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의 미래 - 세계 출판의 최전선에서 배우는 미래 출판 전략
장은수 지음 / 오르트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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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 출판인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 출판 현장에서 얻은 저자의 오랜 경험과 고민이 문장마다 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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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특별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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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기원- 난쟁이 인류 호빗에서 네안데르탈인까지 22가지 재미있는 인류 이야기
이상희.윤신영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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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가 들려준 이야기- 인류학 박사 진주현의
진주현 지음 / 푸른숲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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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유인원- 영장류를 통해 바라본 이기적이고 이타적인 인간의 초상
프란스 드 발 지음, 이충호 옮김 / 김영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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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구조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0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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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이란 모름지기 ‘다르게 읽기’의 응결체다. 재해석은 고전 텍스트를 까대거나 숭배하는 짓이 아니라 그것들을 '가능성의 중심’에서 다시 읽어 내는 일이다. 그러다 마침내 자신이 씨름했던 사상가들과 함께 그들을 넘어서는 지적 체계를 만들게 되어 버린다. 가라타니 고진(이하 고진) 또한『세계사의 구조』에서 밝혔듯이 “2001년까지는 나는 근본적으로 문학 비평가였고, 마르크스나 칸트를 텍스트로서 [다르게] 읽고 있었다. 바꿔 말해 자신의 의견이 있어도 그것을 텍스트에서 끌어낼 수 있는 의미로서만 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내 의견이 그들과 반(反)하는 점이 적지 않았으며, 또 그들이 생각하지 않은 영역이나 문제가 많았다. 따라서 ‘세계사의 구조’를 생각하는 데 있어 나는 자신의 이론적 체계를 만들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르게 읽기’는 이론을 제작하는 연장에 머물지 아니한다. 탁월한 이론은 기존 이론들을 ‘달리 읽는 방법 그 자체’이며 제 출생의 비밀을 고스란히 자신의 몸에 간직한다. 이를테면, “마르크스의 독특함은 어떤 ‘철학’을 수립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보는 그의 태도에 있고, 또 그것을 일관되게 유지한 데 있다.『자본론』이란 고전경제학 텍스트에 대한 마르크스의 독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그러한 독해방법이야말로 마르크스 ‘사상’이다.”** 이 말은 그대로 고진에게 되돌려 줘야 한다. 고진의 (텍스트) 독해방법이야말로 고진의 ‘사상’이라고. 고쳐 말하면, ‘가능성의 중심에서 읽기’, 그것이 바로 가라타니 고진의 사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능성의 중심에서 읽어낼 것인가?*** 먼저 텍스트 비평에서 자주 범하는 오류를 지적하면서 시작해 보자. 어떤 이론을 비판할 때 그 사상가가 소홀히 다룬 부분을 찾아내 그것을 표적삼아 비난을 퍼붓는 경우가 다반사다. 흔한 예로는 마르크스가 자본에만 집중하느라 국가와 네이션의 문제를 도외시 했다는 평가와 같은 것들. 이런 비판은 너무 지당한 말씀이라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고진도 말했듯이, 마르크스가 상품교환 세계를 해명할 수 있었던 것은 국가와 네이션을 괄호에 넣고서야 가능했다. 즉 마르크스가 상투적으로 비난받는 지점은 그의 사유의 한계가 아니라 오히려 조건이다. 그러니 “그것을 비판할 여유가 있으면, 그 자신이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취했던 방법으로 국가와 네이션을 고찰하면 된다.”(세19) 실제 고진이『세계사의 구조』에서 하고자 한 작업이 바로 이것이다.

