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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 (무선 제작) - 무기.병균.금속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가, 개정증보판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느 집 책장에나 꼭 있다만 읽은 이는 별로 없다는 책의 대명사 『총, 균, 쇠』 나 역시 2013년에 구매해두고 가끔 들춰보느라 앞부분만 까만. 그래도 이번에는 꼭 읽고야 말리라 장장 열흘을 소모한 ‘지지부진 총 균 쇠’가 드디어 끝났다. 참고문헌을 제외하고도 686페이지. 이건 누가 뭐래도 돌베개다. 벽돌도 아니고 베개. 아이고… 이 책 들고 다니느라 고생한 내 척추에 리스펙트. 그래도 정말이지 읽기 잘했다.
『총, 균, 쇠』 읽기의 가장 큰 장벽은 지리에 쥐약인 내 머릿속과 상상력을 발휘할 틈이 없어 재미없기 그지없는 1장이다. 호모 에렉투스부터 크로마뇽인에게까지 이르는 인류의 탄생과 진화기. 2장은 그나마 좀 낫고 3장에 들어가면 조금 읽을 만해진 다. 이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등장하므로. 물론 그러다가 다시 수없는 ‘예시’의 소용돌이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다가 다시 ‘이야기’가 등장하고. 머리에 쥐가 돋는 ‘예시’를 억지로 읽다 보면 다시 ‘이야기’ 그러다 간신히 19장의 끝을 맺는다. 물론 그 뒤에는 추가 논문과 재러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총, 균, 쇠 후기》, 옮긴이의 말과 추천사까지 있다. 술술 읽히지 않아 속도가 안 났다. (물론 이건 지리를 싫어하는 내 취향 탓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많은 종이가 필요했을지 의문이다. 인간의 농경과 더불어 시작한 정착 생활로 인해 인구밀도가 증가하고 총과 균과 쇠와 문자와 기술 같은 문화가 효과적으로 발달했으며, 유라시아는 같은 위도 측의 동서 지형이라 이러한 발명품을 순식간 전파할 수 있었고 아메리카는 남북 지형이라 그리하지 못했다고. 아프리카는 중앙에 위치한 사막이 이를 가로막았다고. 물론 1부 《인간 사회의 다양한 운명의 갈림길》, 2부 《식량 생산의 기원과 문명의 교차로》, 3부 《지배하는 문명, 지배받는 문명》, 4부 《인류사의 발전적 연구 과제와 방향》의 큰 흐름에 따라 환경 차이와 힘, 식량 생산과 가축화, 병원균-문자-기술-정부와 종교의 결합, 인류사의 사건과 연구 방향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럼에도 너무 많은 같은 개념이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을 감출 수가 없다. 그리고 중요, 제목에서 강조하는 ‘총’과 ‘균’과 ‘쇠’만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 인간을 둘러싼 모든 환경과 영향력이 (한 사람의 결정 같은 우연까지도) 이 책의 메인 아이디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행운’ 하나로 모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유럽이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을 수 있었던 까닭은 백인 인종 차별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유럽인과 아프리카인의 차이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리적, 생물지리학적 우연(특히 두 대륙의 면적, 축의 방향, 야생 동식물 등)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아프리카와 유럽의 역사적 궤적이 달라진 것은 궁극적으로 부동산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P.591)
책을 끝맺는 ‘부동산’이란 단어에 빵 터졌고 곧이어 황망해졌다. 내가 종이책 대신 이북 사는 문제에 늘 농담처럼 내뱉는 ‘부동산의 문제’가 여기서도 적용된다는 말인가. 젊음의 한때 영국 유학을 계획하던 시절, 나는 내가 한국에 태어난 것을 미워했다. 누군가는 네가 북한에서 태어나지 않은 걸 감사하라며 나를 비난했지만 그래도 나는 꽤 괴로웠다. 그때 나의 질문이 얄리와 뭐 그리 달랐을까. “왜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생활과 기회와 미래가 좁을까?”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더 형편없다. 생활과 기회와 미래라니 무슨! 직장 가까운 데 창이 크고 천정이 높은 널찍한 ‘내 서재’ 하나 갖기만을 열망하며 살아가는 생활인인데.
아무리 객관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운’의 영향력을 지우기는 힘들다, 생명의 영역에 있어서는. 생명 하나를 빼면 그를 둘러싼 그 모든 것은 불공평하다. 심지어 그 생명에게 가닿는 ‘시간’마저도. 그러니 거기 휩쓸려 순식간 파묻히지 않으려, 연약한 생명 하나하나는 얼마나 순간순간 분투하고 있는가. 그 생각을 하면 안타깝고 쓸쓸해진다. 이 두꺼운 책, 『총, 균, 쇠』가 쏟아낸 거대한 역사와 과학의 분석과 서술 앞에서 나는 더욱 작고 약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