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의 구조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0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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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론이란 모름지기 ‘다르게 읽기’의 응결체다. 재해석은 고전 텍스트를 까대거나 숭배하는 짓이 아니라 그것들을 '가능성의 중심’에서 다시 읽어 내는 일이다. 그러다 마침내 자신이 씨름했던 사상가들과 함께 그들을 넘어서는 지적 체계를 만들게 되어 버린다. 가라타니 고진(이하 고진) 또한『세계사의 구조』에서 밝혔듯이 “2001년까지는 나는 근본적으로 문학 비평가였고, 마르크스나 칸트를 텍스트로서 [다르게] 읽고 있었다. 바꿔 말해 자신의 의견이 있어도 그것을 텍스트에서 끌어낼 수 있는 의미로서만 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내 의견이 그들과 반(反)하는 점이 적지 않았으며, 또 그들이 생각하지 않은 영역이나 문제가 많았다. 따라서 ‘세계사의 구조’를 생각하는 데 있어 나는 자신의 이론적 체계를 만들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르게 읽기’는 이론을 제작하는 연장에 머물지 아니한다. 탁월한 이론은 기존 이론들을 ‘달리 읽는 방법 그 자체’이며 제 출생의 비밀을 고스란히 자신의 몸에 간직한다. 이를테면, “마르크스의 독특함은 어떤 ‘철학’을 수립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보는 그의 태도에 있고, 또 그것을 일관되게 유지한 데 있다.『자본론』이란 고전경제학 텍스트에 대한 마르크스의 독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그러한 독해방법이야말로 마르크스 ‘사상’이다.”** 이 말은 그대로 고진에게 되돌려 줘야 한다. 고진의 (텍스트) 독해방법이야말로 고진의 ‘사상’이라고. 고쳐 말하면, ‘가능성의 중심에서 읽기’, 그것이 바로 가라타니 고진의 사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능성의 중심에서 읽어낼 것인가?*** 먼저 텍스트 비평에서 자주 범하는 오류를 지적하면서 시작해 보자. 어떤 이론을 비판할 때 그 사상가가 소홀히 다룬 부분을 찾아내 그것을 표적삼아 비난을 퍼붓는 경우가 다반사다. 흔한 예로는 마르크스가 자본에만 집중하느라 국가와 네이션의 문제를 도외시 했다는 평가와 같은 것들. 이런 비판은 너무 지당한 말씀이라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고진도 말했듯이, 마르크스가 상품교환 세계를 해명할 수 있었던 것은 국가와 네이션을 괄호에 넣고서야 가능했다. 즉 마르크스가 상투적으로 비난받는 지점은 그의 사유의 한계가 아니라 오히려 조건이다. 그러니 “그것을 비판할 여유가 있으면, 그 자신이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취했던 방법으로 국가와 네이션을 고찰하면 된다.”(세19) 실제 고진이『세계사의 구조』에서 하고자 한 작업이 바로 이것이다.

 

고진은『세계사의 구조』에서 교환양식을 통해 사회구성체의 역사를 새롭게 보려 하였다. 그러기 위해 그는 기존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들과 차별화된 내용으로 마르크스 사상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게 아니다. 고진은 마르크스로 되돌아가서 ‘마르크스가 헤겔을 비판했던 것을 다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마르크스의 헤겔비판을 다시 한다는 것은 헤겔이 관념론적으로 파악한 근대의 사회구성체 및 거기에 도달한 ‘세계사’를 마르크스가 그랬듯이 유물론적으로 계속 전도시키면서 헤겔이 파악한 자본, 네이션, 국가라는 삼위일체성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세18)**** 여기에 가능성의 중심에서 읽기의 첫 번째 실마리가 있다. 비판 이후의 결과물인 이론의 내용 보다 그 이론을 산출했던 비판 작업 그 자체를 다시 비판하는 것. 그럴 때만이 사상가를 그리고 그의 텍스트를 가능성의 중심에서 읽어내면서 새로운 이론을 창출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라캉과 함께 라캉을 넘어가고자 한다면 라캉이 프로이트를 비판한 것을 다시 비판해야 한다.)

 

더불어, 고진이 현대 철학에서 상갓집 개 취급을 받는 헤겔의『법철학 강의』를 근본적으로 음미하고자 한 것은 헤겔 사유의 세부적인 꼴에 매몰되지 않고 전체적인 틀을 파악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헤겔은 자본=네이션=스테이트를 궁극적인 사회형태로 보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세32) 하지만 고진은 이러한 헤겔의 이론적 한계를 그저 내용에서 비판하지 않고 자본, 네이션, 국가의 삼위일체라는 틀은 수용하되 그것들이 각기 다른 경제적 하부구조, 즉 다른 교환 양식에서 기인한다는 것과 아울러 그것들 사이의 변화 법칙을 밝히고자 했던 것이다.

 

게다가 사상의 꼴이 아닌 틀을 볼 때만이 상이한 영역의 공통 형식을 찾고 이것을 매개로 해석의 지평도 덩달아 열리는 법이다. 예를 들면 마르크스는 가치형태론에서 화폐의 기원이 아니라 화폐형태라는 ‘장소’의 기원을 탐구했는데, 이를 통해 고진은 홉스가『리바이어던』에서 주권자라는 ‘장소’의 출현을 역사적(통시적)으로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보여주려고 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화폐 형태의 장소 때문에 그 자리에 황금이 아닌 다른 무엇이 오든 화폐의 권능을 부여받듯이, “주권자란 왕이든 인민이든 누구를 대입해도 상관이 없는 ‘장소’를 가리키”(세147)는 것이고, 그 자리로 인해서 주권의 힘은 발생하게 된다.

 

요컨대 가능성의 중심에서 읽는다는 것은 ‘비판 그 자체로 되돌아가 다시 비판하기’, 그리고 ‘꼴이 아니라 틀을 보고 그 틀을 새로운 꼴들로 재가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고진의) 이론은 이렇게 태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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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사의 구조』,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옮긴이) | 비(도서출판b) | 2012, 17p. 이하 본문 인용은 세-쪽수로 표기.

