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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재발견 - 민주주의를 둘러싼 싸움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민주주의 강의
박상훈 지음 / 후마니타스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사랑하던 연인과 헤어졌을 때 대개 사람들은 마치 ‘여우의 신포도 우화’처럼 상대방을 깎아 내린다. 더불어 상처 난 맘을 다른 이에게 위로받고 나만의 진짜 인연을 다시 꿈꾼다. 가령 실연당한 날, 친구에게 “그(녀)는 내 영혼의 동반자가 아니었나 봐” 하소연하며 “진정한 짝을 찾을 거야”는 희망의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20여년, 우리는 정치로부터 실연당했다. 독재 정권을 몰아내고 직접 대통령을 뽑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게 만사형통일 줄 알았는데 사는 게 점점 더 어렵기만 하다. 정규직인 것만으로도 사회 특권층이 될 만치 계약직이 고용 형태의 보통명사가 되었다. 빚 독촉을 피할 길은 자살 밖에 없는 사람들로 세상은 넘쳐난다. 이제 정치, 특히 민주주의는 날 버린 애인처럼 냉소의 대상이 되었고 배제된 자들은 ‘힐링 문화 상품’을 통해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소위 강단 좌파들이 최신 정치 철학을 소비하면서 진짜 정치를 찾는다고 분주하다.
박상훈은 <민주주의의 재발견>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때 이른 ‘냉소’와 진짜 민주주의를 찾는 ‘환상’을 비켜가며 우리가 그 동안 경험했고 또한 겪고 있는 민주주의 위에서 더 현실적이고 더 나은 대안을 찾고자 한다. 그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기존의 잘못된 관점과 시각을 비판적으로 다루면서”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인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는 데서 출발한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민주주의만이 참된 민주주의라는 게 아니다. 원래 민주주의는 제 각각이었으며 언제나 민주주의‘들’로 존재해 왔다. 문제는 이제까지의 논의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실천을 풍부하게 하는 데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민주 정치를 개선하려면 민주주의를 제대로 된 논의의 장으로 끌어오는 게 먼저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재발견>은 ‘민주주의에 대한 논쟁의 장을 재발견’하기 위해서 쓰여졌다.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의 이론에 기대어 박상훈은 무엇보다 ‘갈등’을 민주주의의 엔진이자 존재 이유로 여긴다. 지역, 소득, 성, 고용 형태 등 각자 다른 사회적 차이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공적 의제에 대한 이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집단적 사회 갈등 때문에 불러들여진 정치체제다. 이 때 정당은 갈등의 범위를 확대하고 사회화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개인이나 다른 조직 형태가 아니라 그는 왜 굳이 정당을 강조하는가? “우선 사적 이익집단이든 공익적 시민운동이든 이들 사회집단이 동원할 수 있는 사회 갈등의 범위는 그리 넓지 않기 때문이다.....갈등의 범위를 확대하자니 기존의 참여자가 줄고, 이들의 참여를 유지하자니 갈등의 범위를 축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또 다른 이유는 “실제로 공익적 목표를 지향하는 집단(우리는 이를 시민운동이라고 부른다)을 사례로 봐도 그 구성원들의 다수는 중산층 이상의 계층적 배경을 가질 수밖에 없”기에 사회 하층은 정치적으로 소외되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저발전은 정당을 매개로 ‘갈등을 사회화하는 데 무능했던 것’에서 초래된 결과다. 즉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갈등의 분포와 정치 영역에 존재하는 갈등 분포가 어긋나 있는 것. 특히 한국의 정치는 가장 중요한 생산 집단이자 사회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의 이해와 권리를 철저히 배제해왔던 보수 독점적 정당 체제였다. 심지어 “기대했던 김대중, 노무현 정부 하에서 비정규직은 최대로 늘었고, 소득 분배는 지속적으로 악화되었으며 사회 하층의 빈곤화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따라서 저자는 “노동문제를 민주주의의 문제로 다루는 실력만큼 정치가가 갖춰야 할 소양으로서 중요한 것은 없다”고 강조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보수 독점적 정당체제를 재편하고 민주 정치를 갱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안적인 정치 세력의 성장이 시급하다. 이를 위해 박상훈은 촛불 집회 당시 풍미했던 민주주의관을 비롯해 민주당, 안철수, 진보 세력들이 그 동안 민주주의를 어떻게 잘못 이해해왔으며 정치적으로 무능했는지를 비판적으로 따져 묻고 있는 것이다.