 

고진은『세계사의 구조』에서 교환양식을 통해 사회구성체의 역사를 새롭게 보려 하였다. 그러기 위해 그는 기존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들과 차별화된 내용으로 마르크스 사상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게 아니다. 고진은 마르크스로 되돌아가서 ‘마르크스가 헤겔을 비판했던 것을 다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마르크스의 헤겔비판을 다시 한다는 것은 헤겔이 관념론적으로 파악한 근대의 사회구성체 및 거기에 도달한 ‘세계사’를 마르크스가 그랬듯이 유물론적으로 계속 전도시키면서 헤겔이 파악한 자본, 네이션, 국가라는 삼위일체성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세18)**** 여기에 가능성의 중심에서 읽기의 첫 번째 실마리가 있다. 비판 이후의 결과물인 이론의 내용 보다 그 이론을 산출했던 비판 작업 그 자체를 다시 비판하는 것. 그럴 때만이 사상가를 그리고 그의 텍스트를 가능성의 중심에서 읽어내면서 새로운 이론을 창출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라캉과 함께 라캉을 넘어가고자 한다면 라캉이 프로이트를 비판한 것을 다시 비판해야 한다.)

 

더불어, 고진이 현대 철학에서 상갓집 개 취급을 받는 헤겔의『법철학 강의』를 근본적으로 음미하고자 한 것은 헤겔 사유의 세부적인 꼴에 매몰되지 않고 전체적인 틀을 파악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헤겔은 자본=네이션=스테이트를 궁극적인 사회형태로 보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세32) 하지만 고진은 이러한 헤겔의 이론적 한계를 그저 내용에서 비판하지 않고 자본, 네이션, 국가의 삼위일체라는 틀은 수용하되 그것들이 각기 다른 경제적 하부구조, 즉 다른 교환 양식에서 기인한다는 것과 아울러 그것들 사이의 변화 법칙을 밝히고자 했던 것이다.

 

게다가 사상의 꼴이 아닌 틀을 볼 때만이 상이한 영역의 공통 형식을 찾고 이것을 매개로 해석의 지평도 덩달아 열리는 법이다. 예를 들면 마르크스는 가치형태론에서 화폐의 기원이 아니라 화폐형태라는 ‘장소’의 기원을 탐구했는데, 이를 통해 고진은 홉스가『리바이어던』에서 주권자라는 ‘장소’의 출현을 역사적(통시적)으로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보여주려고 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화폐 형태의 장소 때문에 그 자리에 황금이 아닌 다른 무엇이 오든 화폐의 권능을 부여받듯이, “주권자란 왕이든 인민이든 누구를 대입해도 상관이 없는 ‘장소’를 가리키”(세147)는 것이고, 그 자리로 인해서 주권의 힘은 발생하게 된다.

 

요컨대 가능성의 중심에서 읽는다는 것은 ‘비판 그 자체로 되돌아가 다시 비판하기’, 그리고 ‘꼴이 아니라 틀을 보고 그 틀을 새로운 꼴들로 재가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고진의) 이론은 이렇게 태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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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사의 구조』,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옮긴이) | 비(도서출판b) | 2012, 17p. 이하 본문 인용은 세-쪽수로 표기.

 

**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가라타니 고진, 김경원 (옮긴이) | 이산 | 1999, 24p.

 

*** 이 글은 텍스트를 가능성의 중심에서 읽기 위한 원리 두 가지를 밝히는 데 집중한다. 그 외에도 고진은 기존 이론을 다양한 방법으로 다르게 읽고자 하였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 채 대략 몇 가지만 부연하자면, ⓐ 위치나 차례를 ‘거꾸로 뒤바꾸는 것’[전도顚倒] :ex> 재배나 사육은 오히려 정주의 결과다. ⓑ 어떠한 결과(현상이든 구조든 뭐든)를 생성시키는 원인으로서의 항들과 시간축에 따른 그 항들 사이의 변화 법칙 찾기 :ex> 사회구성체는 여러 교환양식들의 복합체. 그러나 어떤 교환양식이 주도 하느냐에 따라 그 외 교환양식의 형태는 변형되어 존속한다. ⓒ 테제와 안티테제 사이의 이율배반 해소하기 : ex> 국가는 공동체의 내부에서 생긴다, ~ 외부에서 생긴다는 국가의 기원을 놓고 벌어지는 안티노미.

