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 말씀만 하소서 - 자식 잃은 참척의 고통과 슬픔, 그 절절한 내면일기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0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오륙년 전 누군가가 “뭐가 갖고 싶니?” 물었다면 나는 바로 스물두 권짜리 ‘박완서 전집!!!’을 외쳤을 것이다. 아무리 내게 관대하려 해도 삼십 만원에 육박하는 ‘전집’에 쓸 돈은 내게 없었다. 가끔 중고서점을 들여다보았지만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그러다 좋은 가격으로 올라온 전집을 놓칠 때면 약이 바짝 올랐다. 이 말은 내가 아직 박완서의 글을 ‘아주 조금’ 읽었다는 의미. 생활의 순간순간 그녀의 이름이 들릴 때면 숙제 같은 책들이 늘 눈앞에 오갔다.
얼마 전 《나의 나종 지니인 것》을 곱씹을 기회가 있었다. 오래전 그 단편이 내게 주었던 충격은 컸다. 박완서가 택한 ‘전화통화’라는 구성이나 상황 설정, 거기에 한 사람의 대사만으로 모든 슬픔을 전달할 수 있는 솜씨가 놀라웠다. 신은 디테일에 스며 있다는 건 작은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경이가 아니다. 모든 디테일이 정확해야 했다. 그런 걸 느꼈다. 이 슬픔을 좀더 알고 싶으니, 기회 되면 꼭 『한 말씀만 하소서』를 읽어야지 별러 왔다.
이북 스토어에서 고른 『한 말씀만 하소서』는 얇았다. 실제 보지는 못했지만 너무 순식간에 끝이 다가왔기 때문에 황망했다. 남편을 암으로 보내고 겨우 석 달 후, 스물여섯 창창한 아들을 어느날 잃어버리고 박완서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목숨은 붙어있지만 차마 살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아무것도 안 먹히던 사람이 어느날 밥을 먹게 된다. 목구멍에 밥이 들어가는 게 끔찍하지만, 그래도 뭐라도 해야 한다. 별 수 없다, 자기가 하던 걸 계속한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음식을 만들고, 흙을 파는 사람은 흙을 판다. 살아야 하니 돈을 벌러 나간다. 글을 쓰는 사람은 글을 쓴다. 그냥 산다, 그게 살기 위한 방법이다. 박완서에게는 글을 쓰는 것이 살기 위한 방법이었다.
천주교 신자인 박완서는 《생활성서》에 1년간 글을 기고하며 참척(慘慽)의 고통을 견뎌낸다. 정기적으로 내 글을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글쓰기의 원동력이다. 이 때의 박완서에게는 살아 있어야 하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다음 달에 약속된 내 글을 기다리고 있는 한 편집자와 수많은 독자들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살아있어야 한다. 글 약속을 지켜야 하므로. 이 글 『한 말씀만 하소서』는 자연스레 일기 형식이 되었다. 일기라는 것은 끝을 기약하지 않는다. 오늘 하루 하루만을 기록할 뿐이다. 살아 있는 한 일기는 계속된다. 박완서는 갑작스레 ‘쌩으로’ 겪어야만 했던 고통을 하루 하루 기록한다. 오늘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언제 언제 언제 어떤 일이 있었고, 거기에 따른 나의 감정과 나의 깨달음은 어떠한지. “베개가 젖도록 흐느껴 울었다. 죽음이 왜 무시무시한지, 아들의 죽음이 왜 이렇게 견디기 어려운지 정연한 논리로서가 아니라 폭풍 같은 느낌으로 엄습해왔다. 하나의 죽음은 그에게 속한 모든 것, 사랑과 기쁨, 고통과 슬픔, 체험과 인식 등, 아무하고도 닮지 않은 따라서 아무하고도 뒤바뀔 수 없는 그만의 소중하고도 고유한 세계의 소멸을 뜻한다.”, “그러나 곧 통곡이 치받쳤다. 며칠 동안 주리 참듯 참던 울음이었다.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참으려니 온몸이 격렬하게 요동을 쳤다. 엄숙하고 고즈넉한 분위기 때문에 차마 소리내어 울 수가 없었고 그게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었다. 나중엔 명치의 근육이 땡기면서 찢어질 것 같았다. 뭔가 안에서 엄청난 힘으로 파열할 것 같아서 먼저 다락방을 뛰쳐나왔다.” 같은 글줄에서는 생으로 피를 뚝뚝 흘리는 고통의 현장감을 느끼게 된다.
나에게 『한 말씀만 하소서』는 살아 있음의 기록이다. 신을 미워하면서 나를 증오하면서 어쩔 수 없이 밥을 먹고 배설하면서 박완서는 살아 있음을 기록한다. 이게 어떤 효용이 있었는가, 물론 그녀는 효용 때문에 글을 쓴 건 아니었겠지만 세상 모든 일은 어떤 효과를 만들어버리고 만다. 작가는 이 일기를 통해 “고통은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고통과 더불어 살 수 있게는 되었습니다.”고 고백한다. 반년 전의 박완서와 지금의 박완서는 너무나 다른 삶 위에 서 있다. 어쩔 수 없이, 이제는 고통과 함께 살게 된 것이다.
박완서의 일기에서 내가 가장 공감한 건 ‘이해할 수 없음’이었다. 누군가는 고통 때문에 무신론자가 되지만 누군가는 고통 때문에 유신론자를 벗어날 수 없다. 랜덤의 고통은 신의 장난처럼 느껴지고 그때 인간은 ‘감히’ 신에게 대들어 본다. 그것도 살기 위해서, 정말 살기 위해서다. 신에게 대들 때, 인간은 가장 가까이 신의 얼굴을 볼 수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