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세기의 여름
플로리안 일리스 지음, 한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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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을 앞둔 시절은 아름답다절정(絶頂)을 구가하고 있기 때문이다가장 대표적인 그때가 유럽의 19세기말흔히 그 시기를 벨 에포크(Belle Époque)’라고 부른다이 시절을 살던 이들은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1914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야 만다는 걸참혹을 보았을 때 절망처럼 사라져 간 아름다운 시절을 독일 예술사가 플로리안 일리스(Florian Illies)가 책 한 권에 담았다1913년 세기의 여름은 벨 에포크처럼 아름답기 그지없다
 
지금부터 백여 년 전, 1913년은 그야말로 모든 예술이 하나하나 꽃핀 시기다문학음악미술건축사진패션… 그 어떤 것도 빠지지 않는다내가 오랫동안 사랑해 온 예술가들과 미처 몰랐던 예술가들이 각각의 챕터 안에서 자기 존재감을 밝힌다어찌 생각하면 너무 당연한 구성이다. 1월부터 차곡차곡 12월이라니마치 1913년 누군가의 월간 다이어리를 보는 것처럼이 다이어리는 일별로 구분하지 않은 커다란 백지다그는 여기저기에 예인(藝人)들의 이야기를 적는다가끔은 정갈하게가끔은 휘갈겨서앞서거니 뒤서거니 그들의 이야기는 얼키고 설켜 기묘한 분위기를 만든다이 책의 광고 중에 마술적 리얼리즘 소설의 한 장면을 읽는 것 같다,”는 카피가 제격이다이 책의 노고는 그야말로 자료 수집에 있다플로리안 일리스는 3년에 걸쳐 자료를 수집해 이 글을 썼다고 한다사실 구성은 어이없게도 너무 상식적이다왜 이런 생각을 그간 해내지 못했을까어찌 보면 너무나 순차적인데역시 창의력은 관찰력이라는 걸 실감한다
 
2014년 이 책을 소개받아 처음 읽을 때는 술술 읽었다이 예인들의 뒷이야기 수다를 듣는 기분으로 벨 에포크의 분위기를 경험했다두 번째 읽을 때는 페이지마다 등장하는 미술가와 음악가문학가정치가의 이름에 각기 다른 색으로 포스트잇을 붙이며 읽어나갔다세 번째 읽을 때는 기억할 만한 사건에 포스트잇을 붙였다세 번을 읽고 나니 어느 정도 흐름이 잡혔다이 시기는 모더니즘의 종말에 다다른 시기다예민한 인간들로 가득한 예술 분야가 특히 그랬다정치적으로는 제국주의와 민족주의가 패악을 부렸다날씨는 작열(灼熱그 자체다어디 폭발하지 않으면 안 될 분위기였다. ‘절정(絶頂)’이었다는 이야기다
 
개인적으로는 독일 표현주의의 다리파와 청기사파 이야기마르셀 푸르스트와 토마스 만의 주변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다저자가 많은 분량을 할애했기도 하지만 내 관심사가 그곳에 있기도 했다마침 얼마 전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읽었기에 타이밍이 또다시 좋았다매 달마다 뜬금없이 나오는 모나리자이야기도 긴장 풀기에 좋았다나는 정치 영역에 꽤 무지한데히틀러와 스탈린 이야기는 기대하지 않았다이 책에는 300명이 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고 하는데그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2018년 서울에 사는 내가 그러하듯이1913세기의 여름』 역시 인간의 이야기이다삶의 핵심은 어디에나 인간이므로.
 
역시 나는 수다쟁이를 좋아한다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청산유수(靑山流水)로 해 주는 사람을아니 책을이 책을 읽으면서 의외로 내가 인간의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걸 깨달아 놀랐다그동안 야사를 읽어본 적이 거의 없었는데예술가들의 뒷이야기 투성이인 1913년의 다이어리는 참으로 매력적이다벨 에포크는 이다지도 매력적인 인간으로 가득했다나는 얼마큼 매력있는 인간인가내가 아는 누가 이렇게 매력적인가매력은 매력으로 네트워크한다그러니 아름다운 시절은 언제든 다시 올 수 있다매력있는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하나 둘셋 넷 만날 때 우리는 아름다운 시절을 다시금 만들고 있다

설령 아름다운 시절이 몰락해도 괜찮다. 몰락 이후에는 또다른 시작이 있으니, 예를 들면 20세기 같은 그런 것. 아름다운 시절을 겪었다면 몰락조차도 그저 아름다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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