 

**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가라타니 고진, 김경원 (옮긴이) | 이산 | 1999, 24p.

 

*** 이 글은 텍스트를 가능성의 중심에서 읽기 위한 원리 두 가지를 밝히는 데 집중한다. 그 외에도 고진은 기존 이론을 다양한 방법으로 다르게 읽고자 하였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 채 대략 몇 가지만 부연하자면, ⓐ 위치나 차례를 ‘거꾸로 뒤바꾸는 것’[전도顚倒] :ex> 재배나 사육은 오히려 정주의 결과다. ⓑ 어떠한 결과(현상이든 구조든 뭐든)를 생성시키는 원인으로서의 항들과 시간축에 따른 그 항들 사이의 변화 법칙 찾기 :ex> 사회구성체는 여러 교환양식들의 복합체. 그러나 어떤 교환양식이 주도 하느냐에 따라 그 외 교환양식의 형태는 변형되어 존속한다. ⓒ 테제와 안티테제 사이의 이율배반 해소하기 : ex> 국가는 공동체의 내부에서 생긴다, ~ 외부에서 생긴다는 국가의 기원을 놓고 벌어지는 안티노미.

 

**** 고진은 마르크스의 헤겔 비판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의 리카도 비판 또한 다시 비판한다. “리카도가 주저『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에서 ‘세’(稅)를 중시하고 있는 데에 반해, 마르크스는 ‘세’를 제거했다. 라카도에게 있어 세는 자본의 수익에서 국가가 징수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세에 근거한 계급(군, 관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세의 문제는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국가를, 또는 군, 관료라는 ‘계급’을 제거한 것이다.”(세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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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국가 북한 - 카리스마 권력은 어떻게 세습되는가
권헌익.정병호 지음 / 창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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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 ‘고령화 가족’이 있다면 북한은 ‘혁명 가족’이 있다.* 국가 전통성을 식민지 역사와 탈식민 서사를 토대로 한 ‘유격대국가’이자 김일성(과 김정일)이라는 정치적 아버지를 둔 ‘가족국가’ 북한에서 그 곳 구성원들은 모두 혁명 가족의 일원이다.『극장국가 북한』은 혁명 가족 가장인 김일성으로부터 김정일에게로 권력 세습이 왜 가능했는지, 개인적 카리스마에서 세습적 카리스마로의 이행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탁월한 연구 성과다. 다시 말해 유격대국가와 가족국가라는 ‘내용’이 김일성 사후에 극장국가(클리퍼드 기어츠)라는 상징 의례를 통해 어떠한 ‘형태’를 부여받아 카리스마 권력의 자연 도태에 저항할 수 있었는가를 탐구하였다. 그러한 결과에 따른 권력 세습은 북한 사회가 김일성이라는 한 명의 아버지에서 김일성, 김정일이라는 ‘두 명의 아버지’를 가지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북한 정치질서는 인류학자 이문웅이 정의했듯이 가족국가다. 수령은 전통 사회에서 가장이 했던 역할을 국가 차원에서 수행한다. “실제로 오늘날 북한의 매체는 ‘어버이 장군님을 높이 모신 우리 인민은 모두가 한식솔이고 내 나라는 어디 가나 친혈육, 화목한 대가정입니다’라고 주장한다.”** 항일 빨치산 활동에 대한 작품을 보더라도 “김정숙과 김일성의 실재하는 가족 관계에 대해 그다지 언급하지 않는 경향이 있고”(극84) 그 대신 “김일성과 친족관계를 맺은 인물들은 대부분 가족을 잃고 갈 길을 잃은 고아 청소년들이며 그들을 통해 더 많은 인민들이 혁명지도자와 친족관계를 맺는 것으로 그려진다.”(극45) 이것은 사적 가족의 아버지를 정치적으로 확장시킨 것이면서 또 한편 원래 아버지의 기원으로의 회귀이기도 하다.***

 

그러한 북한의 가족 정치체제는 ‘충효일심’을 시민윤리로 강조한다. 이 덕목은 충과 효를 엄격히 구분했던 전통적인 한국 유교 정치체제와는 확연히 다르다. “이는 최고 권력에 대한 인민들의 충성에 관한 북한체제의 요구가 효라는 도덕을 끌어들이고 그럼으로써 정치적인 것과 가족 혹은 사적인 것 간의 기존 경계를 흐리고 해체”(극89)한 것. 그렇기에 지도자와 인민들의 관계는 도덕 경제 혹은 전면적 호혜성에 기반하고 있다. 소위 ‘호래자식’이 안 되려면 김일성으로부터 “물질적, 정신적 보살핌의 혜택을 입은 사람들은 그 정치적 가정의 가장에게 깊은 효성과 충성심으로 보답하고, 가장이 죽으면 한 가정의 조상을 추모하는 것처럼 그의 유훈을 잘 따라야 한다.”(극227~228)

 

가족국가 북한의 정서적 유대 구조에서 “가장 가치있고 특별한 인간관계는 개인(각자 고립되고 분리되어 있는)과 최고지도자와의 관계다.”(극128) 프로이트도 말했듯이 집단의 리비도적 결합은 지도자와 구성원 개개인의 관계를 ‘매개로해서’ 파생한 유대감의 결합이다. “집단은 자아 이상을 [지도자라는] 하나의 공통된 대상으로 대치하고, ‘그 결과’ 자아 속에서 자신들을 서로 동일시하게 된 개인들의 집합이다.”**** 프로이트는 이때 구성원 모두에게 ‘평등한 사랑을 똑같이 베푸는’ 우두머리에 대한 환상이 핵심이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아버지를 대신한다...그리스도 앞에서는 만인은 평등하고 만인이 똑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라고, 즉 그리스도가 베푸는 사랑을 통해 형제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집102)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 했듯이 부모의 자식 사랑은 늘 평등한 것으로 표상되며 정치적 아버지 김일성의 사랑 또한 전체 인민들에 대한 차별 없는 사랑으로 여겨진다.

