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창비시선 411
신용목 지음 / 창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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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을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은 유명한 어떤 사건이후로 내게 좋은 질문은 아니다. 대신 나는 어떤 시를 좋아하세요라거나 어떤 시인을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을 수용한다. 물론 전자의 질문은 대답하기 어렵다. 너무너무 많기 때문에. 한편 후자의 질문은 몇 가지로 대답 가능하다. 그중에서도 신용목 시인은 내가 생각하는 시인이라면 이래야 해!’라는, ‘시인의 이상상과 같은 사람이다. 시만 바라본 지극히도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그는 선하고 안온한 마음을 가진 사람 같다. 선하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시인.

 

내가 죽은 자의 이름을 써도 되겠습니까? 그가 죽었으니

내가 그의 이름을 가져도 되겠습니까? 오늘 또 하나의 이름을 얻었으니

나의 이름은 갈수록 늘어나서, 머잖아 죽음의 장부를 다 가지고

 

나는 천국과 지옥으로 불릴 수도 있겠습니까?

 

(중략)

 

네 이름을 훔치기 위해

아무래도 죽음은 나에게 눈을 심었나 보다, 네 이름을 가져간 돌이 비를 맞는다.

귀를 달았나 보다, 돌 위에서 네 이름을 읽는 비처럼,

내가

천국과 지옥을 섞으며 젖어도 되겠습니까?

저기

공원을 떠나는 여자의 붉은 입술처럼, 죽음을 두드리는 모든 꽃잎이 나에게 기도를 전하는……

여기서도

인생이 가능하다면, 오직 부르는 순간에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뜨는 것처럼

사랑이 가능하다면,

죽은 자에게 나의 이름을 주어도 되겠습니까? 그가 죽었으니 그를 내 이름으로 불러도 되겠습니까?

 

공동체

아름다운 이름을 수집하는 이가 있다. 나는 그 기분을 이해한다. 내 것으로 훔치고 싶을 정도로 탐이 나는 이름이 내게도 있으므로. 나는 언제나 이름을 관찰한다. 나의 이름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변명하지만 그것은 이미 과거의 문제, 지금은 이 이름을 지극히도 사랑하는데 왜 나는 그것에 집착하는가. 나에게 호칭의 문제, 이름을 붙여주는 문제는 왜 중요한 것인가. 특별한 누군가의 이름은 나를 왜 전율하게 하는가. 나는 이 탐구에 아직 답을 얻지 못했다. ‘인생이 가능하다면’, ‘사랑이 가능하다면죽은 자에게 나의 이름을 주고 싶다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아직 나는 적절한 언어를 찾지 못하였다.

 

 

 

사랑은 내가 꾸는 꿈이 나를 찾아 헤매는 순간이어서 번번이 아침은 실패한 꿈을 물컹한 몸으로 바꿔놓는다.

 

 

진흙 반죽 속에서 조금씩 내가 되어 걸어나오는 진흙 인간처럼(전문)

이 단 한 문장의 시에서 오래오래 눈을 떼지 못했다. 멍한 마음으로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이 한 줄의 시로 마음을 채워 넣어야 할 것 같았다. 내 텅 빈 매일의 아침이 이런 것이었나 그런 거였나. 나는 그런 밤을 바삐 수행해 온 것이었나 싶어서 조금 기뻐졌다. 매일 아침마다 겪어내는 실패가 기뻐졌다.

 

이 시간이면 모든 그림자들이 뚜벅뚜벅 동쪽으로 걸어가 한꺼번에 떨어져 죽습니다. 아름다운 광경이죠. 그것을 보고 있으면, 우리 몸에서 끝없이 천사들이 달려나와 지상의 빛 아래서 살해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게 됩니다. 나의 시선과 나의 목소리와 거리의 쇼윈도에도 끝없이 나타나는 그들 말입니다.

오랫동안 생각했죠. 깜빡일 때마다 눈에서 잘려나간 시선이 바람에 돌돌 말리며 풍경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보거나, 검은 소떼를 끌고 돌아오는 내 그림자를 맞이하는 밤의 창가에서…… 목소리는 또 어떻구요. 투명한 나뭇잎처럼 바스라져 흩날리는 목소리에게도 내세가 있을까? , 메아리라면, 그들에게도 구원이 있겠지요.

 

갑자기 쇼윈도에 불이 들어올 때,

 

마네킹은 꼭 언젠가 살아 있었을 것만 같습니다. 아니, 끝없이 살해되고 있는지도 모르죠. 밤새 사랑했지만,

 

아침이 오고 또 하루가 저뭅니다. 이 시간이면 서서히 어두워지다가 갑자기 환해지는 거리에서 태어났던 것들이 태어나고 죽었던 것들이 죽는 것을 보곤 합니다. 그러나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한꺼번에 깜깜해지는 거리처럼, 사랑하는 순간에 태어난 천사에게만 윤회가 허락될 리는 없으니까요.