우선 저자는 “촛불 집회를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거부로 해석하거나 대의 민주주의를 나쁜 민주주의의 유형으로 이해하면서 그 대안으로 직접민주주의를 내세우는 해석”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한다. 촛불 집회는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가 갖게 된 악순환 구조를 드러내는 것으로 집합적 열망의 분출 이후 그 에너지가 소진되면 다시 정치의 정체와 퇴행이 반복되어온 패턴을 그리고 있다. 따라서 촛불 집회는 보수 독점적 정당 체제의 다른 얼굴이기에 현재와 같은 정당 체제를 그대로 둔 채 운동의 지속만 강조하면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한다는 것이다. “운동이 강조된다는 것은 그만큼 현실에서 정당과 정당체제가 나쁘다는 것을 말해 주는 지표는 되겠지만, 운동이 정치제체를 대신할 수는 없으며” 그것을 개선시키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의 민주주의라고도 불리는 “현대 민주주의는 사회의 여러 ‘부분 이익’을 대표하는 후보와 정당들의 경합 체제다.” 그러나 그간 민주당은 국민 전체를 대표하고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줘야 한다는 미명 아래 ‘정치 시장’에 상장된 기업마냥 활동해 왔다. 이를테면 여론 조사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당원인 적도 없었던 전문가를 인지도만으로 영입해 공천을 주었다. 그로 인해 “당원은 소외되고 시민은 소비자가 되고 권력은 여론 동원 능력을 가진 사람이 지배하는 정치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정치는 시장에서의 결정과는 다르다. 정당은 유권자 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정치적 열망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시민의 선호를 공적 논의를 거치면서 집합적으로 ‘형성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 지금처럼 시민 생활의 현장을 무시하고 정치 마케터들이 짜주는 ‘프레임’과 ‘포지셔닝’에만 의존한다면 민주당은 호남이라는 지역 대표성 말고는 누구도 대표하지 못할 것이다.
‘반(反)정치에 의한 정치 현상’이랄 수 있는 안철수 또한 민주당처럼 국민을 앞세우면서 실제로는 아무도 대표하지 않기는 매 한가지다. 특히 정치에서의 싸움 자체를 죄악시하는 그의 태도는 파당적 경쟁 위에서 작동하는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꼴이다. 국회의원 정원 축소, 정당 국고보조금 축소/폐지, 당론 폐지 및 국회의원 소신 투표, 정당 공천권 폐지 등의 안철수식 정치 쇄신안은 민주주의에 대한 완벽한 오해를 드러내는 지점이다. 앞서 말했듯이 정치는 고객 감동의 행정 서비스가 아닐 뿐더러 ‘정치를 줄이자’에 가장 환호할 세력은 경제 권력과 관료들이다. “전경련 내지 재벌 연구소가 내놓은 정치 개혁안을 관통하는 것은 늘 정치의 역할을 줄이라는 것이었”고 “정당과 국회 때문에 일을 못하겠다는 관료”들이었다. 자신을 견제할 정치권력의 힘이 약화될수록 그들은 더 많은 기득권을 쌓아 갈 테니 안철수야말로 그들의 가장 든든한 우군인 셈이다.
민주당과 안철수가 국민 전체를 대표한다며 결국 아무도 대표하지 않는다면 운동권이라 불리는 우리 사회의 진보(파)는 ‘자신의 진정성’을 대표하느라 정치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 했다. 정치적 이성에 대한 경시가 그들을 정치적 대안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혁명과 운동의 논리로는 권력 문제를 원활히 다룰 수 없으며 “민주주의는 의도의 진정성에 있는 것도, 추구하는 목표나 지향하는 내용의 고결함에 있는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서로의 진정성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 공존하는 것에서 시작되고, 그런 이견과 차이 속에서 구속력 있는 공적 결정을 도출하는 평화적 원칙을 말한다.” 진보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샛길을 개척하지 못 한다면 그들의 진정성은 오히려 전체주의의 교두보가 되고 말 것이다.
<민주주의의 재발견>의 저자 박상훈에게 민주주의의 핵심 문제가 ‘누가 누구를 어떻게 대표해야 갈등을 사회화시킬 수 있는가’이고 그 답을 꼭 한 마디로 하자면 ‘정당 체계가 (대다수 평범한 보통 사람들인)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다. 하지만 “정당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시민운동이나 마을 차원의 공동체를 만드는 일의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이 없”듯이 저자 또한 정당을 한국 사회의 병폐를 치유할 유일무이한 수단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다만 “좋은 정당 없이는 좋은 민주주의는 없”으며 “그 기초 위에서 다양한 시민 참여의 실험과 제도를 창조적으로 모색하고 보완해 가자는 관점에서 접근”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재발견>은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와 ‘환상’ 사이를 가로지르는 좁은 길을 걸으면서 한국 정치를 바꿔나갈 더 현실적이면서 더 나은 대안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실천의 실마리를 던져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