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에게 창비시선 95
나희덕 지음 / 창비 / 199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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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말로 시를 안다는 것, 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나희덕 시인의 '뿌리에게'는 몇 년 전 그네를 알게 되었을 때보다 험난한 사회에 나선 지금, 더 아름답게 읽힌다. 대학 1학년 땐가 학생운동을 하던 한 선배가 나에게 '나희덕 시인'도 모르냐며 핀잔을 줬던 적이 있었다. 그 때 이 시집을 처음 접했다. 어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 경쾌하고 발랄한 시만을 선호하던 나는 이 시집을 읽고, '어 보통 여성시인이랑은 좀 다르네'라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 사회인으로서 이 시집을 읽고, 새삼 잔잔한 물결이 이는 듯한 감동을 받았다.

[뿌리에게]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먼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 눈부셔 잘 부스러지는 살이니/ 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 뻗어가려무나//

척추를 휘어접고 더 넓게 뻗으면/ 그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 너를 감싸고,/ 불꽃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네 뻗어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 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
- 생략

굳이 이 시인이 선생님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아도 이 시는 충분히 그 의미를 전해준다. 시인은 자신을 흙에 비유해, 인간이라는 존재가 또 다른 존재에게 하나의 토양이 되는 따뜻함을 선사한다. '불꽃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자신보다는 타인을 축복할 수 있는 넉넉함을 지닐 수 있다면 얼마나 충만한 삶일까? 시집 전체에서 나는 이 시인이 세상을 보는 곧은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들에서 떠났네]

우리는 들에서 떠났네 그래서 언덕 밑, 다리와 성벽 그늘에 이부자리를 폈네 토굴 속 어둠을 밝히어놓은 등잔, 그 흔들리는 불빛 아래 쪼그리고 앉아 숙제하고 있는 아이들의 눈빛, 아이들은 뿌리내리지 못한 사람들의 마지막 뿌리라네//저녁이면 붉은 눈망울로 우리 거기 모이나니 우리의 등뒤로 저녁노을에 젖은 구름떼가 흘러가네 우리가 치고 있는 가난의 양떼는 누구의 것일까 때가 낀 얼굴과 손들, 젖은 양떼의 냄새, 우리는 들에서 떠나와 또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 것일까? -생략

이 시에서는 그 뿌리의 존재가 더 정확하게 드러난다. 시인의 교사생활을 통해 느낀 감정들을 '아이들은 뿌리내리지 못한 사람들의 마지막 뿌리라네'라는 구절에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 표현할 필요도 없다. 그저 시란 제 각각의 느낌을 읽으면 그뿐이니 말이다.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은 평론가로도 족하지 않은가? 나는 위의 시를 읽으면 곤궁한 내 삶이 자연스레 떠올려진다. 경제적으로 곤궁하다기 보다 정신적으로 곤궁한... 어디 단단히 뿌리내리지 못하는 삶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아이들은 어른의 거울이다. 또는 어른이라는 거대한 존재가 되어도 '유년'이라는 공간은 환상과 행복의 공간이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요즘 어른들이 어디 그런가. 그저 공부하기에, 또는 먹고살기에 바쁜 삶이다. 나에게 나희덕 시인도 모르냐며 핀잔을 주었던 선배는 이 시편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시란 아이의 눈으로 읽어야 더 아름다운 법이다. 먼지 묵은 케케하고 고리타분한 생각으로 시를 읽을 때, 삶은 더 고달파진다. 아무리 고달플 때라도 파랗게 갠 하늘을 보며 기뻐할 줄 아는 인간이 되려면, 좀더 깊고 아름다운 눈을 가져야 한다. 나희덕 시인처럼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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