 

**** 고진은 마르크스의 헤겔 비판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의 리카도 비판 또한 다시 비판한다. “리카도가 주저『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에서 ‘세’(稅)를 중시하고 있는 데에 반해, 마르크스는 ‘세’를 제거했다. 라카도에게 있어 세는 자본의 수익에서 국가가 징수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세에 근거한 계급(군, 관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세의 문제는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국가를, 또는 군, 관료라는 ‘계급’을 제거한 것이다.”(세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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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국가 북한 - 카리스마 권력은 어떻게 세습되는가
권헌익.정병호 지음 / 창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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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 ‘고령화 가족’이 있다면 북한은 ‘혁명 가족’이 있다.* 국가 전통성을 식민지 역사와 탈식민 서사를 토대로 한 ‘유격대국가’이자 김일성(과 김정일)이라는 정치적 아버지를 둔 ‘가족국가’ 북한에서 그 곳 구성원들은 모두 혁명 가족의 일원이다.『극장국가 북한』은 혁명 가족 가장인 김일성으로부터 김정일에게로 권력 세습이 왜 가능했는지, 개인적 카리스마에서 세습적 카리스마로의 이행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탁월한 연구 성과다. 다시 말해 유격대국가와 가족국가라는 ‘내용’이 김일성 사후에 극장국가(클리퍼드 기어츠)라는 상징 의례를 통해 어떠한 ‘형태’를 부여받아 카리스마 권력의 자연 도태에 저항할 수 있었는가를 탐구하였다. 그러한 결과에 따른 권력 세습은 북한 사회가 김일성이라는 한 명의 아버지에서 김일성, 김정일이라는 ‘두 명의 아버지’를 가지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북한 정치질서는 인류학자 이문웅이 정의했듯이 가족국가다. 수령은 전통 사회에서 가장이 했던 역할을 국가 차원에서 수행한다. “실제로 오늘날 북한의 매체는 ‘어버이 장군님을 높이 모신 우리 인민은 모두가 한식솔이고 내 나라는 어디 가나 친혈육, 화목한 대가정입니다’라고 주장한다.”** 항일 빨치산 활동에 대한 작품을 보더라도 “김정숙과 김일성의 실재하는 가족 관계에 대해 그다지 언급하지 않는 경향이 있고”(극84) 그 대신 “김일성과 친족관계를 맺은 인물들은 대부분 가족을 잃고 갈 길을 잃은 고아 청소년들이며 그들을 통해 더 많은 인민들이 혁명지도자와 친족관계를 맺는 것으로 그려진다.”(극45) 이것은 사적 가족의 아버지를 정치적으로 확장시킨 것이면서 또 한편 원래 아버지의 기원으로의 회귀이기도 하다.***

 

그러한 북한의 가족 정치체제는 ‘충효일심’을 시민윤리로 강조한다. 이 덕목은 충과 효를 엄격히 구분했던 전통적인 한국 유교 정치체제와는 확연히 다르다. “이는 최고 권력에 대한 인민들의 충성에 관한 북한체제의 요구가 효라는 도덕을 끌어들이고 그럼으로써 정치적인 것과 가족 혹은 사적인 것 간의 기존 경계를 흐리고 해체”(극89)한 것. 그렇기에 지도자와 인민들의 관계는 도덕 경제 혹은 전면적 호혜성에 기반하고 있다. 소위 ‘호래자식’이 안 되려면 김일성으로부터 “물질적, 정신적 보살핌의 혜택을 입은 사람들은 그 정치적 가정의 가장에게 깊은 효성과 충성심으로 보답하고, 가장이 죽으면 한 가정의 조상을 추모하는 것처럼 그의 유훈을 잘 따라야 한다.”(극227~228)

 