 

김일성 사후 하나의 정치적 아버지는 김정일로의 권력 승계 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을 통해 두 명의 정치적 아버지로 탄생한다. 우선은 북한 문학, 영화, 집단 체조 등을 통해 김정숙이라는 모성 상징과 총대라는 물적 상징을 발명하고 이로써 국가 건국의 기원에 김정일을 자리매김하고자 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기제는 김일성의 자리를 김정일이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두 명의 정치적 아버지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이 1994년 7월 사망할 때까지 맡았던 국가주석 자리를 그만이 유일하게 가질 수 있는 영구주석 지위로 개정했다는 결정문을 고지했다.....북한은 김일성의 역사적 카리스마 권력을 헌법상의 초월적이며 개념상의 초역사적인 권력으로 변모시키는 제도적 혁신을 추진했던 것이다. 이 일을 달성한 뒤에야 비로소 김정일은 사망한 지도자를 대신하여 노동당의 최고위직에 선출되었다. 그 결과는 직무의 계승이 아니었다. 새 국가수반이 된 전 국가수반을 대체했다기보다, 헌법 개정으로 새로운 직책을 만들어 새 지도자와 전 지도자가 각각 물리적 국가수반과 형이상학적 국가수반으로서 함께할 수 있게 된 것이다.”(극장102~104)

 

한 마디로 말해, “김일성의 죽음은, 북한의 공식적인 언어로는 지도자의 육체적 삶의 끝일 뿐 정치적 삶은 계속되는 것으로 표현된다.”(극104) 이러한 논리는 ‘국왕의 두 신체’라는 절대 왕정 시대의 정치 이론과 매우 유사한 형식을 띠고 있다. 이를 요점만 말하면, “국왕은 자신 안에 두 개의 신체를, 즉 자연적 신체와 정치적 신체를 갖는다. 그의 자연적 신체는 소멸할 운명을 지닌 신체이며...그러나 그의 정치적 신체는 보이지도 않으며 만져지지도 않는 신체로서 정치적 사회와 정부로 구성되어 공공선을 관리하고 인민을 지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 이러한 자연적 신체의 죽음은 ‘Demise’(계승)이라고 불렸고, 그런 측면에서 북한의 유훈 통치는 김일성이라는 ‘정치적 신체’가 김정일이라는 ‘자연적 신체’로 전해진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게다가 북한은 김일성의 정치적 신체를 물질화시켜 이를 보다 적극적으로 강화하였다. 가령 김일성의 (사망일이 아니라) 생일을 태양절이자 최고의 국경일로 지정하거나 그의 시신을 방부처리해서 영구 보전하고 수많은 영생탑을 온 나라에 세웠던 것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는 김일성이라는 정치적 신체 혹은 형이상학적 국가수반으로의 변모는 상징적 아버지에서 상상적 아버지로의 이행이라 말할 수 있다. 라캉에게서 상상적 아버지는 이상형--상(像), 이미지(Image)--으로서의 아버지다. 필리프 쥘리앵에 따르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단계가 지나고 초자아가 내면화되는 나이, 즉 다섯 살에서 여섯 살쯤 될 때 어린아이는 실재의 아버지를 상상적 아버지로 덮어씌운다. 이 아버지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다. 그는 (법률을 대표하는 사람이 아니라) 법률을 제정하는 입법자적 지배자이며 종교에서의 신의 형상의 원형이 되는 전능한 보호자이다. 이것은 프로이트『토템과 터부』에 나오는 원초적 아버지다. 아이의 욕망을 법에 종속시키면서 그 자신도 법에 복종해야 하는 상징적 아버지와 이 인물이 구별되는 점은 그 자신은 법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 (두 아버지들 모두 정신의 영역에서 초자아로서 기능한다.)

 

따라서 북한은 ‘김일성-형이상학적 국가수반/정치적 신체/상상적 아버지’와 ‘김정일-물리적 국가수반/자연적 신체/상징적 아버지’라는 두 아버지를 가진 혁명 가족 국가인 것이다. 결국 북한 김정은 체제의 운명도 ‘세 명의 아버지의 자리’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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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명관 소설『고령화 가족』에서 사회로부터 쫓겨난 다 늙은 자식들이 더 늙은 엄마 집으로 내몰린다. 직장도 국가도 또 하나의 가족이기를 포기한 남한에서 그들은 혈육으로 얽혀 붙은 자연적 가족에게로 퇴행/퇴출당한 것. 결국 남과 북은 둘 다 가족주의 국가인 셈인데, 최인훈의 이분법을 빌리면 남쪽은 '밀실 가족(주의)', 북쪽은 '광장 가족(주의)'다.

 

** 『극장국가 북한』, 권헌익/정병호, 창비, 2013년, 35p. 이하 인용은 극-쪽수로 표기.

 

*** “쥘리앵에 따르면, 먼저 아버지는 ‘아이에 대한 권리’를 가진 사람이다. 원래 아버지로 불린 것은 한 여자의 남편이 아니라 지배자, 즉 국가를 이끄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즉 아버지의 일차적인 의미는 ‘정치적․종교적 아버지’였으며, 가족적 의미의 아버지는 그로부터 파생된 개념이다. 말하자면 정치적․종교적 지배자라는 것이 아버지가 갖는 권위의 기원이겠다.”(로쟈, ‘아버지의 역사’, 기획회의-2010. 06. 05)

 

**** “지크문트 프로이트,『문명 속의 불만』, 김석희 (옮긴이) | 열린책들 | 2004” 에 수록된「집단 심리학과 자아 분석」, 129p. 이하 인용은 집-쪽수로 표기.

 

***** 『절대왕정의 탄생』, 임승휘, 살림, 2007년, 30p,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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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재발견 - 민주주의를 둘러싼 싸움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민주주의 강의
박상훈 지음 / 후마니타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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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던 연인과 헤어졌을 때 대개 사람들은 마치 ‘여우의 신포도 우화’처럼 상대방을 깎아 내린다. 더불어 상처 난 맘을 다른 이에게 위로받고 나만의 진짜 인연을 다시 꿈꾼다. 가령 실연당한 날, 친구에게 “그(녀)는 내 영혼의 동반자가 아니었나 봐” 하소연하며 “진정한 짝을 찾을 거야”는 희망의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20여년, 우리는 정치로부터 실연당했다. 독재 정권을 몰아내고 직접 대통령을 뽑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게 만사형통일 줄 알았는데 사는 게 점점 더 어렵기만 하다. 정규직인 것만으로도 사회 특권층이 될 만치 계약직이 고용 형태의 보통명사가 되었다. 빚 독촉을 피할 길은 자살 밖에 없는 사람들로 세상은 넘쳐난다. 이제 정치, 특히 민주주의는 날 버린 애인처럼 냉소의 대상이 되었고 배제된 자들은 ‘힐링 문화 상품’을 통해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소위 강단 좌파들이 최신 정치 철학을 소비하면서 진짜 정치를 찾는다고 분주하다.

