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성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1979년 출간된 중편 소설『하얀 성』은 오르한 파묵의 초기 작품으로 많은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뒷부분에 작가의 '소설 후기'와 역자 후기를 읽으니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됐다. 어떤 과정을 거쳐 구상하고 썼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이 책이 얇아서 골랐고 오르한 파묵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고 읽기를 참 잘 했다. 만약 내용을 알고 읽었으면 덜 재미있었을 것이다. 초반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걸까' 하다가, 중반에는 '이 사람들이 대체 왜 이러나' 하다가, 그 후부터 긴장감이 높아지고 마지막에는 무척 놀라웠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베네치아 젊은 학자 '나'를 태운 배가 오스만 해적에게 납치를 당한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노예가 되어 여기저기 끌려간다. '나'는 의사는 아니었지만 의학 지식이 있고 영민하여 몸을 쓰는 노예를 면하고 시종 같은 노예로 파샤(장군)의 일을 봐주게 된다. 거기서 자신과 모습이 닮은 오스만 사람 '호자'를 만나 호자와 함께 파샤의 불꽃놀이를 성공적으로 준비한다. 호자는 파샤에게 '나'를 자기 노예로 달라고 해서 둘은 함께 살게 된다. 아주 오랫동안.


파룩이라는 사람이 1600년대 책을 발견해서 그 내용을 해석해나가는 방식의 액자 소설이다. 흑사병과, 오스만의 헝가리 · 폴란드 정벌 등 역사적인 사건이 눈에 보일 듯 생생하게 묘사된다. 무엇보다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건 파디샤(왕) - 파샤 - 호자 - 나 의 관계 때문이다. 노예와 주인, 신하와 군주 사이, 말 한마디 잘못하면 목이 달아날 수 있는 시대다. '삶과 죽음'이 달린 상하관계에서 오는 팽팽함이 있다.


소설 해설에서는 두 주인공, 즉 나와 호자, 노예와 주인의 정신적 관계에서 긴장감이 유지된다고 쓰여 있다. 노예와 주인은 서양/동양, 베네치아/이스탄불, 이탈리아/오스만, 열등/우월 등의 대립을 이룬다. 하지만 두 남자는 닮았다. 우선 얼굴이 닮았고 호기심과 지식욕이 크고 배움에 열정적이다. 주인은 자기보다 우월해 보이고 뭔가 많이 알고 있는 노예에게 열등감과 동경을 동시에 느낀다. 둘은 서로 오랜 시간을 보내며 숨기고 싶던 과거 일까지 서로 나누게 되고 생각도 닮아간다. 그 과정이 따뜻하지는 않다. 노예와 주인 관계였으니까.

주인은 궁금한 게 많다. '왜 나는 나인가', '남들이 저지른 가장 나쁜 짓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몰두하고, '끝까지 가겠다'고 되뇐다. 전장에서 민간인들을 찾아다니며 '네가 저지른 가장 나쁜 짓이 무엇인지' 묻고 다니는 장면은 무척 잔인하고 덧없게 느껴졌다. 이교도의 잘못을 캐고 다녀 봤자 자신들의 잘못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이 저지른 잘못들은 대개 비슷했다. 거짓말한 것, 좀도둑질한 것...


나와 남은 다르지만 다를 바 없다.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낄 이유도 없는 것이다. '왜 나는 나인가'는 고대 철학자들부터 다뤄온 심오한 질문이지만, 결국 "사람들은 서로의 행세를 하면서" 살아간다. 본문에 나오듯, "사람이 누구라는 게 뭐가 중요"한가.

"어쩌면 몰락이란 다른 사람의 우월성을 보고 그들을 닮으려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라가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말이다. 이 책을 정체성에 관한 소설로 보는 건 이런 이유인 듯하다.


나는 '왜 나는 나인가'를 묻는 호자를 보면서 사춘기 소년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어쩌면 일생은 내내 사춘기일지도. 주인공이 몇 명 되지 않고, 이야기가 복잡하지 않은 짧은 소설인데도 이것저것 많이 담은 느낌이다. 역사 소설이라 영화로 만들면 볼거리가 많겠다 생각했다. 400년 전 오스만 제국을 엿볼 수 있는 영화가 되겠지.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긴 여운을 남기겠지.



참고로 작가의 말은 이렇다. 어린 시절 아파트 윗 층 한 할머니의 집에서 본 풍경이 『하얀 성』의 바탕이 되었을 거라 했다. 과학, 천문학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주인공들에게 적용시켰다. 두 주인공의 정신적 관계와 긴장감을 소설의 기본 요소로 하고, 여러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쌍둥이-닮은 사람' 테마와, '발견된 필사본 방법'을 적용했다. 작가의 말에서 창작의 고통이 느껴지기보다는, 재미로 이것저것 섞어 쓰며 여러 실험적 구상을 했고, 그 과정에서 쓰는 재미가 있었겠다 싶었다.



* * * * * * *



"호자와 나 사이의 유사성에 대해, 나보다 파샤가 더 초조해하는 것이 날 우쭐하게 만들었다. 그 당시 호자는 이 유사성에 대해 절대 알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유사성은 내게 이상한 용기를 주는 어떤 비밀이었다. 어떤 때는, 단지 이 유사성 때문에 호자가 살아 있는 한 내가 위협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p.67)



"진짜 학문은 그들이 왜 그렇게 바보 같은지를 이해하고, 그들의 머릿속이 왜 그런지를 알아서 그에 따라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p.81)



"우리는 이스탄불 사람들이 어느 날 아침 따스한 침대에서 각기 다른 사람으로 변해 일어나는 것을 상상하곤 했다. 그들은 옷을 어떻게 입을 것인지 모르고, 사원 첨탑이 왜 필요한 것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어쩌면 몰락이란 다른 사람들의 우월성을 보고, 그들을 닮으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pp.165-167)



"(...) 돕피오 성을 수호하기 위해 원정을 왔다는 것을 안 후, 우리는 성을 보았다. 성은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깃발이 걸린 탑에 지는 해의 희미한 붉은 빛이 반영되었다. 그러나 성은 하얀색이었다. 새하얗고 아름다웠다. 어쩐지 나는 이렇게 아름답고, 도달하지 못할 어떤 것은 단지 꿈에서만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p.218)



"사람이 누구라는 게 뭐가 중요합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했던 것과 앞으로 할 것이지요."(p.229)



"사람들이 그 어느 곳에서나 서로 같다는 것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그들이 서로의 행세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나고." (pp.231-232)



"그 노인은 "인생의 가장 멋진 부분은 멋진 이야기를 꾸미고, 멋진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닌가요?"라고 말했다. 그는 주저하면서 가방에서 지도 하나를 꺼냈다. 내가 지금까지 본 것들 중에서도 가장 형편없는 이탈리아 지도였다."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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