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아버지가 안면근육을 최대한 이용해서 활짝 웃으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신다.
그리고 뒷굽이 다 닳아버린 허름한 구두를 벗으시면서는, 힘있고 짧게 "아들!" 을 외친다.
약주를 하신 날이다.
"아들! 하이파이브 한 번 하자! 우리 아들!"
부자간의 어색한 손바닥 마주치기가 성사되면 아버지는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거실에 대자로
누워버리고만다.
적어도 3년 간, 변함없는 절차다. 그리고 아들에게 읊조린다.
아들에게 뭐가 그리 미안한지 아버지는 또 미안하단다.
능력없는 애비 만나 미안하단다.
니 능력을 더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못해줘서 미안하단다.
항상 반복되는 아버지의 사과...!
뭐가 그렇게 미안한걸까...
아들이 갓난아기 때 잘 놀아주지도 못한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일까.
아님 남들 다하는 과외 한 번 시켜주지 못한 게 그토록 마음에 걸렸던걸까?...
아들은 가난을 탓했던 적은 있지만 가난한 아버지를 탓한 적은 없었다.
일찍이 아들은 알고 있었다.
어릴 적 아버지와의 기억이 별로 없는 건 그가 당시 불의한 정권과 권력에 반대하여 맞서 싸우느라 가정을 돌 볼 시간이 부족했던 까닭이었고, 아직까지도 어엿한 재산하나 없는 건 결국 그 시대 이데올로기의 피해자가 되어버린 당신의 순수한 열망과 신념 때문이었다는 것을...
2008년, 군 생활 중 휴가를 나온 아들은 아버지와의 술자리에서 대화를 나눈다.
"아들아, 개혁과 혁명의 차이를 알고 있니?"
"비슷한 의미 아닐까요?"
"개혁을 한자로 풀이하면 고칠 개(改) 가죽 혁(革)이다, 여기서 개(改)자를 다시 풀이하면 자기 기, 칠 북이 된다. 가죽으로 자기가 자신을 때리는 고통을 감내하고 이루는 것이 개혁이란다. 그리고 혁명은 목숨 명(命)자를 쓴다... 니가 꿈꾸고 원하는 것에는 큰 희생과 고통이 수반된다...
할 수 있겠니?"
아들은 4살 때,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동네에서 구호를 외치고 다녔다.
"노태우를 처단하자!"
아들은 이미 그때부터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성인이 된 아들은 생각했다.

아버지는 자신과 똑같은 길을 걸어가는 듯한 아들을 보면 항상 걱정이 앞서고
미안해지는 모양이다.
하지만 아들은 그런 아버지 앞에 자신있고 당당하게 말한다.
" 아버지 아들, 생각하시는것보다 훨씬 강합니다.
아버지께서 청춘받친 그 시대를 잊지 않겠습니다.
아버지가 하셨던 모든 것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음을 증명 하겠습니다. " 라고...
아들은 거실바닥에 대자로 누워계신 아버지의 몸을 일으켜
안방으로 부축해 자리에 눕혀드렸다.
방문을 나서는 아들의 뒷모습이 왠지 모르게 쓸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