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창비시선 156
함민복 지음 / 창비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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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에 대학에 들어와서 이슈가 되고 있는 이 시집의 이야기를 들었다. 누구나 한번쯤 입에 올리는 책이라 어쩐지 의무감에서라도 읽어야 할 듯한 느낌이었다. 학교 내에 자주 가던 서점에 가서 한참동안 서서 이 시집을 뒤적였다. 시집 전체의 분위기는 결코 단순한 서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함민복의 이미지가 눈가의 촉촉한 물기같은 서정성으로 다가온 이유는 '선천성 그리움'이라는 시 때문이다.

선천성 그리움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천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여

내리치는 번개여

흔한 연애시와는 격이 다른 순수시이다. 표면적인 주제는 사랑이라고 볼 수 있고, 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시이지만, 이 시를 한꺼풀 벗겨보면, 끝끝내 서로에게 가닿을 수 없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거리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또 즐겨 노래한 것은 어머니라는 소재다. 어쩌면 이만큼 흔한 소재도 없다 싶지만, 옷고름마다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게 하는 언어적 솜씨는 정말 일품이다. 어머니를 소재로 한 시중에 [눈물은 왜]라는 시를 가장 좋아하는데, 이 시는 시라고 하기 보다는 짧은 에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정도로 산문에 가깝다. 어머니와 설렁탕을 먹는데...주름살이 패인 어머니가 소금을 많이 넣어 짜다고 주인에게 다시 받은 설렁탕 국물을, 다 큰 자식의 투가리에 부어주는 모습을 정겹게 비춰주고 있다.

함민복의 시는 단순히 서정성만을 담보하고있지만은 않다. 두번째 시집인 '자본주의의 약속'에서 보여주는 사회비판적 측면을 떠올리게 하는 시 [아남 내셔널 텔레비젼]이나, [자본주의의 주련]을 보면 물기 넘치는 감수성에 젖어 있던 날 선 이성이 눈뜨게 된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좋은 건 시인의 삶에서 우러나온 목소리...끓이고 끓여서 나온 생의 진국이 느껴지는 시편들이다. [긍정적인 밥]같은 시에서는 자신의 시집이 한그릇 국밥만큼 사람들을 따뜻하게 만들어주기 바라는 시인의 소박한 모습이 나타난다. [달의 눈물]과 같은 시에서는 산동네에서 내려오는 하수도 물소리를 소재로 하여 자신을 더럽히면서도 누군가를 깨끗이 씻어내리는 그 소리에 가슴이 젖는 순수한 시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시집의 맨 마지막에 나오는 [꽃]의 첫 연은 제목으로 인용된 구절이다.(모든 경계엔 꽃이 핀다) 왜 이런 제목이 나올 수 밖에 없었는지 곰곰히 생각하게 만드는 의미있는 구절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에 가장 큰 경계란 무엇을 말할까? 시인이 말하고자하는 경계는 분단의 경계뿐만 아니라 안과 밖, 전생과 내생... 어쩌면 부자와 빈자의 경계까지 아우르는 것이다.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이 마지막 구절에서 시인이 간절히 원하는 바가 드러난다. 우리 민족의 눈물이 메마르는 날이 경계가 무너지는 날인 것이다. 함민복의 시세계는 참 여러 갈래인 듯 하면서도 하나를 지향하고 있다. 우리의 삶과 사고에 경계를 지우는 것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비판을 가하고 있으며, 그 경계를 벗도록 만들어 주는 것에 대해서는 한없이 무르고 연한 제 속살까지 내주는 것이다. 어머니의 모성이나 선천성 그리움까지 죄 남김없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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