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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서 멈춘다
우석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12월
평점 :
제목이 정확한 책이 좋다. 『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서 멈춘다』는 책 같은. 또박또박 책을 찍어내는 ‘책 공장장’ 우석훈의 최신작은 애매모호하지 않다. 두 가지만 초점에 맞춰 읽으면 된다. ‘기업’과 ‘민주주의’를 살펴 읽으면 된다. 월급 주는 곳, 내가 다니고 당신이 다니는 직장에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경험하며 살고 있는가?
물론 그렇지 못하다는 게 우석훈이 이 책을 쓴 이유고 이 책의 내용이다. 서문에서 저자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사무실의 말단 여직원들’을 굳이 밝혔듯, 책의 초반부에서 ‘젠더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여성에 대한 비민주적 기업 현황이 먼저 서술된다. “여성 비정규직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면 당연히 남성 비정규직의 처우도 나아진다.”라며 직장 내 여성 처우를 이야기하고, “이명박이 한 짓”을 까대며 기존 사원과 신입사원과의 차이지는 처우를 비난한다.
우석훈은 여성 이야기에 꽤나 많은 비중을 두었다. WASP를 노동의 기준으로 놓고 불리한 조건을 하나씩 붙여나가는 ‘핸디캡 노동’의 정확한 용어를 이전까지 몰랐다. 장애인 노동만인 줄 알았는데, 제2세계와 3세계, 여성까지도 핸디캡 노동의 범주에 넣는다는 걸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게 되었다. 김영란법과 주 52시간 근무로 일하는 방식에 변화가 옴으로 “은밀한 권력 체계에 접근하기 어려운” 직장 구성원들, 그중에서도 여성에게 유리한 방식이 올 것이라고 정리한다. 이런저런 애매한 앎을 확실히 하는 데 『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서 멈춘다』는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좋은 사회는 아버지가 자상하든 그렇지 않든, 부자든 아니든, 자식들의 삶이 일정 수준 이상은 유지할 수 있는 사회다. 롤스(John Rawls)가 얘기하는 정의론의 핵심이 바로 이 내용이다. 아버지가 누구냐에 따라 자식의 운명이 다르기는 하겠지만, 최악의 경우도 너무 황당하지 않은 것, 그게 정의로운 사회의 기준이다.”
결국 이 책에서 말하는 ‘민주주의’는 롤스의 그것이다. 억울하지 않은 직장생활. 저자는 “직장 민주주의가 우리가 같이 일굴 수 있는 거의 유일하고 마지막인 희망”이라고 믿는다. ‘팀장 민주주의’, ‘젠더 민주주의’, ‘오너 리스크와 오너 민주주의’ 등을 지나 마지막을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로 끝맺는다. 삼성, 카카오, 전교조, 병원, 아시아나, 서울우유, 여행박사… 모두 ‘직장’이라는 면에서 동일하지만 노동자들이 겪는 민주적 현실은 달랐다. 먹고살기 위해서 노동자들은 직장에 다닌다. 민주적이어도 민주적이지 않아도 그들은 다녀야만 한다. 살기 위해서다.
민주적인 직장을 세는 게 빠르다. 민주적이지 않은 직장이 훨씬 더 많다. 그러니 억지로라도 직장 민주주의를 이야기해야 한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구축하기 위해서. 저자는 이 희망은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누가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우리가 만드는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얽히고설켜서 뒤죽박죽일 때, 기본을 다시 생각해보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사람들에게 너무 막 대해왔다. 먹고 사느라고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해왔다. 모멸감을 참으면서 돈을 버는 시대가 너무 길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좀 오래된 개념이지만, 한국 경제가 그런 모습이라고 말하기는 민망스럽다. 여전히 우리 경제 상층부를 생각하면 ‘천민 자본주의’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고, ‘졸부’라는 표현이 입에 짝짝 붙는다.”
한 직장이라도 더 민주주의가 자리 잡혀야 한다. 한 잎이 누울 때 다른 여러 잎이 눕게 되듯 한 직장의 민주주의가 절대적인 민주주의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할 때 한 사람은 칼이 된다. 우리는 칼이 된다.
“내가 직장 민주주의가 우리가 같이 일굴 수 있는 거의 유일하고 마지막인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일해야 먹고사는 다음 세대에게 남겨줄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를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미래 세대에 최소한 한국에서 남의 돈 받고 일할 때 이 정도 대접은 받고 살 수 있다, 그런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가 일하면서 직장에서 받았던 대우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는 사회, 그 정도는 우리가 만들어 물려줄 수 있지 않은가? 그게 직장 민주주의다.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 경제가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하는 거의 유일한 디딤돌일 듯싶다. 그렇게 걸어가다 보면, 언젠가 한국 경제를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리고 이 길을 걸어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소득도 오른다. 직장 민주주의, 혁명으로 하는 거 아니다. 제도로 하고, 대화로 하고, 투표로 하고, 분위기로 하는 거다. 한겨울 몇 달씩 광장을 채웠던 촛불집회보다 쉽다. 승리라는 표현 뒤의 공허한 일상보다는, 뭐 하나라도 나아진 생활 경제가 더 의미 있다. 지금 우리가 여기에서 하는 일이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다. 다음 세대, 그다음 세대에게 좀 더 인간다운 직장을 주는 일, 미래를 만드는 일이다.”
“경쟁 속에서도 질서를 만드는 것, 그게 우리에게 필요한 직장 간 민주주의다. 직장 민주주의의 다음 단계로 직장 간 민주주의가 중요해지는 순간이 우리에게도 올 것이다. 기계적인 공정거래를 넘어 실질적인 직장 간 민주주의로, 우리의 경쟁 제도를 전환해야 한다. 그것이 희망의 씨앗이 틔워 올린 새싹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