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6
헤르만 헤세 지음, 임홍배 옮김 / 민음사 / 200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낡디낡은 누런 표지를 한 지와 사랑은 오랫동안 아버지의 서재 한가운데에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서재에 둥지를 틀고 자랐다. 그러다보니 데미안보다 먼저 내 손에 쥐인 헤세의 책. 당시 예술고등학교 진학을 고려하던 내게 이보다 더 먹음직한 책이 있었으려나. 초반부는 밋밋했고 중반부는 힘겨웠으며 후반부가 놀라웠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후반부 대화들이 예리했다. ‘이런 게 예술인가?’ 뜨거웠던 기억이 난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는 원래 제목이 내 기억을 일깨우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23일 출장의 밤, 서늘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번역의 문제였을까, 편집의 문제일까. 같은 원본을 어떻게 어레인지하고 연출하느냐에 따라 알맹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아름답다, 반짝인다. 너무나 미묘하다고 탄식하며 책장을 덮었다.
 
마리아브론 수도원에서 수도 중인 나르치스는 젊은 골드문트를 만나 바로 알아본다, 그와 자신은 동지(同志)라는 것을. 두 사람은 각기 이성과 열정으로 대비되는 인간이었으나, 둘 다 고귀한 성품을 지니고 재능을 가진 인간이라는 데 공통점이 있었다. 운명이 선택한 인간이라는 공통점이. 재능은 칼이다. 하늘은 인간에게 각기 다른 재능을 주지만 이 재능이 칼이라는 속성은 다르지 않다. 재능있는 인간은 이 칼을 다루어야 하기에 아프고 상처입을 수밖에 없다.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피흘릴 수밖에 없는 것이 재능이다. 그러기에 재능이 큰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그러므로 나르치스는 골드문트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르치스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자기 자신의 숙명 뿐 아니라 다른 이의 숙명에 대해서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사람의 영혼을 잘 읽어내는 나르치스는 이 친구가 자기 인생의 한 토막을 잃어버린 그런 유형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P.67)” 그러니 골드문트의 진실을 안 이상 그를 그냥 둘 수 없다. 골드문트가 어떤 생을 살아야 하는 운명인지를 일러줄 수밖에. 이에 모르고 있던 골드문트의 감각은 열린다. 골드문트는 풍부한 감성과 영혼을 타고난 강한 인간에게 볼 수 있는 온갖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예술가의 기질과도 통하는 것이었다. 어떻든 골드문트는 위대한 사랑의 힘을 타고난 존재였기에 쉽사리 불붙고 자신을 내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그의 운명이자 행운이었다. 그는 사랑을 위해 태어난 존재인 것이었다. 섬세하고 풍부한 감성을 타고난 그는 꽃향기라든가 떠오르는 태양, 말이나 새의 비상, 음악 같은 것을 너무나 깊이 체험하고 사랑할 줄 알았다.(P.61)”
 
골드문트는 떠난다. 본성을 시험할 수 있는 곳으로, 감각의 극한을 실험할 수 있는 곳으로. 계속 여자를 만나고 희롱하며 사랑의 달콤함을 따먹고 죽음과 비참과 좌절을 경험한다. 방탕과 자유를 기뻐하며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기사의 성에서 머물다 유혹한 큰딸 리디아와 작은딸 율리아의 이야기, 거절된 쾌락을 경험한 이야기가 골드문트 방랑의 절정이 아니었을까. 솔직히 이번에도 나는 이 부분이 불편했다. 그가 건드리고 떠난 여자들의 이후 모습은 어땠을지, 가부장에게 학대당하지는 않았을지 그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내 안에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이 없을 때에도 뮤즈의 존재는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언젠가의 누가 내게 뮤즈가 되어주기를 청했을 때의 불쾌함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불편해했다. 물론 골드문트가 남성으로 설정된 인물이어서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가 유혹하고 실망하고 떠나버리고 경멸하는 대상이 너무 많은 수의 여성이었을 때, 이 짧은 시간의 만남이 정말 사랑이었을까? 아무리 시대나 설정의 한계라 해도, 비유나 상징으로서의 의미라 해도 여성으로서의 나는 여전히 불편하다. 나중에 골드문트가 만드는 예술 작품의 뮤즈로 여성이 소비된 건 아니냐는 항의를 자신 없는 목소리로 지른다.
 
역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최고의 아름다움은 후반부다. 만신창이가 된 골드문트를 구하러 온 나르치스, 수도원장이 되어 그에게 예술작품을 만들 환경을 마련해주는 나르치스. 그는 예술 자체에 복종했다. 예술은 얼핏 보면 정신계의 여왕 같지만, 실은 하찮은 것들을 너무 많이 필요로 했다. 예술을 하려면 안정된 작업 공간이 있어야 했고, 작업 도구와 목재, , 물감 따위가 필요했으며, 노동과 인내가 요구되었다. 그는 숲에서 누리던 거친 자유를 예술에 바쳤다. 넓은 세상을 만끽하는 자유, 위험을 즐기는 짜릿한 쾌감, 안빈낙도의 자부심을 모두 바쳤다. 그러고도 그는 숨을 죽이고 화를 삭이며 자꾸만 새 제물을 바쳐야만 했다.” 이 책의 주인공은 골드문트지만, 그렇기에 나르치스의 존재는 더욱 빛난다. 나르치스 없이는 골드문트는 놀라운 결실을 맺지 못했을 터이므로. 예술가의 삶은 세상에서 유리하다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런 그들에게는 현실 파악에 능한 스폰서가 꼭 필요하다. 나르치스같은 든든한 보호자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나르치스의 섬세한 질문에 골드문트는 예술이란 무엇인지, 자기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견고히 정립해 간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어느 것 하나 줄 긋지 않을 곳이 없다.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두 사람이 같은 눈높이에서 서로 다른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정확히 인식하지 않았지만, 서로 만나지 않았던 시간에도 그들은 서로 생각하며 서로에게 걸맞는 인간이 되도록 살아왔다. 존재만으로 나를 성장하게 하는 사람. 그게 그들이다.
 