가족국가 북한의 정서적 유대 구조에서 “가장 가치있고 특별한 인간관계는 개인(각자 고립되고 분리되어 있는)과 최고지도자와의 관계다.”(극128) 프로이트도 말했듯이 집단의 리비도적 결합은 지도자와 구성원 개개인의 관계를 ‘매개로해서’ 파생한 유대감의 결합이다. “집단은 자아 이상을 [지도자라는] 하나의 공통된 대상으로 대치하고, ‘그 결과’ 자아 속에서 자신들을 서로 동일시하게 된 개인들의 집합이다.”**** 프로이트는 이때 구성원 모두에게 ‘평등한 사랑을 똑같이 베푸는’ 우두머리에 대한 환상이 핵심이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아버지를 대신한다...그리스도 앞에서는 만인은 평등하고 만인이 똑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라고, 즉 그리스도가 베푸는 사랑을 통해 형제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집102)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 했듯이 부모의 자식 사랑은 늘 평등한 것으로 표상되며 정치적 아버지 김일성의 사랑 또한 전체 인민들에 대한 차별 없는 사랑으로 여겨진다.

 

김일성 사후 하나의 정치적 아버지는 김정일로의 권력 승계 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을 통해 두 명의 정치적 아버지로 탄생한다. 우선은 북한 문학, 영화, 집단 체조 등을 통해 김정숙이라는 모성 상징과 총대라는 물적 상징을 발명하고 이로써 국가 건국의 기원에 김정일을 자리매김하고자 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기제는 김일성의 자리를 김정일이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두 명의 정치적 아버지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이 1994년 7월 사망할 때까지 맡았던 국가주석 자리를 그만이 유일하게 가질 수 있는 영구주석 지위로 개정했다는 결정문을 고지했다.....북한은 김일성의 역사적 카리스마 권력을 헌법상의 초월적이며 개념상의 초역사적인 권력으로 변모시키는 제도적 혁신을 추진했던 것이다. 이 일을 달성한 뒤에야 비로소 김정일은 사망한 지도자를 대신하여 노동당의 최고위직에 선출되었다. 그 결과는 직무의 계승이 아니었다. 새 국가수반이 된 전 국가수반을 대체했다기보다, 헌법 개정으로 새로운 직책을 만들어 새 지도자와 전 지도자가 각각 물리적 국가수반과 형이상학적 국가수반으로서 함께할 수 있게 된 것이다.”(극장102~104)

 

한 마디로 말해, “김일성의 죽음은, 북한의 공식적인 언어로는 지도자의 육체적 삶의 끝일 뿐 정치적 삶은 계속되는 것으로 표현된다.”(극104) 이러한 논리는 ‘국왕의 두 신체’라는 절대 왕정 시대의 정치 이론과 매우 유사한 형식을 띠고 있다. 이를 요점만 말하면, “국왕은 자신 안에 두 개의 신체를, 즉 자연적 신체와 정치적 신체를 갖는다. 그의 자연적 신체는 소멸할 운명을 지닌 신체이며...그러나 그의 정치적 신체는 보이지도 않으며 만져지지도 않는 신체로서 정치적 사회와 정부로 구성되어 공공선을 관리하고 인민을 지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 이러한 자연적 신체의 죽음은 ‘Demise’(계승)이라고 불렸고, 그런 측면에서 북한의 유훈 통치는 김일성이라는 ‘정치적 신체’가 김정일이라는 ‘자연적 신체’로 전해진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게다가 북한은 김일성의 정치적 신체를 물질화시켜 이를 보다 적극적으로 강화하였다. 가령 김일성의 (사망일이 아니라) 생일을 태양절이자 최고의 국경일로 지정하거나 그의 시신을 방부처리해서 영구 보전하고 수많은 영생탑을 온 나라에 세웠던 것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는 김일성이라는 정치적 신체 혹은 형이상학적 국가수반으로의 변모는 상징적 아버지에서 상상적 아버지로의 이행이라 말할 수 있다. 라캉에게서 상상적 아버지는 이상형--상(像), 이미지(Image)--으로서의 아버지다. 필리프 쥘리앵에 따르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단계가 지나고 초자아가 내면화되는 나이, 즉 다섯 살에서 여섯 살쯤 될 때 어린아이는 실재의 아버지를 상상적 아버지로 덮어씌운다. 이 아버지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다. 그는 (법률을 대표하는 사람이 아니라) 법률을 제정하는 입법자적 지배자이며 종교에서의 신의 형상의 원형이 되는 전능한 보호자이다. 이것은 프로이트『토템과 터부』에 나오는 원초적 아버지다. 아이의 욕망을 법에 종속시키면서 그 자신도 법에 복종해야 하는 상징적 아버지와 이 인물이 구별되는 점은 그 자신은 법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 (두 아버지들 모두 정신의 영역에서 초자아로서 기능한다.)