 

박상훈은 <민주주의의 재발견>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때 이른 ‘냉소’와 진짜 민주주의를 찾는 ‘환상’을 비켜가며 우리가 그 동안 경험했고 또한 겪고 있는 민주주의 위에서 더 현실적이고 더 나은 대안을 찾고자 한다. 그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기존의 잘못된 관점과 시각을 비판적으로 다루면서”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인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는 데서 출발한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민주주의만이 참된 민주주의라는 게 아니다. 원래 민주주의는 제 각각이었으며 언제나 민주주의‘들’로 존재해 왔다. 문제는 이제까지의 논의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실천을 풍부하게 하는 데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민주 정치를 개선하려면 민주주의를 제대로 된 논의의 장으로 끌어오는 게 먼저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재발견>은 ‘민주주의에 대한 논쟁의 장을 재발견’하기 위해서 쓰여졌다.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의 이론에 기대어 박상훈은 무엇보다 ‘갈등’을 민주주의의 엔진이자 존재 이유로 여긴다. 지역, 소득, 성, 고용 형태 등 각자 다른 사회적 차이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공적 의제에 대한 이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집단적 사회 갈등 때문에 불러들여진 정치체제다. 이 때 정당은 갈등의 범위를 확대하고 사회화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개인이나 다른 조직 형태가 아니라 그는 왜 굳이 정당을 강조하는가? “우선 사적 이익집단이든 공익적 시민운동이든 이들 사회집단이 동원할 수 있는 사회 갈등의 범위는 그리 넓지 않기 때문이다.....갈등의 범위를 확대하자니 기존의 참여자가 줄고, 이들의 참여를 유지하자니 갈등의 범위를 축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또 다른 이유는 “실제로 공익적 목표를 지향하는 집단(우리는 이를 시민운동이라고 부른다)을 사례로 봐도 그 구성원들의 다수는 중산층 이상의 계층적 배경을 가질 수밖에 없”기에 사회 하층은 정치적으로 소외되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저발전은 정당을 매개로 ‘갈등을 사회화하는 데 무능했던 것’에서 초래된 결과다. 즉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갈등의 분포와 정치 영역에 존재하는 갈등 분포가 어긋나 있는 것. 특히 한국의 정치는 가장 중요한 생산 집단이자 사회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의 이해와 권리를 철저히 배제해왔던 보수 독점적 정당 체제였다. 심지어 “기대했던 김대중, 노무현 정부 하에서 비정규직은 최대로 늘었고, 소득 분배는 지속적으로 악화되었으며 사회 하층의 빈곤화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따라서 저자는 “노동문제를 민주주의의 문제로 다루는 실력만큼 정치가가 갖춰야 할 소양으로서 중요한 것은 없다”고 강조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보수 독점적 정당체제를 재편하고 민주 정치를 갱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안적인 정치 세력의 성장이 시급하다. 이를 위해 박상훈은 촛불 집회 당시 풍미했던 민주주의관을 비롯해 민주당, 안철수, 진보 세력들이 그 동안 민주주의를 어떻게 잘못 이해해왔으며 정치적으로 무능했는지를 비판적으로 따져 묻고 있는 것이다.

 

우선 저자는 “촛불 집회를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거부로 해석하거나 대의 민주주의를 나쁜 민주주의의 유형으로 이해하면서 그 대안으로 직접민주주의를 내세우는 해석”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한다. 촛불 집회는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가 갖게 된 악순환 구조를 드러내는 것으로 집합적 열망의 분출 이후 그 에너지가 소진되면 다시 정치의 정체와 퇴행이 반복되어온 패턴을 그리고 있다. 따라서 촛불 집회는 보수 독점적 정당 체제의 다른 얼굴이기에 현재와 같은 정당 체제를 그대로 둔 채 운동의 지속만 강조하면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한다는 것이다. “운동이 강조된다는 것은 그만큼 현실에서 정당과 정당체제가 나쁘다는 것을 말해 주는 지표는 되겠지만, 운동이 정치제체를 대신할 수는 없으며” 그것을 개선시키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의 민주주의라고도 불리는 “현대 민주주의는 사회의 여러 ‘부분 이익’을 대표하는 후보와 정당들의 경합 체제다.” 그러나 그간 민주당은 국민 전체를 대표하고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줘야 한다는 미명 아래 ‘정치 시장’에 상장된 기업마냥 활동해 왔다. 이를테면 여론 조사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당원인 적도 없었던 전문가를 인지도만으로 영입해 공천을 주었다. 그로 인해 “당원은 소외되고 시민은 소비자가 되고 권력은 여론 동원 능력을 가진 사람이 지배하는 정치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정치는 시장에서의 결정과는 다르다. 정당은 유권자 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정치적 열망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시민의 선호를 공적 논의를 거치면서 집합적으로 ‘형성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 지금처럼 시민 생활의 현장을 무시하고 정치 마케터들이 짜주는 ‘프레임’과 ‘포지셔닝’에만 의존한다면 민주당은 호남이라는 지역 대표성 말고는 누구도 대표하지 못할 것이다.

 

‘반(反)정치에 의한 정치 현상’이랄 수 있는 안철수 또한 민주당처럼 국민을 앞세우면서 실제로는 아무도 대표하지 않기는 매 한가지다. 특히 정치에서의 싸움 자체를 죄악시하는 그의 태도는 파당적 경쟁 위에서 작동하는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꼴이다. 국회의원 정원 축소, 정당 국고보조금 축소/폐지, 당론 폐지 및 국회의원 소신 투표, 정당 공천권 폐지 등의 안철수식 정치 쇄신안은 민주주의에 대한 완벽한 오해를 드러내는 지점이다. 앞서 말했듯이 정치는 고객 감동의 행정 서비스가 아닐 뿐더러 ‘정치를 줄이자’에 가장 환호할 세력은 경제 권력과 관료들이다. “전경련 내지 재벌 연구소가 내놓은 정치 개혁안을 관통하는 것은 늘 정치의 역할을 줄이라는 것이었”고 “정당과 국회 때문에 일을 못하겠다는 관료”들이었다. 자신을 견제할 정치권력의 힘이 약화될수록 그들은 더 많은 기득권을 쌓아 갈 테니 안철수야말로 그들의 가장 든든한 우군인 셈이다.

