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녀 힙합 - 집밖의 세계를 일구는 둘째의 탄생
이진송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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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차녀다.
차녀로 태어나려고 태어난 건 아니지만 셋 중 정확히 중간에 낀 삶을 살아내느라(?) 형성된 나의 캐릭터는 이 책에 등장한 무수히 많은 '차녀'들과 너무도 닮았다.

작가는 어쩜 내 얘기를 이렇게 잘 써놨을까? 감탄하며 읽었다.

사실
나는 내가 차녀 콤플렉스를 가졌다는 것을
첫 직장에 입사했을 때, 나를 갈구던 직장 상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피해의식에서 벗어나라는 조 언이라 쓰지만 그의 그 꼰대 발언은 꽤나 충격이었고, 상처로 남았었다. 내가 피해의식이 있었나? 왜 내가? 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했었지만 스스로 내린 결론은 "단지 난 생존욕구가 강할뿐" 이었다. 위로 언니 아래로 남동생, 그 사이에 낀 차녀로써 말이다.
이런 '차녀'에 대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글로 풀어주는 이 책의 저자가 고맙기까지하니 역시 차녀끼리는 통하나보다.


p.35
엄마는 엄마대로 우리의 싸움이 얼마나 지겨웠겠는가. 게다가 젊었다. 혈기왕성했다. 엄마는 펜치를 들고 성큼성큼 다가와, 언니에게 이빨을 다 뽑아버리겠다고 위협했다. 나는 완전히 겁에 질렸다.

이 부분을 읽고 무작정 반가웠다. 아 이 세상에 나랑 똑같은 경험을 해 본 사람들이 정말 존재하는구나 라는 반가운 동질감이었다. 삼남매 중 둘째였던 나는, 어린시절 힘으로 못 이길것 같으면 '물었다'.
언니도 물고, 동생도 물고...
그래도 언니보다 동생을 훨씬 많이 물었는데
오로지 귀하디 귀한 손자만을 감싸시던, 내 나이 스물일곱때, 아흔의 나이로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내게 자주 하시던 말씀이었다.
동생을 한번만 더 물면 '펜치로 이빨을 다 뽑아버린신다고".. 그땐 어린 나이에 잘못한 걸 떠나 저 말씀이 왜 그렇게 서러웠는데 지금은, 친정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종종 튀어나오는 추억(?)의 이야기거리가 됐다.


p.62
언니는 친구들이 아기가 조금이라도 몸에 안 좋은 걸 먹거나 자그마한 상처라도 날까봐 너무 노심초사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난 둘째처럼 키울 거야". 나의 눈이 번득 빛났다. 동생이 이런 책을 쓰고 있는데 그런 말을 한다? 이건 뱀파이어왕국에 브이넥티셔츠를 입고 길고 무방비한 목선을 뽐내며 입장한 꼴이었다. 둘째처럼 키우겠다고 선언.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는 문장이었지만 확인차 되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언니가 대답했다.
"막 키우겠다 뜻이지."
그때, 소파 한쪽에 기대앉아 있던 형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걸......안단 말야?"

p.100
차녀의 세계는 언니라는 필터링을 거쳐 구성된다. 언니가 해봐서 괜찮은 것은 나의 차례까지 순서가 돌아오고, 시켜봤더니 별로인 것은 대가 끊긴다. 첫째를 키우며 양육 경험이 쌓인 부모는 '굳이' 그렇게까지 안 해줘도 된다는 것을 깨닫고 가성비를 따지기 시작한다.

p.166
한참 폭풍처럼 웃고 떠든 뒤에는 어른이 된 입장에서 당시 부모님의 입장을 함께 헤아려보았다. 자원과 시간이 한정된 상황, 결국에는 어떻게 해도 서운한 애가 생기고 상처받는 애가 생기는 딜레마, 육아는 원래 이러나저러나 욕먹는 거라고 훌훌 털어버렸다. 그리고 '지금' 우리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누군가는 과거이 감정을 극복했고 누군가는 가족들과 연을 끊었으며, 누군가는 자신의 자식에게 그 서러움을 되물림하지 않고자 애쓰고 있었다.

p.202
차녀라는 위치 때문에 차갑고, 이기적이고, 욕심 많고......그런 면이 생긴 게 아닐까, 내 것을 내 손으로 악착같이 챙기다보니 이렇게 된 걸까 생각하기도 한다고. 하지만 곁에서 신예희를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그가 악착같다거나 이기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언제나 분주하게 좋은 것을 찾아다니고, 자신을 잘 돌보는 것을 넘어 남에게도 좋은 물건을 열정적으로 권하는 신예희의 에너지가 물욕이나 돈지랄로만 이야기되어서는 안 될 것 같다.


p.235
자라면서 이 '둘째'라는 존재에 대한 관심이 점점 확장되기 시작했다. 중심에 서지 못하고, 항상 순서가 밀리고, 누군가 나를 발견하고 편애해주기를 바라지만 차마 대놓고 요구하지는 못하는, 욕구와 의사가 그다지 중요하게 취급된 적이 없기에 생긴 감각 같은 것......누군가와 나누지 않아도 되는 온전하 애정을 향한 원초적 갈망과 우선순위에서 끝없이 밀리는 주변부의 경험. 이 모두를 이러저리 뭉쳐 '차녀성'이라고 이름 짓는다.




물론 나이를 먹고 성인이 되어보니, 또 아이들을 낳고 키우다보니 첫째도 그 나름의 고충이 있다는 것을 안다. 이 세상 어느 누가 나름의 고충이 없겠는가.

그래도 둘째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다뤄준 책을 읽으니 공감을 넘어 위안받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유쾌하고 즐거울 차녀이야기.

이 세상 가장 예쁜 차녀들 오늘도 행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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