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balmas > 3월 반딧불 인권영화제: 나는 페미니스트다
3월 반딧불, "나는 페미니스트다"
상영작 : <멈추지 않는 그녀들, Unlimited Girls> 파로미타 보라/2002/97분/인도
부대행사 : 조이여울(여성주의 저널 일다 편집장)과 함께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들을 나누어 보는 자리
여전히 여성들에게 '페미니스트'란 꼬리표는 부담스럽다.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순간 개인의 참모습은 무시되고, 잘난 체하거나 이기적인, 혹은 나서길 좋아하는 여자라는 외부의 시선이 그녀를 규정해버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인식하면서도 페미니즘을 '동경은 하지만 실행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역시 페미니스트를 왜곡된 시선으로 규정짓는 사회의 편견과 차별 때문이다. 파로미타 보라(Paromita Vohra)의 2002년작 다큐멘터리 <멈추지 않는 그녀들(Unlimited Girls)>은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이런 고민에서 출발한다. 혼자되고 싶지 않아서 페미니스트이길 거부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과연 우리는 페미니즘의 혜택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일상에서 여성들은 과연 페미니즘을 생각하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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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않는 그녀들>의 한 장면 |
<멈추지 않는 그녀들>의 주인공은 인도 봄베이의 유일한 여성 택시운전사를 비롯해 노동조합, 출판사, 여성발전센터 등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페미니스트들, 그리고 연애를 하고 결혼한 평범한 커플, 남녀공학에 다니는 남학생과 여학생들을 찾아다니며 페미니즘에 대한 그들의 목소리를 담는다. 여기에 채팅방에서의 논쟁과 함께 주인공이 페미니즘을 고민하고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겪는 물음들과 혼란스러움이 덧붙여진다. 카메라에 담긴 수많은 목소리와 공간들만큼이나 이를 표현하는 방식 역시 다양하다. 이모티콘이 난무하는 채팅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컴퓨터 화면, 주인공이 상상해본 가상의 상황들을 보여주는 픽션들과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혼란스러운 질문들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그래픽 등은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발랄하게 또 때로는 진지하게 페미니즘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멈추지 않는 그녀들>은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 혹은 우리는 왜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정답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페미니즘을 고민하기 시작한 주인공 여성을 따라가다 보면, 페미니즘 혹은 여성 운동이 이 사회에서 발휘해온 영향력과 효과들, 그리고 그것이 바꾸어낸 변화들, 한편으로 여전히 지난하게 남아있는 과제들을 새삼 돌아보고 생각해보게 된다. 남자노동자들이 훨씬 많은 노동조합에서 리더 역할을 하는 활동가를 비롯해 각계각층에서 페미니스트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지만, 여전히 한편에서는 결혼지참금으로 인해 죽는 여자들이 존재하고, '우리'와 '가족'을 강조하는 가부장제가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받는 차별은 참을 수는 없지만 남을 위해 희생하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는 없다고 말하는 여성이나, 여성들이 미니스커트나 민소매 옷을 입는 이유가 남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가 아니냐고 반문하는 남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나는 다른 페미니스트의 노력과 운동의 혜택을 고스란히 받기만 해도 괜찮은 걸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는 것이다.
3월 인권영화 정기상영회 반딧불은 <멈추지 않는 그녀들>의 상영과 함께 이러한 여성의 고민들을 함께 풀어내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다. 영화 상영에 이어 조이여울 씨와 함께 하는 부대행사를 통해 그저 부담스럽기만 한 꼬리표나 동경의 차원에서의 페미니즘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에서 페미니즘을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졌으면 하는 바램에서이다.
2월 반딧불, '절반의 진실, 강요된 용서'를 넘어 후기
나 윤
지난 2월26일 영상미디어센터에서 ‘절반의 진실, 강요된 용서를 넘어’라는 제목으로 열린 칠레의 과거사 청산을 다룬 영화 ‘피노체트 재판’ 상영회에 다녀왔다. 미디액트의 작은 상영관에서 약 한시간 반 동안 영화가 상영되었다. 그 시간이 나는 한시간 반 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다. 피노체트 재판이 보여준 시간의 역사와 무게가, 결코 짧고 가볍지 않기 때문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칠레의 아옌데 정권을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독재정권을 수립한 피노체트와 군부정권이 행했던 일들과 가려진 세월을,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그들의 ‘생존’과 ‘기억’과 ‘말’을 통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과거사 청산을 둘러싼 논란과 진실을 향해가는 여정은 한국도 현재 진행형이다. 여전히 진행형이며, 그것이 왜곡의 논리로 덧칠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과거사 청산과 관련한 가해자들을 옹호하려는 논리뿐 아니라, 과거사 청산이 ‘평범한 사람들’과는 관계 없는 일이라는 통념들도 과거사 청산이 넘어야 할 벽이다. 과거사 청산과 관련한 기사가 인터넷 기사에 실릴 때면 ‘지나간 일을 이제와서 들추어서 어쩌자는 것이냐, 어차피 소수의 문제이다, 사회 갈등을 부추길 뿐이다.’와 같은 논리로 마치 없었던 일인듯 덮고 넘어가면 사라지는 문제라는 발언들을 보게 된다.
피노체트 정권 고문의 생존자 가브리엘라는, 영화를 통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군부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의식속에 독재가 살아 있는 것이 가장 힘들어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잊는게 더 낫지 않아요? 당신은 용서해야 해요. 그러나, 고통을 당한 사람만이 용서할 자격이 있어요, 아무도 대신할 수 없죠. 용서를 빌어올 때만이 용서할 수 있어요.”
1985년에 피노체트 정권에 의해 두 아들을 잃은 루이자는 이렇게 말했다.
“살아 있는 것이 복수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고통으로 한번 죽었기에, 다시 일어서서 인간처럼 느끼는 것. 제가 할 수 있는 복수는 젊은 애들을 만나는 거에요. 청년들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전하는 거죠. 우리를 없애고, 우리의 생각을 없애려 했고, 또다른 사회,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우리의 생각을 뿌리채 뽑아버리려했던. 그러나 그들은 실패했어요. 그러한 생각들은 여전히 살아있으니까요."
한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진실과 ‘정의’가 아니라, 진실과 ‘화해’를 말하는 과거사법은 어떠한가. 그것은 누구에 의한 진실이며, 누가 원하는 화해인 것인가.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뒤로 가고 보상부터 말하고 있거나, 공소시효 배제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채 과거사 청산을 진행하려는 현실은, 역사적 진실과 사법적 진실 모두를 가로막는 벽이다. 또한 과거사가 소수 당사자의 문제이지, 한국사회와 무관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통념들도 또다른 가해이다.
피노체트 재판은 결코 떠올리기 쉽지 않은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그녀의 입을 열어 전달하는 가브리엘라의 말로 끝을 맺었다.
“기억이 역사적인 재판을 하겠죠. 고문을 가한 모든 가해자들과 그걸 지지했던 모든 민간인들, 그리고 여전히 변호하는 사람들, 그 일에 동의했던 사람들, 오늘에조차도 여전히 권좌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망각하려 애쓰는 사람들. 전 믿어요. 기억의 힘이 우리를 돕고 치료할 거라는 것을. 그것이 집단적 기억이 중요한 이유죠. 오늘을 살고 내일을 건설하기 위해서."
카메라를 통해 나를 바라보던 가브리엘라의 시선이 기억난다. 우리는 기억해야 하며, 진실을 찾아야 한다. 기억의 힘이, 오늘을 살고 다시 또 내일을 살게 할 것이다. 가브리엘라의 말처럼. 기억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