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권의 유고 시집을 남긴...시인... 이 양장본 책의 앞쪽에는 시인의 흑백사진들과 그의 친필원고와 타자로 친 시들이 들어 있다. 타자로 친 자기의 시를 보고 이제야 시같다며 좋아했다던 시인...그 시인이 남긴 애틋한 자식인...시...내가 이 시집에서 좋아하는 시는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그래도 꼽아 본다면 세 편의 시가 있다. '엄마 생각'과 '대학시절', '위험한 가계'라는 시다. 이중에 '엄마생각'은 초등학교 책에 실렸는데...시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의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 타박타박 배춧잎같은 발자국 소리로 돌아오는 엄마...시장에서 하루종일 장사를 하고...지친 발자국으로 아이들에게 돌아오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하여...마음이 아프다. 우리 시대의 어머니의 모습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머리에 붉은 고무대야를 이고 장사를 했다는 젊은 시절의 내 어머니의 모습이...아슬아슬하게 겹쳐져....눈시울을 붉히게 만든다. '대학시절'이라는 시는...80년대 뜨거운 시대를 건조하고 쓸쓸하게 읊은 시다. 짧은 몇마디 구절안에...읽고 싶은 책을 읽지도 못할만큼 시대에 빚진 기분으로 살아가다가...결국 시대에 휩쓸려간 대학생들의 삶이 녹아들어 있다. '위험한 가계'는 정말 위험한 시다. 이렇게 아름다운 현대시를 본적이 없을 정도이다. 그 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 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쌓아둔 이불을 등을 기댄 채 큰 누이가 소리질렀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우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잠바하나 사주세요.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 겨울은 넘길 수 있을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거구.풍병(風病)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잖아요. 마늘을 까던 작은 누이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지만 어머니는 잠자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수건을 가만히 고쳐매셨다시의 일부분이긴 하지만, 이만큼으로도 시의 매력은 충분히 전달될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실감 있는 표현들과...어쩌면 일반적인 시라고 생각되지 않는 특별한 어조...새로운 시의 언어들을 통한 화법등... 기형도...'그'만이 쓸 수 있는 아름다운 글이다. 이 시중에 내가 좋아하는 구절은 위에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하늘에는 벌써 티밥같은 별이 떴다.'라고 하는 구절이다. 이 구절만 읽어도 하늘에 뜬 커다란 별들이 눈에 선하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이 이제 '기형도'를 알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선명한 이미지와 환상적인 어조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