 

따라서 북한은 ‘김일성-형이상학적 국가수반/정치적 신체/상상적 아버지’와 ‘김정일-물리적 국가수반/자연적 신체/상징적 아버지’라는 두 아버지를 가진 혁명 가족 국가인 것이다. 결국 북한 김정은 체제의 운명도 ‘세 명의 아버지의 자리’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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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명관 소설『고령화 가족』에서 사회로부터 쫓겨난 다 늙은 자식들이 더 늙은 엄마 집으로 내몰린다. 직장도 국가도 또 하나의 가족이기를 포기한 남한에서 그들은 혈육으로 얽혀 붙은 자연적 가족에게로 퇴행/퇴출당한 것. 결국 남과 북은 둘 다 가족주의 국가인 셈인데, 최인훈의 이분법을 빌리면 남쪽은 '밀실 가족(주의)', 북쪽은 '광장 가족(주의)'다.

 

** 『극장국가 북한』, 권헌익/정병호, 창비, 2013년, 35p. 이하 인용은 극-쪽수로 표기.

 

*** “쥘리앵에 따르면, 먼저 아버지는 ‘아이에 대한 권리’를 가진 사람이다. 원래 아버지로 불린 것은 한 여자의 남편이 아니라 지배자, 즉 국가를 이끄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즉 아버지의 일차적인 의미는 ‘정치적․종교적 아버지’였으며, 가족적 의미의 아버지는 그로부터 파생된 개념이다. 말하자면 정치적․종교적 지배자라는 것이 아버지가 갖는 권위의 기원이겠다.”(로쟈, ‘아버지의 역사’, 기획회의-2010. 06. 05)

 

**** “지크문트 프로이트,『문명 속의 불만』, 김석희 (옮긴이) | 열린책들 | 2004” 에 수록된「집단 심리학과 자아 분석」, 129p. 이하 인용은 집-쪽수로 표기.

 

***** 『절대왕정의 탄생』, 임승휘, 살림, 2007년, 30p,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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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재발견 - 민주주의를 둘러싼 싸움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민주주의 강의
박상훈 지음 / 후마니타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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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던 연인과 헤어졌을 때 대개 사람들은 마치 ‘여우의 신포도 우화’처럼 상대방을 깎아 내린다. 더불어 상처 난 맘을 다른 이에게 위로받고 나만의 진짜 인연을 다시 꿈꾼다. 가령 실연당한 날, 친구에게 “그(녀)는 내 영혼의 동반자가 아니었나 봐” 하소연하며 “진정한 짝을 찾을 거야”는 희망의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20여년, 우리는 정치로부터 실연당했다. 독재 정권을 몰아내고 직접 대통령을 뽑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게 만사형통일 줄 알았는데 사는 게 점점 더 어렵기만 하다. 정규직인 것만으로도 사회 특권층이 될 만치 계약직이 고용 형태의 보통명사가 되었다. 빚 독촉을 피할 길은 자살 밖에 없는 사람들로 세상은 넘쳐난다. 이제 정치, 특히 민주주의는 날 버린 애인처럼 냉소의 대상이 되었고 배제된 자들은 ‘힐링 문화 상품’을 통해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소위 강단 좌파들이 최신 정치 철학을 소비하면서 진짜 정치를 찾는다고 분주하다.

