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문학과지성 시인선 216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통통 튀는 언어…황인숙시인의 시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퍼득거리는 날것처럼 힘차게 움직이는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아, 날것이여.
날 것, 날것, 날것들이여.
나를 두들겨, 깨뜨려,
내 안의 날것을, 아직 그런 것이 있다면,
깨어다오.
이 허위인 삶을
쪼고, 쪼고, 물어 뜯어다오.

요즘 서울은 장마철 폭우가 한참이다. 몇몇 가구는 침수도 되고 산사태도 났다 하지만, 나에게 장마란 슬레이트 지붕을 힘차게 두드리는 막대 같은 빗줄기다. 힘차게 드럼을 두들기듯, 축 늘어진 정신을 두들겨 패듯, 쾅쾅거리는 빗소리는 나를 즐겁게 만든다. 황인숙의 시도 나를 이렇게 화끈하게 통통 튀게 만든다. ‘구름을 터뜨리고 햇빛이 과즙처럼 튄다’라고 신나게 말할 수 있는 시인과 함께 허무한 먼지로 뒤덮인 세상을 팡팡 두드리는 기분은 정말 최고다.

하지만 마냥 신나게 소리 지른다고 해서 뿌리 깊은 허무가 사라지지는 않는 것처럼, 시인의 어조가 아무리 신나고 화려하다고 해서 즐거운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해설에서 나오는 것처럼 시인의 다른 시집보다는 훨씬 무거운 분위기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시집의 첫 장에 나오는 [영혼에 대하여]라는 시를 살펴보자.

영혼이라는 게 몸 안에서
불덩이처럼 굴러다니고 있다고 생각하면
멀미가 난다.
속이 울렁거려.
토할 것 같아. 영혼이든 뭐든.

나는 영혼이
나뭇가지를 샅샅이 훑고 다니는
바람이라면 좋겠다.

시인은 바람 같은 영혼을 꿈꾼다. 하지만 삶이라는 것은 구체적인 생활이다. ‘인생이란! 고단하지 않으면/ 구차한 것.’이라고 단언하는 시인의 말처럼...바퀴살처럼 빠르게 굴러가는 생활 속에서는 깨어 있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다짐하는 것조차 힘든 일이다. 그러나 황인숙시인의 시는 삶에 대한 회의나 불만으로 가득 찬 것은 아니다. ‘얼음과 먼지’로 되어 있는 인간에게서 ‘보드랍고 말랑한/발갛고 따끈한 그런 기운’, 즉 생명의 힘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인숙 시인의 시집을 읽을 때면 늘 기대가 된다. 먼지같이 부유하는 뿌연 삶을 얼음처럼 차갑게 고정시켜 놓은...그의 언어들이 내 삶에 통통 튀는 상쾌함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