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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테라피 - 심리학, 상처입은 마음을 어루만지다 정신과 전문의 최명기 원장의 테라피 시리즈 2
최명기 지음 / 좋은책만들기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최명기 선생님께

 

  선생님, 쓰신 책 잘 읽었습니다. 책 속 사연의 주인공들의 마음은 이제 다 치유가 되었나요? 완벽한 치유가 세상에 있나요, 아니면 그저 극복하며 생을 사는 건가요. 어쩐지 선생님께 제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어요.

 상처가 없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거예요. 가끔 저는 누군가를 생각 합니다. 발바닥의 굳은살이 욱신거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살짝 불편할 정도의 아픔. 딱 그 만큼의 아픔이 두껍게 배긴 옹이 안에 상처의 싹을 틔워 가끔 저의 마음까지 뿌리 내리려 하고 있어요. 두껍게 내린 딱지 덕분에 오래 전부터 잊고 있었던 상처의 씨가 마음 밑바닥에 뿌리내려 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자라 어린왕자에 나오는 바오밥 나무처럼 마음의 행성을 부숴버리려 하겠죠. 하지만 이제는 먼 과거의 일. 눈물이 마르지 않아 항상 얼룩져 있던 노란색 베갯잇, 햇빛을 보기 싫어 꽁꽁 닫았던 커튼 안 그 어두웠던 저의 방, 뭐라고 먼저 말을 걸어야 하나 고민하면서 계속해서 만지작거리던 모토로라 휴대폰. 선명한 기억은 저와는 상관없는 장면처럼 아무런 감정 없이 머릿속에서 영사되고 있습니다.

  그 때 저는 그가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어요. 옛날 동화에서 악당은 언제나 정의의 심판을 받았잖아요. 그래서 믿었어요. 언젠가는 그가 벌을 받겠지, 내가 아픈 만큼 하늘이 알아서 해주실 거야. 그렇게 생각해야만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어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어요. 신이 과연 있을까,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언제나 사랑받고 있는 그는 강자고 사랑하고 있는 나는 약자였죠. 멍하게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졌어요. 일을 하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아플 때도 누군가를 기다릴 때도 저는 그냥 아무 생각 안하려고 했죠. 생각이 고통스러웠던 적이 있어요? 어떤 생각이든 하는 것만으로 손끝에서부터 심장까지 저릿저릿해지고 가슴이 미어진다는 말이 이해되는, 그런 적. 머리끝까지 아픔이 가득차서 비명이 출렁거리는 거예요. 아차, 싶으면 쏟아져 나와 스스로를 무너뜨릴까봐 두려워요.

  그는 사람때문에 또는 사람때문에 삶을 포기하는 건 배가 불러서 그런 거라고 내게 말했어요. 마음의 굶주림이 얼마나 사람을 허기지게 만드는 지 그가 있어 알고 있는 저로서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어요. 침을 삼킬 때마다 또 다른 제가 저에게 속삭였어요. 어떻게 죽는 게 아프지 않을까. 죽는 방법은 많아요.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온 세계에 널려있는 그 방법을 저는 이미 알 테죠. 어쩌면 죽는 건 매우 쉬운 일일지도 몰라요. 사람이란 말랑거리는 순두부 같으니까요. 네이버에 자살 또는 자살방법이라고 검색하면 '당신 곁에 우리가 있어요.', 뭐 이런 캠페인 문구가 뜨면서 상담 번호가 주르륵 나와요. 문득 그곳에서 상담하는 사람들은 제정신일 수 있을까, 저는 궁금해졌어요. 저의 직업이 죽고 싶은 이유를 듣는 거라면 전 아마 미쳐버릴지도 몰라요. 상담원이니까 직업의식이 있다면 자살은 안 될 테죠. 그러니 결국 미쳐버리는 거죠. 미친다는 건 정신적인 죽음이 아닐까 싶어요. 선생님은 괜찮으세요? 타인의 불행이 선생님의 지금을 더 소중히 느끼게 해주나요? 어두운 가면을 쓴 감정이라는 괴물은 작은 틈도 비지고 들어와 사람을 지배하는 것 같아요. 마음에 금이 가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마음의 고통이 육신을 넘어서 스스로를 없애지 않고는 절망과 나락이 사라져 버리지 않을 거라고 믿어버리는 순간이 왔었죠. 그때, 선생님이 쓰신 글처럼 시간을 믿으려 노력했습니다. 끝나지 않을 지금이 언젠가는 끝날 날이 올 거라고 의심하면서도 믿으려 애를 썼어요. 그 믿음만이 기억날 뿐 만취한 다음날 기억이 새까맣게 지워진 거처럼 그 시간이 잘 떠오르지 않네요. 너무 오래된 이야기여서이거나 이제는 아무렇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비로소 그 고통에서 해방되었을 때 저는 조금은 성장해 있었어요. 선생님 말씀대로 시련은 사람을 성장하게 만드나 봐요. 상처를 받아본 사람만이 그 아픔을 이해하듯이 저는 제가 받았던 상처를 누군가에게 주지 않고 싶어요. 그리고 저 때문에 불면의 밤을 지새운 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이해”할 수 있다는 게 아닐까요. 혹자는 이성이 사람과 짐승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건 “이해”를 통해서 에요. 완벽한 이해는 세상에 없겠지만 진정한 마음의 “이해”는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처를 통한 성장이 없이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람은 짐승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해요. 누군가에게 상처받아 울고 있을 나와 같은 이에게 짐승 때문에 아파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떨어진 하나를 주우려 몸을 숙였더니 나머지 것들이 우두둑 떨어져 바닥에 뒹굴 때 가끔 망연자실해져요. 기억이라는 건 그런 것 같아요. 어떤 영화처럼 기억을 지우는 장치가 있길 바랐던 적도 있어요. 이터널 선샤인이라는 영화를 보신 적 있나요? 기억을 지운 남녀는 서로에게 주었던 상처까지 지운 채 다시 만나서 사랑을 시작하죠. 그리고 영화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또 다시 같은 일로 서로에게 상처를 줄 거에요. 그 영화를 볼 때는 기억이 지워도 마음이 기억하는 사랑이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하지만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과오를 반복하고 싶지는 않아요. 이제는 제 상처가 자랑스러워요. 기억하고 싶어요. 쓰라렸던 감정은 잊어버리고 상처가 내게 주었던 교훈은 간직하고 싶어요. 기억 속 그는 여전히 그 자리겠지만 저는 앞으로 나아갈 겁니다.

  선생님, 저는 상처를 잘 치유한 건가요? 한때는 사람이 어떻게 저토록 잔인하게 변했나 궁금한 적도 있어요. 어쩌면 선생님은 그가 그렇게 변한 이유를 아실 지도 모르겠어요.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못하고 저의 시간에서 가장 고독했던 그 때, 스스로를 위로하고자 썼던 변변치 않은 제 시를 보내며 편지를 맺고자 해요. 강녕하세요.

 

나만의 우주

 

누군가의 대신인 나도

누군가의 모든 것인 나도

피어나다 사라지는 시간과 같아

나는 나일뿐



세계는 나를 위해 존재해

태양, 달 그리고 별이 뜨는 것도 내가 없으면 시시해져

내가 없어진다고

그것이 흔들리거나 하지는 않아

하지만 모든 것은 나의 존재로 의미가 부여돼



내가 사라지면

하나의 우주는 사라져

그것은 나를 품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나만의 우주 

 

 

이천십이년 유월 십이일

독자 팔미호양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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