 

민주당과 안철수가 국민 전체를 대표한다며 결국 아무도 대표하지 않는다면 운동권이라 불리는 우리 사회의 진보(파)는 ‘자신의 진정성’을 대표하느라 정치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 했다. 정치적 이성에 대한 경시가 그들을 정치적 대안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혁명과 운동의 논리로는 권력 문제를 원활히 다룰 수 없으며 “민주주의는 의도의 진정성에 있는 것도, 추구하는 목표나 지향하는 내용의 고결함에 있는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서로의 진정성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 공존하는 것에서 시작되고, 그런 이견과 차이 속에서 구속력 있는 공적 결정을 도출하는 평화적 원칙을 말한다.” 진보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샛길을 개척하지 못 한다면 그들의 진정성은 오히려 전체주의의 교두보가 되고 말 것이다.

 

<민주주의의 재발견>의 저자 박상훈에게 민주주의의 핵심 문제가 ‘누가 누구를 어떻게 대표해야 갈등을 사회화시킬 수 있는가’이고 그 답을 꼭 한 마디로 하자면 ‘정당 체계가 (대다수 평범한 보통 사람들인)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다. 하지만 “정당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시민운동이나 마을 차원의 공동체를 만드는 일의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이 없”듯이 저자 또한 정당을 한국 사회의 병폐를 치유할 유일무이한 수단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다만 “좋은 정당 없이는 좋은 민주주의는 없”으며 “그 기초 위에서 다양한 시민 참여의 실험과 제도를 창조적으로 모색하고 보완해 가자는 관점에서 접근”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재발견>은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와 ‘환상’ 사이를 가로지르는 좁은 길을 걸으면서 한국 정치를 바꿔나갈 더 현실적이면서 더 나은 대안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실천의 실마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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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인문학
김담 지음 / 글항아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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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제는 세대별로 달리 체감할 테지만 ‘고향’이라는 말에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을 엄마의 젖가슴 냄새가 난다. 그리고 고향은 노후를 보낼 전원생활의 전망 속에서 각박한 밥벌이를 버텨내게 하는 사적 유토피아로 환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근대 산업화의 파장을 비켜갈 수 있는 안전지대는 어디에도 없으며 우리가 추억하거나 꿈꾸는 그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2007년부터 얼추 5년간의 개인 기록인 김담의『숲의 인문학』에서 엿볼 수 있는 (고향 아닌) 고향에서의 생활이 아무나와 겹쳐질 수 있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실향민의 운명을 함께하기 때문이다.

 

김담이 책날개 자기소개에 밝혔듯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 부모를 따라 1994년 귀향한 그 곳, 강원도 고성은 고향이었지만 이미 고향은 아니었다. 시인 신경림이「罷場」에서 노래했던,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 없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풍경은 인류의 종말을 예언한 한 편의 묵시록을 닮았다.

 

“물길을 돌려 콘크리트를 바르고 당산목을 버려두어 말라죽게 하고, 산맥을 허투루 잘라내서 도로를 만드는 거기에”서(246) “우리에서 길러지는 가축들은 이제 살과 살이 맞닿는 즐거움 없이 오로지 번식을 위하여 인간에 의해 수정당했다.”(251) “벼농사를 짓던 수만 평 논이 어느 날 문득 옥수수 밭으로 바뀌었다. 둘레엔 전기울타리가 세워지고, 벼농사 지을 때까지 멀쩡하게 살아 있던 어린 소나무들은 제초제를 쳐서 죄다 죽여놓았다.”(300) “올해도 벌들은 꿀을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아까시나무 가까이 서면 겨우 서너 마리 벌이 윙윙거리며 꿀을 모으고 있었으니 어쩌면 벌 떼 같다는 말은 이제 고쳐져야 할런지도 모를 일이다.”(295)

 

자연 뿐만 아니라 사람 풍경 또한 척박하기는 매 한가지다. 농약, 화학비료 없으면 농사를 짓지 못할 것이라 믿는 농부들은 “대지가 병들고, 아니 당장 내 살이 썩어 들어가고 있어도 모른 체했다. 이제는 아무도 마을 개천에서 목간하고 세수하지 않으면서도 별스럽게 여기지 않았다.”(183) “농사를 지어도 이웃과 무엇을 나눠 먹는 일은 점점 흔치 않은 일이 되어갔다....때로는 버스 삯 들여 시장에 내가면 남는 것이 있을까 싶었지만, 백 원도 귀하고 천 원도 소중했다.”(226) 심지어 “구제역이 비껴나면 소 값이 오르지 않을까 내심 맘이 달뜨는 사람도 없지 않았으니” 다시 찾은 고향은 “참 무섭고 징그러운 세상이었다.”(245)

 

 

2. 앞서 김담이라는 한 개인의 생활사를 다룬『숲의 인문학』이 가진 보편성을 ‘고향 잃은 자의 공동 운명’에서 찾았다면 그가 쓴 산문의 미적 성취는 고향땅에서(야) 방외인으로 사는 이가 제 뿌리를 내리고픈 터를 자음과 모음으로 ‘지나치게’ 섬세하게 그려내는 그 방식에 깃들어 있다. 김담 산문의 주된 묘사 대상이자 되찾을 길 없는 고향을 대체할 그 장소란 두말없이 ‘숲정이’다. 그 곳은 살아 있는 것을 살게 한다. 숲정이에서 ‘어머니 대지’는 은유가 아니라 현실이다. 어디를 가도 나물이며 약초가 흔한 “봄날 숲정이에만 들 수 있으면 아무리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굶어 죽는 일은 없을”(285)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웃에 사는 사촌 동생에게는 일터일 뿐인 숲은 김담에게는 “좀 다른 곳이었다. 숲은 어떤 기원이면서 또한 풍경이었으나 절체절명의 무엇은 아닌 또 다른 의미를 가진 장소였다.”(291)

 

숲은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장소인가? 고향에 돌아왔으면서도 한 번도 태를 묻은 곳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느끼지 못하는, 때로는 도시에 있는 텅 빈 극장에서 영화를 구경할 때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곤 한다는 김담이지만, 제 고향의 “숲속에 들면 숲 밖은 이미 세속처럼 아마득해지곤 했다. 어디에도 없는 편편한 숲 바닥에 앉아 있는 일은 꿈결처럼 후눅했다.”(290) 그에게 숲 속은 숲 바깥, 즉 세속의 고향 ‘안에 있으면서 그 너머 있는’ 고향이다. 여기서 숲은 ‘진정한’ 고향 따위가 아니다. 숲은 일종의 대리 표상이다. 억압된 것의 회귀로서의 고향은 숲이라는 대상을 통해서야 대리 표상될 수 있는 것.