 

지나가나, 지나가지 않는(전문)

내 몸에서 그림자가 걸어나가가고 내 몸에서 천사들이 달려나간다. 나는 얼마나 무한한 존재인가. 그리고 그들이 떠난 이후의 나는 얼마나 텅 빈 존재인가. 마네킹이나 천사나 사랑받고 버려지기는 매한가지다. 마네킹이나 천사나 인간이 아니기는 매한가지다. 나는 밤이 되면 이상해진다. 내가 사람 아닌 것이 된 양 이상해진다. 지금이 꼭 그렇다.

 

내가 가장 훔치고 싶은 재주는 어둠을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저녁의 오래된 기술.

 

불현듯 네 방 창에 불이 들어와, 어둠의 벽돌 한장이 차갑게 깨져도

허물어지지 않는 밤의 건축술.

 

검은 물속에 숨어 오래 숨을 참는 사람처럼.

 

내가 가진 재주는 어둠이 깨진 자리에 정확한 크기로 박히는, 슬픔의 오래된 습관.

 

공터에서 먼 창(전문)

슬픔의 오래된 습관이라는 맺음말에 시선이 오래 머문다. 레이어가 한 겹 한 겹 쌓이듯 차곡차곡 슬픔의 이미지가 쌓인다. 슬픔은 역시 엷은 푸른빛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몫의 슬픔이 쌓인다. 한 겹 한 겹 오늘의 몫이 쌓일수록 어둠이, 밤이 찾아온다. 오늘도 그렇게 습관처럼 충실히 하루분의 슬픔을 쌓는구나. 견고하게.

 

어떤 사랑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아직 사랑하고 있으므로…… 그는 죽은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밤이다. 아름다운 밤이다. 중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왔을 때, 거기 내가 살고 있었다. 뻔했다. 영화는 밤에 자는 낮잠 같다.

 

영화는 밤에 자는 낮잠 같다(맺음 부분)

시인은 너의 이름을 읽고 있었다.”라고 했다. 삶도 죽음도 이름을 사이에 두고 줄다리기를 한다. 이름을 읽는 순간만큼은 가 살아있는 것이 아닐까. 재차 묻는다. 나에게 이름은, 호칭은 대체 무엇인지. 부모가 부여하고 내가 부여하는 고유명사 하나가 생과 사를 가로지른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이름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이름을 지우는 것으로 끝나는가. 이름이 있다면 사랑은 지속되는가.

 

죽음이 인생을 엿보려고 사람에게 사랑을 심어놓았다.

첩자로 키워놓았다.

 

나는 신들의 플러그를 다시 꽂는다.

 

내 분노를 전하기 위하여 - 아직 내게 남은 재앙이 있다면

오늘 자정이 가기 전에 보내주기를.

 

내가 쓰러져 꿈꾸기 전에(전문)

신용목은 R이 좋아하는 시인이다. 작년 R의 추천으로 신용목의 산문집을 읽고 나 역시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전 시집을 찾아 읽었다. 닮았다. R과 신용목은. “죽음이 인생을 엿보려고 사람에게 사랑을 심어놓았다.”라는 문장은 꼭 그녀의 스타일이다. 죽음이 인생을 망치려고 사랑을 첩자로 보냈다니, 죽음과 사랑은 꼭 집어 한편인 것이다. 그래서 사랑에 어떤 인생은 살해당할지도 모른다. 시인은 분노했다지만 나는 너무 로맨틱해서 어이가 없다. 어찌됐건 이제 R이 보고 싶을 때는 이 슬픔엔 규격이 없다는 신용목의 문장이 생각날 것이다. 물론, R은 신철규도 소개해 주었으므로, 나날이 우리의 세계는 확장된다 : )

 

신용목의 시는 자극적이지 않다. 심보선 시인이 칼처럼 날카롭고 독처럼 위험해서 매혹적이라면, 신용목 시인은 선하디 선해서 누군가 상처 입을까 피곤하게 주변을 살피는 감동이 있달까. 시를 너무나 사랑해서 시인과는 가까이하고 싶지 않지만, 신용목 시인이라면 꼭 한번 친하게 지내보고 싶다. 요즘 손에 쥐는 시집마다 어메이징, 어메이징 하다. 꽤 좋은 밤이다. 손끝에 피가 돌고 긴장이 풀린다. 건조한 얼굴을 감싸 안는다. 온기 가득한 시에 매달릴 수 있어서 약간 행복해졌다.

 

신용목 시인은 정말로 균형 잡힌, 인상 좋은 미남이다. 꼭 그렇게 잘 생겨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건가요? (진심)

 

이번 시인의 말은 기대에 못 미치게 너무 심심하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아직은 가끔씩 사랑이 나를 소환한다는 것은.”이라는 그의 유명한 시작 노트에 비하면...

 

제 꼬리를 잡지 못해 빙빙 돌다 터뜨리는 울음처럼. 우는 아이의 달리기처첨. ‘잡고 싶음잡을 수 없음으로서의 사랑! 이 얼마나 다행인가. 안하무인 신공안의 검경이 아니라 아직은 가끔씩 사랑이 나를 소환한다는 것은. (신용목의 공터의 달리기시작 노트, 한국대표시인 70-, 사랑에 빠지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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