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인문학
김담 지음 / 글항아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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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제는 세대별로 달리 체감할 테지만 ‘고향’이라는 말에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을 엄마의 젖가슴 냄새가 난다. 그리고 고향은 노후를 보낼 전원생활의 전망 속에서 각박한 밥벌이를 버텨내게 하는 사적 유토피아로 환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근대 산업화의 파장을 비켜갈 수 있는 안전지대는 어디에도 없으며 우리가 추억하거나 꿈꾸는 그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2007년부터 얼추 5년간의 개인 기록인 김담의『숲의 인문학』에서 엿볼 수 있는 (고향 아닌) 고향에서의 생활이 아무나와 겹쳐질 수 있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실향민의 운명을 함께하기 때문이다.

 

김담이 책날개 자기소개에 밝혔듯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 부모를 따라 1994년 귀향한 그 곳, 강원도 고성은 고향이었지만 이미 고향은 아니었다. 시인 신경림이「罷場」에서 노래했던,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 없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풍경은 인류의 종말을 예언한 한 편의 묵시록을 닮았다.

 

“물길을 돌려 콘크리트를 바르고 당산목을 버려두어 말라죽게 하고, 산맥을 허투루 잘라내서 도로를 만드는 거기에”서(246) “우리에서 길러지는 가축들은 이제 살과 살이 맞닿는 즐거움 없이 오로지 번식을 위하여 인간에 의해 수정당했다.”(251) “벼농사를 짓던 수만 평 논이 어느 날 문득 옥수수 밭으로 바뀌었다. 둘레엔 전기울타리가 세워지고, 벼농사 지을 때까지 멀쩡하게 살아 있던 어린 소나무들은 제초제를 쳐서 죄다 죽여놓았다.”(300) “올해도 벌들은 꿀을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아까시나무 가까이 서면 겨우 서너 마리 벌이 윙윙거리며 꿀을 모으고 있었으니 어쩌면 벌 떼 같다는 말은 이제 고쳐져야 할런지도 모를 일이다.”(295)

 

자연 뿐만 아니라 사람 풍경 또한 척박하기는 매 한가지다. 농약, 화학비료 없으면 농사를 짓지 못할 것이라 믿는 농부들은 “대지가 병들고, 아니 당장 내 살이 썩어 들어가고 있어도 모른 체했다. 이제는 아무도 마을 개천에서 목간하고 세수하지 않으면서도 별스럽게 여기지 않았다.”(183) “농사를 지어도 이웃과 무엇을 나눠 먹는 일은 점점 흔치 않은 일이 되어갔다....때로는 버스 삯 들여 시장에 내가면 남는 것이 있을까 싶었지만, 백 원도 귀하고 천 원도 소중했다.”(226) 심지어 “구제역이 비껴나면 소 값이 오르지 않을까 내심 맘이 달뜨는 사람도 없지 않았으니” 다시 찾은 고향은 “참 무섭고 징그러운 세상이었다.”(245)

 

 

2. 앞서 김담이라는 한 개인의 생활사를 다룬『숲의 인문학』이 가진 보편성을 ‘고향 잃은 자의 공동 운명’에서 찾았다면 그가 쓴 산문의 미적 성취는 고향땅에서(야) 방외인으로 사는 이가 제 뿌리를 내리고픈 터를 자음과 모음으로 ‘지나치게’ 섬세하게 그려내는 그 방식에 깃들어 있다. 김담 산문의 주된 묘사 대상이자 되찾을 길 없는 고향을 대체할 그 장소란 두말없이 ‘숲정이’다. 그 곳은 살아 있는 것을 살게 한다. 숲정이에서 ‘어머니 대지’는 은유가 아니라 현실이다. 어디를 가도 나물이며 약초가 흔한 “봄날 숲정이에만 들 수 있으면 아무리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굶어 죽는 일은 없을”(285)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웃에 사는 사촌 동생에게는 일터일 뿐인 숲은 김담에게는 “좀 다른 곳이었다. 숲은 어떤 기원이면서 또한 풍경이었으나 절체절명의 무엇은 아닌 또 다른 의미를 가진 장소였다.”(291)

