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책을 읽다 - 미술책 만드는 사람이 읽고 권하는 책 56
정민영 지음 / 아트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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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화가 면허’는 ‘장롱면허’다. 미대를 졸업했지만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한때 그림 속에서 인생을 설계했다. 밤낮으로 캔버스와 씨름하다가 현대미술 이론과 동서양의 철학을 접하면서 개념미술과 설치미술로 나아갔고, 돌연 붓을 놓았다. 눈을 뜨고 보니 그림은 더 이상 ‘목매달아 죽어도 좋은 나무’가 아니었다.”(P.28, 「늦깎이 ‘옥상화가’의 탄생」

두 번째 챕터를 여는 글을 읽다가 목이 메었다. 저자와 나와의 기막힌 공통점을 발견했다, 손이 떨렸다.

가끔 생각한다. 그림도 못 그리는데 내게 책이라도 없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작년 초 회의를 기다리며 책장을 넘기던 내게 설화가 물었다. “제인, 제인은 그림이 더 좋아 책이 더 좋아?” 나는 머뭇거리지도 않고 대답했다. “책이요.” 의외의 반응에 설화는 되물었다. “아니 미술로 먹고살면서 그래도 돼?”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응답했다. “책은 나에게 한 번도 상처 준 적이 없거든요.”

나 역시 저자처럼 열심히 그렸다. 인용문에서 ‘개념미술’만 빼면 꽤나 비슷하리라. 새벽 7시면 학교에 도착해 그림을 그렸고 주 3-4일 학원 아르바이트에 쫓기면서도 한 번도 합평을 미룬 적이 없으며 제출 기한이나 400호 분량을 어긴 적도 없다. 밤을 새가며 설치 작업도 했다. 나무를 톱질하고 칼질을 하다가 무릎을 찢어먹어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졸업한 후에도 꾸준히 그리다가 공모전과 출판·잡지사에 내내 퇴짜를 맞으면서도 크게 다른 진로를 고려하지 않았다. 그림 그리는 데 도움이 된다며 도서관에서 희한한 책은 얼마나 많이 빌려봤는지, 현대 독일 철학이니 발터 베냐민, 아도르노 미학을 이해도 못하면서 열정 하나로 읽고 또 읽었다. 내 젊은 날에는 이미지의 길 말고 한 번도 곁길을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미술은 열정이 아니고 생활이다, 먹고사는 일이다. 미술실 구석에 세워둔 내 그림들을 아이들이 사랑한다. 왜 요즘은 그림을 그리지 않냐고 묻는다, 나는 그저 웃는다. 미술이 생계가 되다 보니 더 이상 그림을 그리는 데 기쁨이 없다. 좋아하는 것이 직업이 되면 이렇게 된다. 약간 서글프지만 그래도 담담하다. 세상 이치가 나를 피해 갈 리는 없으므로 다 괜찮다.

『미술책을 읽다』는 나처럼 화가를 꿈꾸었던 책벌레 선배님의 피와 땀 같은 흔적이다. “한 권의 책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만나는 것이다. 나는 그 세계를 지그시 품었다. (정민영, 『미술책을 읽다』, 아트북스, 2018)” 그 역시 미술을 직업으로 먹고산다. 게다가 17년간 ‘아트북스’란 간판으로 미술 출판을 섬겨온 분이라니 그야말로 ‘미술+책’의 운명이다.

한 챕터에 책 하나씩(물론 곁가지로 짧게 설명하는 책까지 더하자면 수없다.) 56개의 책을 소개하면서 저자는 애타도록 ‘미술의 대중화’를 외친다. ‘미술책은 어렵다’는 생각이 정말 편견일까?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의 입장에서 미술책은 좀 부담스럽다. 그림 보는 게 좋은 거지 미학과 철학과 역사와 미술사가 빽빽한 설명은 독자를 작아지게 한다. 그래서 나는 아트북스 책을 좋아한다. 읽는 이에게 어려운 내용을 가르치려 들기보다는 존중하려는 느낌이 있다. 기획뿐 아니라 내지 디자인을 높이 평가한다. 레이아웃이 편안하고 폰트 선정이 좋다. 튀지 않는 디자인에 가독성을 중시한 글자 흐름이 빛난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최근 나오는 책은 빛을 반사하는 코팅지가 아니라 무광지다. 읽는 이를 배려하는 섬세함이다. 몇 년 전부터 아트북스 책에는 ‘일상을 예술로, 예술을 일상으로’라는 소형 팸플릿이 들었다. ‘미술의 대중화’, ‘미술의 생활화’라는 저자의 신념이 한결같다.

책은 무게감이 있다. 미술 책임에도 불구하고 그림은 적고 글자가 빽빽하다. 솔직히 미술 초보자에게는 약간 어려울 수도 있다. 그림을 기대하고 (표지를 열어보지 않고) 책을 샀다면 놀랄 정도로 그림은 적고 인용문이 가득하다. 미술 책을 꾸준히 읽어온 이가 아니라면 잠깐 덮어두어도 좋다. 그러나 미술책을 제대로, 잘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 시간을 들여 읽어야 한다. 밀도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균형감이 좋은 책이다. 차곡차곡 쌓아올린 흰 돌벽 같은 책이랄까. 56권의 책마다 알곡 같은 발췌와 인용은 여기 소개된 모든 책을 읽어보고픈 열망을 갖게 한다. “한 권의 책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만나는 것”이므로 그의 미술 책장 한 권은 크고 깊고 넓다.

책을 덮자마자 저자가 소개한 책을 읽고 싶어졌다. 온 동네를 뒤져 『김환기·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이충렬, 유리창)를 구해 읽었다. 절판된 책이라 소장한 도서관이 드물었다. 몇 번을 읽고서도 반납하기 아쉬워 전문을 카피해 보관했다. 그만큼 잘 쓴 귀한 책이다. 뿐만 아니라 내가 동양화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당장은 무리지만『미술책을 읽다』에서 소개한 동양화 책을 차근차근 찾아 읽으려 한다, 앞으로 몇 년간의 목표다. 내 미술 책장도 균형을 잡아야 할 것이다. 읽지 않은 책들을 추려 무엇부터 먼저 읽을지 별표를 친다. 3월부터 두달간 이 책은 내 사무실 책상 왼편에서 독서를 재촉했다. 그러다보니『미술책을 읽다』는 벌써 삼독(三讀)이다.

오랫동안 화가가 되지 못한 패배감이 나를 짓눌렀다.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게 제일의 열등감이 있다면 ‘재능 없음’이다. 수치스럽게 ‘뻥’ 차인 첫사랑이 끝내 잊히지 않고 인생을 지배하는 것처럼 그림 역시 그랬다. 화마(火魔)가 할퀴고 간 화상(火傷)이 여전히 날카롭다. 미련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그래도『미술책을 읽다』의 저자 같을 수 있다면 어떠한가, 화가가 안 되었어도 세상천지 훌륭하지 않은가. 부디 나의 운명도 그러하기를…『미술책을 읽다』가 내게 준 최고의 선물은 그것이다. 나는 좀 더 가벼워졌다. 앞으로도 기분 좋게 읽고 또 읽을 것이다. 내게 한결같은 나의 책들을. 좋은 책은 좋은 운명을 선물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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