내가 오래전부터 자네를 부러워하는 것은 자네의 학식 때문이 아니라 평정한 마음 때문일세. 자네의 초연함과 평화가 부럽네.”
나를 부러워할 필요 없어, 골드문트.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평화란 존재하지 않아. 물론 평화가 있긴 하지만, 우리의 마음 속에 늘 깃들여서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그런 평화란 존재하지 않는 법일세.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평화는 잠시도 마음을 늦추지 않고 끊임없이 싸워서 얻어지는 평화, 나날이 새롭게 쟁취해야만 하는 그런 평화뿐일세. 그런데 자네는 내가 그렇게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지. 공부할 때 싸우는 모습도, 기도실에서 싸우는 모습도 본 적이 없어. 자네가 나의 그런 모습을 보지 않은 것은 좋아. 자네는 그저 내가 자네보다 기분에 덜 좌우된다는 것만 보고서 평화롭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모습도 실은 싸움과 희생을 통해 얻어지는 걸세. 인생을 제대로 사는 사람이라면 다 마찬가지겠지. 자네의 경우도 그래.” (P.446)
 
골드문트처럼 살기 바랐지만 그리 못할 거였다면 차라리 나르치스처럼 살아야 했다는 생각을 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헤세의 예술론을 잘 드러내고 있지만 진짜 예술은 이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헤세는 처음부터 끝까지 골드문트의 삶을 옹호하고 있지만, 한편 나는 나르치스에게 마음이 쓰인다. 그 역시 같은 본성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다만 그것을 기를 쓰고 감추며 투쟁한 사람. 공부실에서 기도실에서 입을 꾹꾹 틀어막으며 싸우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투쟁이 예술을 얻으려는 감각의 투쟁, 선을 넘기는 모험보다 어찌 부족할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그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가져버린 골드문트를 온전히 사랑하는 것을. 자신이 끝내 갖지 못할 것에 전혀 열등감을 가지지 않는다. 이 그릇이 나를 비참하게 한다.
 
그런데 하늘나라의 관점, 하느님의 관점에서 보면 과연 어떨까? 모범적인 삶의 질서와 규율, 세속적 욕망과 감각적 쾌락의 관념, 더러운 일과 피 묻히는 일을 멀리하고 철학과 기도에만 몰입하는 것이 과연 진정으로 골드문트의 삶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이란 존재는 정말 정해진 규칙대로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 것일까? 인간의 시간과 운명이 예배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일까인간은 정말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공부하고, 그리스어를 배우며, 관능을 억제하고, 속세에서 달아나도록 창조되었는가? 애초에 하느님이 인간을 쾌락과 본능, 핏빛으로 물든 악, 죄와 육욕, 절망에 빠지는 천성으로 창조하신 것은 아닐까? 친구에 대해 깊이 생각하다 보면 이런 의문이 수도원장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렇다. 어쩌면 골드문트의 삶이 더 유치하다거나 인간적인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리라. 실제 세상에서 발을 빼고 깨끗한 삶을 살면서 조화롭고 아름다운 사상의 화원을 꾸며 놓고 안전한 화단 사이로 티끌 하나 묻히지 않고 거니는 것보다, 어쩌면 차라리 현실의 고통스러운 흐름과 혼돈에 빠져들어 죄를 범하고 그 쓰라린 결과를 받아들이는 편이 결국 더 용감하고 숭고한 것인지도 모른다. 너덜거리는 신발을 신은 채 숲 속을 헤매며 큰길을 따라 걷고, 햇볕을 쬐고 비를 맞으면서 배고픔과 가난에 절어 시달리기도 하고, 쾌락의 기쁨에 차서 즐기다가는 고통스런 대가를 치르는 것이 어쩌면 더 어렵고 더 용감하며 더 숭고한 것이리라.
 
고귀한 일을 해낼 운명의 인간은 인생의 피비린내 나고 혼돈스런 세상 밑바닥 깊숙이 빠져들어 먼지와 피가 잔뜩 묻어 더러워지더라도 하찮아지거나 저속해지지 않고, 자기 내부의 신성한 불꽃을 꺼뜨리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조차 골드문트의 영혼에서는 성스러운 불빛과 창조력이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결국, 승자는 나르치스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애초에 하느님은 인간을 육욕과 애욕에 빠지는 존재로 만들었다. 죄에 절어 쾌락에 탐닉하는 인간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몇몇만이 예술가가 된다. 그건 선택된 자만이 이루어낼 수 있는 경지다. 그런 골드문트의 종점이 되어준 건 나르치스뿐이었다, 그는 죽음에 가까이 간 골드문트가 만든 조각 앞에서 자기가 추구하던 진리가 예술로 다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친구에게 감탄한다. ()도 사랑도 하나가 되었다. 골드문트는 떠나고 마지막은 나르치스가 남았다. 

그러나 무엇이라 말해도 너무나 슬프다. 나는 합일하기는커녕 지()에도 사랑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한 인간, 모든 것이 네 선택이었다 혹은 네 운명이었다 말해도 슬프기 그지없다. 나는 이 정도의 인간임에 비참하지만 한편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