 

숲은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장소인가? 고향에 돌아왔으면서도 한 번도 태를 묻은 곳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느끼지 못하는, 때로는 도시에 있는 텅 빈 극장에서 영화를 구경할 때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곤 한다는 김담이지만, 제 고향의 “숲속에 들면 숲 밖은 이미 세속처럼 아마득해지곤 했다. 어디에도 없는 편편한 숲 바닥에 앉아 있는 일은 꿈결처럼 후눅했다.”(290) 그에게 숲 속은 숲 바깥, 즉 세속의 고향 ‘안에 있으면서 그 너머 있는’ 고향이다. 여기서 숲은 ‘진정한’ 고향 따위가 아니다. 숲은 일종의 대리 표상이다. 억압된 것의 회귀로서의 고향은 숲이라는 대상을 통해서야 대리 표상될 수 있는 것.

 

그렇다면 상실된 고향은 숲의 무엇을 매개로 대리 표상되는가? 무엇보다 숲은 ‘뿌리들’의 장소다. 실제로 “숲 가꾸기를 한 숲정이는 덩굴식물들은 모두 베어 없앴지만 ‘뿌리까지는’ 어쩌지 못했던 까닭에 남은 밑동에서 자란 줄기들은 다급하게 키를 키웠다.‘(284) “짐승이 잘라 먹은 삼지구엽초 줄기에서는 다시 이파리가 돋지 않았으나 바로 옆에서 새로운 줄기가 돋아났”수 있는 이유도 그것이 “뿌리번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지구엽초는 늘 떼판을 이루었”고 “씨앗이 멀리가지 않는, 예를 들면 더덕과 도라지 같은 식물들도 마찬가지였다.”(294) 뿌리가 죽지 않은 곳, 거기가 바로 고향이다.

 

물론 숲도 인간의 파괴로부터 자유로울 수만은 없다. 하지만 뿌리들의 장소인 숲은 그 자신도 종속된 ‘우주의 섭리’(logos)를 무심하게 고집한다. 숲에서는 “다시 시작된 솎아베기 톱날 소리에 산개구리들 울음소리는 가뭇없이 사라지”지만 “그 자리엔 현호색 무리들 활짝 피어”(267)나고, “덤프트럭들 먼지 흩날리던 비탈길은 어젯밤처럼 잠잠해지고, 흙 팔아먹고 빈 터로 남은 곳엔 난데없이 고들빼기가 지천”(264)일 수 있다. 자본의 운동이나 국가의 폭력, 그 “무엇으로도 어찌해볼 수 없는 봄이 그처럼 활활 산불처럼 타오르”(266)는 숲은 징그러운 세상을 징그러운 생명력으로 맞선다.

 

 

3. 그런데 김담은 그 숲을 그저 거닐지 못하고 왜 굳이 400페이지 넘는 책으로 묶일 만큼 글을 써대고 또 수천 장의 사진으로까지 남겨야 했을까? 더구나 원체 풍경이야 분석의 대상은 아니지만은 한글을 총동원하다시피 하여 그토록 세밀하게 ‘묘사’해야만 했을까? 어쩌면 단지 ‘글 쓰고 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 그랬을 뿐이다’는 게 정답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 심심해서 한참 민망한 답이다. 어쩌면 ‘그에게 숲은 오직 표상에서야 완전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고 김담이 숲정이와 숲 속 동식물들을 스피노자가 비판했듯이 인간이 휘두르는 ‘목적인(目的因)의 폭력’으로 재단했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데, 가령 “도감에는....모두 식용이라고 표시되어 있지만, 우리 집/마을에서는 먹지 않는 ‘잡버섯/똥버섯’들은” 그의 글에서만큼은 “접시만 한 흰가시광대버섯, 누런 호박색을 띠는 껄껄이그물버섯”(426)으로 제 고유한 이름을 부여 받는다. 그 이름마저도 버섯들이 원해서 갖게 된 것이 아니고 순전히 인간의 관점에서 떠안긴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송이버섯도 멧토끼도 될 수 없는, 언어라는 ‘존재의 집’을 통해서만 세계를 만날 수 있는 인간이 가진 한계인 것을. 그렇다고 이름이 가진 힘을 간단히 무시할 수는 없을 노릇이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인간이 저지른 대량 학살은 반드시 개개인의 이름을 지우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지 않는가. 마당의 풀들을 잔디 깎기로 밀어버리기는 쉬워도, ‘달개비꽃, 이삭여뀌, 조뱅이, 물봉선, 개미취, 네귀쓴풀, 홑왕원추리, 중나리, 으아리, 얼레지’의 모가지를 함부로 꺾기는 어렵다. 이것도 언어를 가진 인간의 (한계이자) 조건이다.