 

박상훈은 <민주주의의 재발견>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때 이른 ‘냉소’와 진짜 민주주의를 찾는 ‘환상’을 비켜가며 우리가 그 동안 경험했고 또한 겪고 있는 민주주의 위에서 더 현실적이고 더 나은 대안을 찾고자 한다. 그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기존의 잘못된 관점과 시각을 비판적으로 다루면서”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인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는 데서 출발한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민주주의만이 참된 민주주의라는 게 아니다. 원래 민주주의는 제 각각이었으며 언제나 민주주의‘들’로 존재해 왔다. 문제는 이제까지의 논의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실천을 풍부하게 하는 데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민주 정치를 개선하려면 민주주의를 제대로 된 논의의 장으로 끌어오는 게 먼저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재발견>은 ‘민주주의에 대한 논쟁의 장을 재발견’하기 위해서 쓰여졌다.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의 이론에 기대어 박상훈은 무엇보다 ‘갈등’을 민주주의의 엔진이자 존재 이유로 여긴다. 지역, 소득, 성, 고용 형태 등 각자 다른 사회적 차이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공적 의제에 대한 이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집단적 사회 갈등 때문에 불러들여진 정치체제다. 이 때 정당은 갈등의 범위를 확대하고 사회화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개인이나 다른 조직 형태가 아니라 그는 왜 굳이 정당을 강조하는가? “우선 사적 이익집단이든 공익적 시민운동이든 이들 사회집단이 동원할 수 있는 사회 갈등의 범위는 그리 넓지 않기 때문이다.....갈등의 범위를 확대하자니 기존의 참여자가 줄고, 이들의 참여를 유지하자니 갈등의 범위를 축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또 다른 이유는 “실제로 공익적 목표를 지향하는 집단(우리는 이를 시민운동이라고 부른다)을 사례로 봐도 그 구성원들의 다수는 중산층 이상의 계층적 배경을 가질 수밖에 없”기에 사회 하층은 정치적으로 소외되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저발전은 정당을 매개로 ‘갈등을 사회화하는 데 무능했던 것’에서 초래된 결과다. 즉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갈등의 분포와 정치 영역에 존재하는 갈등 분포가 어긋나 있는 것. 특히 한국의 정치는 가장 중요한 생산 집단이자 사회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의 이해와 권리를 철저히 배제해왔던 보수 독점적 정당 체제였다. 심지어 “기대했던 김대중, 노무현 정부 하에서 비정규직은 최대로 늘었고, 소득 분배는 지속적으로 악화되었으며 사회 하층의 빈곤화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따라서 저자는 “노동문제를 민주주의의 문제로 다루는 실력만큼 정치가가 갖춰야 할 소양으로서 중요한 것은 없다”고 강조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보수 독점적 정당체제를 재편하고 민주 정치를 갱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안적인 정치 세력의 성장이 시급하다. 이를 위해 박상훈은 촛불 집회 당시 풍미했던 민주주의관을 비롯해 민주당, 안철수, 진보 세력들이 그 동안 민주주의를 어떻게 잘못 이해해왔으며 정치적으로 무능했는지를 비판적으로 따져 묻고 있는 것이다.

 