 

그렇다면 상실된 고향은 숲의 무엇을 매개로 대리 표상되는가? 무엇보다 숲은 ‘뿌리들’의 장소다. 실제로 “숲 가꾸기를 한 숲정이는 덩굴식물들은 모두 베어 없앴지만 ‘뿌리까지는’ 어쩌지 못했던 까닭에 남은 밑동에서 자란 줄기들은 다급하게 키를 키웠다.‘(284) “짐승이 잘라 먹은 삼지구엽초 줄기에서는 다시 이파리가 돋지 않았으나 바로 옆에서 새로운 줄기가 돋아났”수 있는 이유도 그것이 “뿌리번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지구엽초는 늘 떼판을 이루었”고 “씨앗이 멀리가지 않는, 예를 들면 더덕과 도라지 같은 식물들도 마찬가지였다.”(294) 뿌리가 죽지 않은 곳, 거기가 바로 고향이다.

 

물론 숲도 인간의 파괴로부터 자유로울 수만은 없다. 하지만 뿌리들의 장소인 숲은 그 자신도 종속된 ‘우주의 섭리’(logos)를 무심하게 고집한다. 숲에서는 “다시 시작된 솎아베기 톱날 소리에 산개구리들 울음소리는 가뭇없이 사라지”지만 “그 자리엔 현호색 무리들 활짝 피어”(267)나고, “덤프트럭들 먼지 흩날리던 비탈길은 어젯밤처럼 잠잠해지고, 흙 팔아먹고 빈 터로 남은 곳엔 난데없이 고들빼기가 지천”(264)일 수 있다. 자본의 운동이나 국가의 폭력, 그 “무엇으로도 어찌해볼 수 없는 봄이 그처럼 활활 산불처럼 타오르”(266)는 숲은 징그러운 세상을 징그러운 생명력으로 맞선다.

 

 

3. 그런데 김담은 그 숲을 그저 거닐지 못하고 왜 굳이 400페이지 넘는 책으로 묶일 만큼 글을 써대고 또 수천 장의 사진으로까지 남겨야 했을까? 더구나 원체 풍경이야 분석의 대상은 아니지만은 한글을 총동원하다시피 하여 그토록 세밀하게 ‘묘사’해야만 했을까? 어쩌면 단지 ‘글 쓰고 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 그랬을 뿐이다’는 게 정답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 심심해서 한참 민망한 답이다. 어쩌면 ‘그에게 숲은 오직 표상에서야 완전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고 김담이 숲정이와 숲 속 동식물들을 스피노자가 비판했듯이 인간이 휘두르는 ‘목적인(目的因)의 폭력’으로 재단했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데, 가령 “도감에는....모두 식용이라고 표시되어 있지만, 우리 집/마을에서는 먹지 않는 ‘잡버섯/똥버섯’들은” 그의 글에서만큼은 “접시만 한 흰가시광대버섯, 누런 호박색을 띠는 껄껄이그물버섯”(426)으로 제 고유한 이름을 부여 받는다. 그 이름마저도 버섯들이 원해서 갖게 된 것이 아니고 순전히 인간의 관점에서 떠안긴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송이버섯도 멧토끼도 될 수 없는, 언어라는 ‘존재의 집’을 통해서만 세계를 만날 수 있는 인간이 가진 한계인 것을. 그렇다고 이름이 가진 힘을 간단히 무시할 수는 없을 노릇이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인간이 저지른 대량 학살은 반드시 개개인의 이름을 지우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지 않는가. 마당의 풀들을 잔디 깎기로 밀어버리기는 쉬워도, ‘달개비꽃, 이삭여뀌, 조뱅이, 물봉선, 개미취, 네귀쓴풀, 홑왕원추리, 중나리, 으아리, 얼레지’의 모가지를 함부로 꺾기는 어렵다. 이것도 언어를 가진 인간의 (한계이자) 조건이다.

 

그렇게 김담의 호명에 터 해서 ‘존재 망각’에서 벗어난 숲정이는 그의 글 속에서 생경하지만 아름다운 우리말로 융단폭격을 당하듯 다채롭게 묘사된다. 삐딱한 눈으로 그의 글을 훑어볼 누군가는 ‘건빵 봉지에 건빵보다 별사탕이 더 많다’고 투덜거릴 련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의 산문은 왜 그토록 과도하게 보일정도로 묘사에 집중하는가? 그 실마리 하나를 풀자면 숲은 그에게 과학적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묘사하여서 근근이 온전할 수 있는 장소인 까닭이다. 이를테면 “무슨 일로 벚꽃이 필 무렵이면 바람은 매몰차도록 불어대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273) 바람이 왜 부는지 그 원인을 설명하는 게 가능하여도 ‘왜 하필’ 벚꽃이 필 바로 그 무렵이면 바람이 매몰찬지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을 테니깐.

 

그 대신 만물의 존재 ‘양태’(modus)는 의성어와 의태어에 기대서야 현전(現前)한다. 여우비는 ‘졸금졸금’ 내리고 비꽃은 ‘후드득’ 떨어지며 계루는 ‘차란차란’하고 술 익는 소리는 ‘부걱부걱’ 들리며 콤바인 소리는 ‘걸걸’할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사람일 뿐인 김담은 귀룽나무 “저도 나도 귀신 형용이 되어 한바탕 춤추며 놀아도 좋을 것이겠지만 당장은 숲정이 이곳저곳에 ‘구름나무’로 서 있는 나무를 먼발치서 바라보는 것으로 그 아쉬움을 달래야”(274)한다. 그 존재하는 것들 사이의 절벽 같은 틈을 메우는 게 스피노자의 신(능산적 자연)이 아니라면 그것은 애오라지 김담의 산문 속 ‘직유와 은유’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찔레 싹은 ‘참새 혓바닥만큼’ 돋고 봄바람은 ‘첩의 죽은 귀신’이고 더넘바람은 풍경을 건드리며 ‘그네를 탄다’. 꽃들은 ‘불난 강변에 덴 소 날 뛰듯’ 일제히 피어나고 겨울에 널어 논 이불은 ‘황태처럼’ 녹았다 얼었다 하며 말라가는 것이다.