 

그렇게 김담의 호명에 터 해서 ‘존재 망각’에서 벗어난 숲정이는 그의 글 속에서 생경하지만 아름다운 우리말로 융단폭격을 당하듯 다채롭게 묘사된다. 삐딱한 눈으로 그의 글을 훑어볼 누군가는 ‘건빵 봉지에 건빵보다 별사탕이 더 많다’고 투덜거릴 련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의 산문은 왜 그토록 과도하게 보일정도로 묘사에 집중하는가? 그 실마리 하나를 풀자면 숲은 그에게 과학적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묘사하여서 근근이 온전할 수 있는 장소인 까닭이다. 이를테면 “무슨 일로 벚꽃이 필 무렵이면 바람은 매몰차도록 불어대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273) 바람이 왜 부는지 그 원인을 설명하는 게 가능하여도 ‘왜 하필’ 벚꽃이 필 바로 그 무렵이면 바람이 매몰찬지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을 테니깐.

 

그 대신 만물의 존재 ‘양태’(modus)는 의성어와 의태어에 기대서야 현전(現前)한다. 여우비는 ‘졸금졸금’ 내리고 비꽃은 ‘후드득’ 떨어지며 계루는 ‘차란차란’하고 술 익는 소리는 ‘부걱부걱’ 들리며 콤바인 소리는 ‘걸걸’할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사람일 뿐인 김담은 귀룽나무 “저도 나도 귀신 형용이 되어 한바탕 춤추며 놀아도 좋을 것이겠지만 당장은 숲정이 이곳저곳에 ‘구름나무’로 서 있는 나무를 먼발치서 바라보는 것으로 그 아쉬움을 달래야”(274)한다. 그 존재하는 것들 사이의 절벽 같은 틈을 메우는 게 스피노자의 신(능산적 자연)이 아니라면 그것은 애오라지 김담의 산문 속 ‘직유와 은유’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찔레 싹은 ‘참새 혓바닥만큼’ 돋고 봄바람은 ‘첩의 죽은 귀신’이고 더넘바람은 풍경을 건드리며 ‘그네를 탄다’. 꽃들은 ‘불난 강변에 덴 소 날 뛰듯’ 일제히 피어나고 겨울에 널어 논 이불은 ‘황태처럼’ 녹았다 얼었다 하며 말라가는 것이다.

 

 

4. 김담의『숲의 인문학』은 고향에 도착하자 고향을 빼앗긴 이가 숲정이를 거닐면서 다시 찾아낸 고향을 자음과 모음을 풀어 그려놓은 세밀화(細密畵)다. 애초에 숲은 그에게는 표상에서야 완전한 장소이기에 거기 있는 것들은 고유의 이름으로 호명되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틈은 의성어와 의태어를 통해 혼융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표상들은 그의 발바닥에서 싹튼 것이라 삼지구엽초처럼 숲정이와 더불어 삶 속에 단단히 뿌리박혀 있다. 한편 그것은 “털어낼 것과 보전할 것을 가든하게 정리한” 자의 눈에만 보이는 상처 속의 풍경인데, 그의 산문은 다만 “그다음에 생긴 어떤 나머지일 것이다.”(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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