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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1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처음부터 끝까지 집에 대한 이야기다. 각자의 집을 회복하기 위해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찾아가고 내려오는 이야기다. 목차는 단순하다. 먼저 1부 《집을 잃다》와 2부 《집으로》 그리고 3부 《집》. 세 이야기는 각각 1904년의 리스본, 1938년 포르투갈. 1981년. 캐나다에서 시작되고 다른 부(部)의 장소를 스쳐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향한다. 세 개의 이야기 사이에는 장소와 사람이라는 작은 연결고리가 있어 순차적으로 연결된다.
첫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 고미술 학예사 토마스, 두 번째 주인공인 병리학자 에우제비우, 세 번째 주인공인 상원 의원 피터. 공통점은 세 사람 모두가 가정을 잃었다는 것. 특히 지극히 사랑하던 아들과 배우자(配偶者)를 잃었다는 것이다. 이 상실의 이야기로부터 세 개의 이야기는 각각 시작되고 멋대로 흘러간다.
토마스는 일주일 만에 아내와 아들과 아버지를 잃고 신에게 대항하듯 거꾸로 걷는다. 이때 자기 마음을 알아줄 듯한 율리시스 신부의 기록물을 찾아낸다, 그 역시 아들을 잃었다. 그의 일기에는 빼곡히 ‘이곳이 집이다’라는 말이 적혔다. 그가 만든 십자고상은 어떠한가! 그는 이 보물을 찾아 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한다. 거기 어디 숨어있을 십자고상을 찾기 위해. 아들을 잃은 토마스와 아들을 잃은 신과, 그리고 또 아들을 잃은 누군가의 이야기가 거기 있다.
노년의 병리학자 에우제비우에게 찾아온 노년의 여인, 아들을 잃은 충격과 함께 얼마 전 죽은 자기 남편을 부검해달라고 온 여자의 요구는 낯설다. 왜 그는 이토록 기묘한 일을 해야만 하는가, 그 역시 상실의 사람이었다.
피터는 40년간 함께한 아내를 잃고 아들조차 고난 가운데 편치 못한 상황이다. 상원 의원으로서 제 역할도 못할 정도로 멘탈이 망가져 어디론가 떠난다. 그에게는 기댈 곳이 필요하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 있는 투이젤루에서 피터가 찾아낸 대상은 누구인가? 그가 마지막 편안히 정착할 집은 어디(누구)인가.
『포르투갈의 높은 산』 주인공 셋에게 ‘집’은 각각 사랑하는 이이며, 사랑하는 이를 완성하는 무엇이면서, 잃은 사랑 대신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온기다.
다시 그들의 가정(家庭)으로 돌아가자. 결혼은 자기 둥지를 만드는 것, 자기 집을 짓는 일이다. 언제나 내 마음을 안심하고 놓아둘 안전한 집을 짓는 것이다. 어느덧 결혼보다 동거로 시작하는 커플이 많아졌지만, 이제까지의 그 어느 시대보다 결혼이 중요하지 않은 시기가 왔지만 그래도 나는 결혼만이 줄 수 있는 제약 하나가 아름답다고 믿는다. 아침이 되면 두 사람이 각자의 일터에 가서 헤어지고 자신의 삶을 살지만, 밤이 되면 그 사람이 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온다는 그것. 그것처럼 따뜻한 것이 없다.
이 따뜻함을 잃었을 때, 어떤 사람은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한다. 거기 가면 이 집을 다시 찾아올 수 있을 듯이. 누군가는 복수를 위해, 누군가는 회복을 위해, 누군가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얀 마텔의 서사 기법을 굳이 이름하자면 환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마술적 사실주의’일 터, 이 때문에 이 소설은 상징으로 가득 차고 명확하지 않은 해석과 해석 사이에서 독자는 헤맨다. 착각과 또 다른 착각, 애매함 가운데 답답함을 느끼기도 한다. 안개처럼 뿌연 이야기 가운데 얽히고설킨 생과 사, 신과 신앙, 그리고 믿음. 사랑과 상실, 인간과 동물의 아이디어가 읽혔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은 내가 어느 정도로 오독(誤讀) 한 건지 좀 걱정된다. 그러나 잘 보이지 않아 더 아름다운 것이 환상의 세계다. 잘못 해석해서 더 재미있는 것이 이러한 세계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세 주인공에게 미지의 세계이며 환상의 장소다. 그러나 3부에서의 피터가 침팬지 오도와 함께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 올랐을 때 그는 의외로 실망한다. 거기 올라가 봐야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간절히 원한 것임이 분명한 일은 마침내 그곳에서야 일어난다. 그가 늘 오도와 산책하며 오르내리던 그곳에서.
그렇다면 이것이 믿음인가? 간절한 소망, 나의 안식이 나의 일상 가운데 이루어지리라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 에우제비우의 아내 마리아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슬픈 사실은 의사들이 뭐라고 하든 자연사는 없다는 점이에요. 모든 죽음은 살해로, 사랑하는 이를 부당하게 빼앗긴 것으로 느껴지죠.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살면서 적어도 한 번의 살해를 맞닥뜨리죠. 바로 자신의 죽음 말이에요. 그게 우리의 운명이에요.” 확실한 건 딱 하나, 이 운명뿐이다. 이 운명 때문에 우리는 사랑에도 믿음에도 슬프도록 절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