 

 

4. 김담의『숲의 인문학』은 고향에 도착하자 고향을 빼앗긴 이가 숲정이를 거닐면서 다시 찾아낸 고향을 자음과 모음을 풀어 그려놓은 세밀화(細密畵)다. 애초에 숲은 그에게는 표상에서야 완전한 장소이기에 거기 있는 것들은 고유의 이름으로 호명되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틈은 의성어와 의태어를 통해 혼융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표상들은 그의 발바닥에서 싹튼 것이라 삼지구엽초처럼 숲정이와 더불어 삶 속에 단단히 뿌리박혀 있다. 한편 그것은 “털어낼 것과 보전할 것을 가든하게 정리한” 자의 눈에만 보이는 상처 속의 풍경인데, 그의 산문은 다만 “그다음에 생긴 어떤 나머지일 것이다.”(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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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 관한 세 편의 해석 을유세계사상고전
지크문트 프로이트 지음, 오현숙 옮김 / 을유문화사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성에 관한 세 편의 해석』, 지크문트 프로이트, 오현숙 (옮긴이) | 을유문화사 | 2007년” 부분의 번역을 아래와 같이 수정합니다. 읽다가 문맥이 통하지 않는 부분만을 선별하여, 주로 영어본(간간히 독어본)과 다른 한글 번역본 등을 참고하여 고친 것입니다. 간혹 오역은 아니더라도 의미 전달이 명확치 못한 부분은 읽기 좋게 손을 보기도 했습니다. ‘열린 책들’에서 나온 “성욕에 대한 세 편의 에세이”는 도저히 무슨 소리인지 모를 정도로 번역이 엉망이라서, 지금으로서는 위의 책을 고쳐서 읽는 게 차선입니다. 그러나 이 책도 부족한 부분을 개선하여 개정판이 나왔으면 합니다.

==========

46p 밑에서 3번 째줄 부터 65p 8번째 줄까지 나오는 ‘성도착자’, ‘성 도착’은 ‘성 대상 도착자’, ‘성 대상 도착’으로 고쳐 이해하는 것이 좋다. 프로이트는 성 대상 도착을 다룬 부분에서는 도착을 ‘Inversion’으로, 성 목표 도착을 다룬 부분에서는 ‘Perversion’으로 구별해서 쓰고 있다.

 

47p 밑에서 8번째 줄 : 정상적인 성적 대상에 대한 접근과 모방이 불가능한 경우 --> 정상적인 성적 대상이나 대체물을 쉽게 얻을 수 없는 경우

 

49p 11번째 줄 : 성 대상 도착의 모든 중간 단계들도 --> 성 대상 도착의 모든 유형들의 중간 단계도

 

49p 밑에서 8, 3번째 줄 : ‘변태’[變態]는 (영) degeneracy, (독) Degeneration 을 번역한 것이다. 국어사전에는 ‘1. 본래의 형태가 변하여 달라짐. 또는 그런 상태. 2 . 정상이 아닌 상태로 달라짐. 또는 그 상태.’라고 뜻풀이 되어 있다. 78p에서는 동일한 단어를 ‘변질’로 번역해 놓았다.(위 변태를 일상적인 쓰임대로, ‘성적으로 비정상적인 똘아이’쯤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53p 2번째 줄 : 성 대상 도착의 발생에 대한 안전성에 대해 충분히 논의할 수 있다 --> 성 대상 도착의 존재 자체까지도 의심할 수 있다.

 

53p 7번째 줄 : (허브록 엘리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 (허브록 엘리스)에서 [선천적 성 대상 도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63p [결론] 부분(7~17번째 줄)에 나오는 ‘성 목표’, ‘목표’는 모두 ‘성 대상’, ‘대상’으로 고칠 것.

 

65p 12번 각주 2번째 줄 : 성 목표 --> 성 대상

 

65p 밑에서 3번째 줄부터 91쪽까지 나오는 ‘도착’은 (독) Perversion 의 번역인데, ‘성 목표 도착’으로 고쳐서 이해하는 게 좋다.

 

66p 밑에서 9번째 줄 : 성 목표의 과대평가 ---> 성 대상의 과대평가

 

69p 밑에서 5~4번째 줄 : 알기 전까지 미루기로 하겠다 --> 알게 되기 전까지 미루어왔다.

 

75p 밑에서 1번 째 줄 : 사디즘의 --> 마조히즘의

 

78p 7번째 줄 : ‘변질의 징후’은 (영) indications of degeneracy, (독) Degenerationszeichens 의 번역어임. 참고로 할 것.

 

86p 밑에서 5번째 줄 : 충동이란 신체와 정신을 구분짓는 개념 중 하나이다 --> 충동이란 신체와 정신의 경계에 있는 개념 중 하나다.

 

93p 밑에서 4~1번째 줄 : 추측을 통해~ 아동기 보다 말이다. --> 그 개인의 조상들의 삶으로 구성된 원시 시대에 더욱 주목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한 개인의 생에 포함되어 있는 유아기보다 유전이 [성인의 속성과 반응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96p 밑에서 2번째 줄 : 이미 기억의 흔적 속에 --> 기억의 흔적 속에 이미

 

97p 큰 제목 : 유아의 성 잠복기와 그것의 발현 --> 유아의 성 잠복기와 그것의 파열

: 내가 ‘파열’로 수정한 독어는 ‘Durchbrüuche’이고 영어본은 이 단어를 ‘Interruption’로 번역하고 영어본을 옮긴 다른 한글본들은 중단 혹은 소멸로 옮기고 있다. 하지만 중단, 소멸은 원문의 뉘앙스를 살리지 못 한다. 묶여서 잠복되어 있던 어떤 부분이 ‘뚫려서 열린다’는 의미를 전달하려면 ‘파열’로 번역하는 게 적합할 듯하다.

 

97p 각주 4번 : 거대한 피라미드의 정상으로 기제(Gizeh)에 의해 운반될 때 --> 기자(Gizeh)에 있는 거대한 피라미드 정상에 올라갈 때 ※ 기자(Gizeh) : 이집트 Cairo 부근의 항구 도시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로 유명한 곳.

 

100p 4번째 줄 : 항 흥분 --> 반응 흥분[혹은 반동 흥분]

 

100p 작은 제목 : 잠복기의 발현 --> 잠복기의 파열

 

100p 12~13번째 줄 : 그것을 통해 --> 삭제할 것

 

101p 밑에서 3번째 줄 : 성적 본능 --> 성적인 성질(Natur / nature)

 

101p 밑에서 1번째 줄 : 변태현상 --> 나쁜 버릇(Unarten / naughtiness)

 

103p 밑에서 4번째 줄 : 두 번째 성감대 --> 두 번째 성감대[제 자신의 피부 부위]

 

107p 밑에서 9~8번째 줄 : 아이의 성 충동이 ~ 발생할 수 있고 --> 어떤 하나의 성감대

에서 생겨나는 충동의 성질을 이해하면

 

107p 밑에서 3번째 줄 : 항문은 ~ --> <항문 영역의 활동> 항문은 ~

: ‘Betäigung der Afterzone’라는 소제목이 누락되어 있어 추가함.

