하나를 자식처럼 여긴다. 부족국가라서 그런 면도 있겠지만, 아군이든 적군이든...그 표현 방식이 어떠하든...자기 백성들을 자기 자식처럼 아끼는 지도자들을 보며 어찌...비난할 수 있을까? 그때문에 더더욱 갈등은 첨예해질 수 밖에 없다. 자식 하나하나의 피를 밟고 전쟁을 하기 때문에, 갈등은 좁혀질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 만화는 김혜린님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얼마나 진보적인가, 또 얼마나 곧은가를 알 수 있게 만든다. 그것도 하나의 메세지로서가 아니라 육화된 캐릭터로서 충분히 알아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김혜린님을 좋아하는 만화가라기보다 존경하는 만화가라고 부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