우선 저자는 “촛불 집회를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거부로 해석하거나 대의 민주주의를 나쁜 민주주의의 유형으로 이해하면서 그 대안으로 직접민주주의를 내세우는 해석”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한다. 촛불 집회는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가 갖게 된 악순환 구조를 드러내는 것으로 집합적 열망의 분출 이후 그 에너지가 소진되면 다시 정치의 정체와 퇴행이 반복되어온 패턴을 그리고 있다. 따라서 촛불 집회는 보수 독점적 정당 체제의 다른 얼굴이기에 현재와 같은 정당 체제를 그대로 둔 채 운동의 지속만 강조하면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한다는 것이다. “운동이 강조된다는 것은 그만큼 현실에서 정당과 정당체제가 나쁘다는 것을 말해 주는 지표는 되겠지만, 운동이 정치제체를 대신할 수는 없으며” 그것을 개선시키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의 민주주의라고도 불리는 “현대 민주주의는 사회의 여러 ‘부분 이익’을 대표하는 후보와 정당들의 경합 체제다.” 그러나 그간 민주당은 국민 전체를 대표하고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줘야 한다는 미명 아래 ‘정치 시장’에 상장된 기업마냥 활동해 왔다. 이를테면 여론 조사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당원인 적도 없었던 전문가를 인지도만으로 영입해 공천을 주었다. 그로 인해 “당원은 소외되고 시민은 소비자가 되고 권력은 여론 동원 능력을 가진 사람이 지배하는 정치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정치는 시장에서의 결정과는 다르다. 정당은 유권자 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정치적 열망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시민의 선호를 공적 논의를 거치면서 집합적으로 ‘형성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 지금처럼 시민 생활의 현장을 무시하고 정치 마케터들이 짜주는 ‘프레임’과 ‘포지셔닝’에만 의존한다면 민주당은 호남이라는 지역 대표성 말고는 누구도 대표하지 못할 것이다.

 

‘반(反)정치에 의한 정치 현상’이랄 수 있는 안철수 또한 민주당처럼 국민을 앞세우면서 실제로는 아무도 대표하지 않기는 매 한가지다. 특히 정치에서의 싸움 자체를 죄악시하는 그의 태도는 파당적 경쟁 위에서 작동하는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꼴이다. 국회의원 정원 축소, 정당 국고보조금 축소/폐지, 당론 폐지 및 국회의원 소신 투표, 정당 공천권 폐지 등의 안철수식 정치 쇄신안은 민주주의에 대한 완벽한 오해를 드러내는 지점이다. 앞서 말했듯이 정치는 고객 감동의 행정 서비스가 아닐 뿐더러 ‘정치를 줄이자’에 가장 환호할 세력은 경제 권력과 관료들이다. “전경련 내지 재벌 연구소가 내놓은 정치 개혁안을 관통하는 것은 늘 정치의 역할을 줄이라는 것이었”고 “정당과 국회 때문에 일을 못하겠다는 관료”들이었다. 자신을 견제할 정치권력의 힘이 약화될수록 그들은 더 많은 기득권을 쌓아 갈 테니 안철수야말로 그들의 가장 든든한 우군인 셈이다.

 

민주당과 안철수가 국민 전체를 대표한다며 결국 아무도 대표하지 않는다면 운동권이라 불리는 우리 사회의 진보(파)는 ‘자신의 진정성’을 대표하느라 정치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 했다. 정치적 이성에 대한 경시가 그들을 정치적 대안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혁명과 운동의 논리로는 권력 문제를 원활히 다룰 수 없으며 “민주주의는 의도의 진정성에 있는 것도, 추구하는 목표나 지향하는 내용의 고결함에 있는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서로의 진정성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 공존하는 것에서 시작되고, 그런 이견과 차이 속에서 구속력 있는 공적 결정을 도출하는 평화적 원칙을 말한다.” 진보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샛길을 개척하지 못 한다면 그들의 진정성은 오히려 전체주의의 교두보가 되고 말 것이다.

 

<민주주의의 재발견>의 저자 박상훈에게 민주주의의 핵심 문제가 ‘누가 누구를 어떻게 대표해야 갈등을 사회화시킬 수 있는가’이고 그 답을 꼭 한 마디로 하자면 ‘정당 체계가 (대다수 평범한 보통 사람들인)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다. 하지만 “정당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시민운동이나 마을 차원의 공동체를 만드는 일의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이 없”듯이 저자 또한 정당을 한국 사회의 병폐를 치유할 유일무이한 수단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다만 “좋은 정당 없이는 좋은 민주주의는 없”으며 “그 기초 위에서 다양한 시민 참여의 실험과 제도를 창조적으로 모색하고 보완해 가자는 관점에서 접근”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재발견>은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와 ‘환상’ 사이를 가로지르는 좁은 길을 걸으면서 한국 정치를 바꿔나갈 더 현실적이면서 더 나은 대안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실천의 실마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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