 

111p, 16번 각주 : 전 유아적 성애에서 -->유아적 성애 전체에서

 

113p 11번째 줄 : 명명되는 --> 삭제할 것.

 

113p 12번째 줄 : 여인들에겐 --> 여인들이나

 

113p 밑에서 3~2번째 줄 : 유아의 성생활도 어떤 경우는 성감대의 지배가 우세하며 -->

성감대의 지배가 우세한 유아의 성생활도 어떤 경우에는

 

120p 9~10번째 줄 : 유아의 성을 탐구하는 사람으로서의 노력 --> 성을 탐구하는 사람으

로서의 유아의 노력

 

121p 6~7번째 줄 : 성 체제의 단계는 ~ 알아차리지 못한다 --> 성 체제의 단계들은 ~ 드

러내지 않는다.

 

121p 밑에서 8번째 줄 : 되지 않는다 --> 되지 않으며

 

121p 밑에서 8~5번째 줄 : 성 목표는 ~ 역할을 하게 된다 --> 성 목표는 대상과의 합체

[동화]이며, 이것의 원형은 이후에 ‘동일시’(Identifizierung)[라는 방식으로] 심리적 영역에

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21p 밑에서 5~ 2번째 줄 : 병리학을 통해서 ~ 포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병리학을

통해 우리의 관심을 끌게 된 이 [성] 체제를 구성하는 단계의 잔재는 빨기인데, 이것은 음

식물 섭취 활동으로부터 분리된 성 활동이 외부 대상을 자신의 신체에 있는 대상으로 대체

한 것이다.

 

124p 밑에서 9번째 줄 : 대상 선택을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게 된다. --> [유아기의] 대상

선택을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게 된다.

 

131p 4번 째 줄 : 주의 산만을 가져오리라는 --> 주의를 [딴 데로] 돌릴 가능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리라는(influence the possibility of directing the attention)

 

134p 4, 5번째 줄 : 부드러운 --> 애정어린

 

135p 5번째 줄 : 제공하고 --> 제공할 수 있게 되고

 

135p 밑에서 8~6번째 줄 : 다양한 신체적 징후로는 무엇보다 의심할 수 없는 의미, 즉 성

행위의 준비와 준비 완료의 의미를 나타내는 성기에 있어서의 일련의 변화를 들 수 있다

--> 신체적 징후는 다양하지만, 특히 현저한 것은 성 행위의 준비와 준비 완료를 나타내는

성기에 있어서의 일련의 변화이다.

 

136p 2번째 줄 : 다르다는 것이다. --> 다르다.

 

136p 5번째 줄 : 내포되 있다. --> 내포되어 있다.

 

137p 밑에서 2번째 줄 : 선 쾌감 --> 선先 쾌감 (혹은 사전事前 쾌감)(Vorlust /

Fore-Pleasure)

 

137p 밑에서 2번째 줄 : 성감대의 역할은 분명하다. 그때도 성감대에 ~ --> 그러나 그 경

우에도 성감대의 역할은 분명하다. 어떤 성감대에 ~

 

139p 1~2번째 줄 : 그러나 선 쾌감과 ~ 더욱 강조될 수 있다. --> 그러나 선 쾌감과 유

아적 성 생활의 관련성은 그것이 병인적(病因的) 역할로 작용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140p 5~6번째 줄 : 유아적 성 생활은 ~ 또한 결정한다. --> 유아적 성 생활은, 정상적 성

생활로부터의 이탈뿐만 아니라, 정상적 성 생활을 구성하는 것 또한 결정한다.

 

141p 밑에서 4번째 줄 : 이와 병행해서 --> 따라서

 

142p 밑에서 9~8번째 줄 : 그렇지만 그의 가설에서 ~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 그럼

에도 불구하고, 이 이론이 그러한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142p 밑에서 7번째 줄 : 요인 --> 요인으로

 

143p 밑에서 4번째 줄 : 지금도 --> [그렇지만]

 

144p 5~6번째 줄 : 성 흥분은 ~ 생성된다는 것과 --> 성 흥분은 미리 부하되어 대기 중

인 중추 장치에 성감대의 자극이 주어지면 [그 중추 장치에서] 생성된다는 것과

146 밑에서 1번째 줄 : 대한 --> 대해서만

 

150p 5~ 6번째 줄 : 심리적인 ~ 원인이다. --> 심리적인 즉, 억압에 의해 조건화된 원인

이 작용한 것이다.

 

151p 1~2번째 줄 : 이제 성 대상은 보통 ‘자기 성애적이다. 그리고 --> 그 뒤로 성 충동

은 보통 ‘자기 성애’적으로 되지만

 

151p 9번째 줄 : 모든 잠복기를 --> 잠복기 전체를

 

151p 11번째 줄 : 영아와 유모라는 관계 --> 젖 먹이는 관계

 

151p 6~5번째 줄 : 이 동질성 ~ 확인시켜준다. --> 이 두 가지가 동일하다는 것은 그 어

떤 의심의 여지없이 확인된다.

 

164p 밑에서 7번째 줄 : 발달의 장애 --> 분리라는 것이(inhibitions)

 

165p 3번째 줄 : 변칙적 --> 예외적인

 

169p 9번째 줄 : 마지막 사례 --> 마지막 반향(the last echo)

 

173p 밑에서 8번째 줄 : 정의로 인한 것 --> 확정적인 것

 

174p 13~14번째 줄 : 이와 같이 체험, ~ 않을 경우 --> 이처럼 성적 조숙이 단독으로 나

타나지 않을 경우[즉 지적 조숙을 수반할 경우]

 

176p 밑에서 8번째 줄 : 성적으로 자유로운 --> 성적으로 자유로운[‘성으로부터 면제되어

있다고 간주되는’ 혹은 ‘성기적 성 체제에 묶여 있지 않은’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듯

하다. 영어본은 주로 전자로 해석함.](sexualfr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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