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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평론 13호> 한국 매춘 여성의 연대와 집단화

민경자(충남여성정책개발원 정책개발부장)

* 이 글은 전남대학교 5.18연구소에서 수행한 '소수자운동과 민주주의의 질적 확장'이란 공동연구의 일부로『민주주의와 인권』2권 1호에 수록된 글을 수정 요약한 것이다. 많은 분들과의 인터뷰를 하여 쓴 글이지만 일일이 주를 달지는 않는다.

1. 들어가며 - 매춘여성운동에 물어야 하는 것

매춘여성은 레즈비언과 마찬가지로 성(sexuality)적인 소수자이다. 레즈비언이 가부장제의 이성애 규범을 어긴 소수자라면, 매춘여성은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에게 부과하는 순결 규범을 어긴 소수자이다. 매춘여성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윤리가 땅에 떨어진 ‘짐승만도 못한’, ‘도덕적으로 타락한 여자’로 인식되고 있다. 매춘여성이라는 혹은 매춘여성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그 여성의 사회적 입지는 완전히 소멸되고 만다.

이들에 대한 폭력은 매춘여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낙인으로 인해 범죄시되지 않고 있다. 또한 매춘이 포주의 감시와 통제 속에서 이루어지고 손님의 폭력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기에 매춘여성들은 늘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더구나 매춘행위는 불법이기 때문에 매춘여성은 아무리 억울하게 폭력을 당했어도 법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다. 이러한 약점 때문에 이들에 대한 착취와 폭력에는 그 한계가 없다(원미혜 1997).

매춘여성에 대한 이러한 낙인과 비하는 매춘여성관련 정책에 의해 강화되는데, 국가는 매춘업을 죄악시하고 매춘여성을 ‘윤락녀’로 지칭하여왔다. 또한 이들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강화시키면서 이들을 범법자로 취급하는 등 처벌정책을 쓰고 있다.

매춘여성에 대해서는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 되어 있다. 매춘여성에 대해 관심을 가져서도 안되고, 이들을 연구하는 것도 이상하며 더구나 이들의 인권과 복지를 위한 정책을 수행하는 것은 더더욱 이상하게 여겨지고 있다.

이렇듯 매춘여성의 ‘존재’는 사회적으로 은폐되어 있고 사회구성원으로서는 물론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마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사회적 소외로 인해 이들의 삶은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빠져나오지 못하는 ‘뺏벌’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매춘여성들의 절실한 문제는 사회적 비하에서 벗어나고 자신들의 인권과 생명을 보호하는 일이다.

이와 같이 ‘매춘’이라는 극단적으로 소외된 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려 가는 매춘여성들은 스스로 낙인된 정체성 이외의 다른 정체성을 찾기 힘들고 사회적 낙인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기 어렵다. 이런 의미에서 매춘여성은 여성집단 중에서도 가장 소외된 집단이며 소수자 중의 소수자라고 할 수 있다.

인권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 구성원의 권리마저 박탈당하고 있는 우리 나라의 매춘여성에게는 ‘매춘직업을 가진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보다 ‘인권을 지닌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이 우선시 될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도 우리 나라에서 매춘여성이 매춘을 직업으로 인정해 달라는 움직임은 없었다. 다만 자신들의 노동이 착취당하는 것에 대한 저항과 인간으로서의 기본권마저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저항만이 존재해왔다.

따라서 매춘여성에 대한 질문은 다른 소수집단과는 달라야 한다. 즉 현재 우리가 매춘여성에게 질문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정체성을 어떻게 만들어 가는가’가 아닌, 이렇듯 열악한 환경에서 ‘어떻게 자신들의 인권을 수호하고 있는가’여야 한다. 여성의 일부가 매춘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는 현실에서 매춘여성들의 인권이 어떻게 무시당하고 매춘여성들은 어떻게 여기에 저항해 왔는가하는 문제를 우선 제기해야 한다.

이 글은 매춘여성들이 극단적인 소외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인권을 찾아가는 과정을 중심으로 ‘매춘여성’ 집단의 사회적 지형 변화를 탐색하려고 한다. 매춘여성들이 사회적 낙인 속에서도 자신을 받아들이고 미약하나마 집단의식을 형성해 연대와 조직화를 이루어내며 스스로의 권익을 보호하고 인권을 수호하기 위한 집단행동을 만들어 가는 일련의 과정을 기술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글은 매춘여성들이 ‘피해자’, ‘희생양’으로서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들의 이익과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능동적인 존재라는 관점을 견지하려고 한다.


2. 한국에서 매춘여성으로 산다는 것
“나는 이미 내가 아니다.”

많은 매춘여성들은 자의든 타의든 성관계의 경험과 성폭행 등의 경험으로 순결을 잃었다거나 타락했다는 죄의식과 자기비하에 빠지게 된 뒤 매춘여성이 된다(김미경 1987; 유영님 2001; Moon 1997). 이러한 매춘여성의 주된 유입동기로 성폭력 등에 의해 ‘이왕 처녀가 아니니 돈이나 벌자’ 는 식의 여성들의 내면화된 정조이념이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강영수, 1989, 71ꠏ74). 매춘여성들은 유입초기부터 이미 매우 부정적인 자아인식을 갖고 있다.

더구나 이들은 가족으로부터도 외면을 당하고 있다. 매춘여성들 중에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거나 동생들의 공부를 가르치기 위해 매춘여성이 된 여성들도 많다. 이들의 가족에 대한 희생정신은 대단히 강하지만*주) 그러나 가족들은 거의 대부분 이들을 외면하고 있다.

*주) {{ 매춘여성들의 이야기 중에는 가족에 대한 희생, 가족으로부터의 배신, 가족에 대한 분노 등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두레방 2001).}}

가족들은 그들이 자신들의 가족이라는 것을 수치스러워한다. 매춘여성이 뒷바라지 해 준 동생은 누나가 결혼식에 오는 것을 싫어할 뿐 아니라, 납치되었다가 구출되어 3개월 후에 돌아 온 여성에게 부모들은 함께 교회 가는 것도 부끄러워하고 친척집에 가는 것도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사촌 한 사람은 ‘우리 집 근처에는 오지도 말라’고 했으며,(이옥정․엄상미 2000, 72ꠏ73 ; 다카기․박혜정 1995) 그들이 죽었을 때조차도 ‘누가 볼세라 서둘러서 시체를 인수해 화장을 하고 돌아갔다’(이옥정․엄상미 2000, 63). 거듭되는 타인으로부터의 배척에서 형성된 낮은 존중감과 무력감은 매춘여성들을 자기 비하에 빠지게 만들고 모든 게 자신의 탓이라는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한다.

이러한 타인의 배제와 자신의 죄의식 속에서 매춘 여성들 대부분은 예명을 쓰고 있으며 ‘십 년을 넘게 알고 지낸 사이여도 서로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주)’고 한다(이옥정․엄상미 2000, 21). 때로 자기 자신도 스스로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잊고 산다. 이들에게 탈매춘은 ‘제 이름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기쁨’으로 인식되고 있다(한국교회여성연합회 1988, 39).

*주) {{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자신을 이전의 정체성에서 분리하는데 중심적인 행위이자 여성들이 세상과 자기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생존전략이다 (Barry 1995).}}

또한 매춘여성들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외모를 다르게 보이려고 애쓰기도 한다. 그 이유는 “행여 ‘사라진 자식과 동생과 누나와 언니’를 찾아 나선 가족들에게서 몸을 숨기기 위해 그처럼 다르게 치장”해야 했던 것이다(새움터 소식지 11호).

그러면서도 이들은 대단히 자기 모순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매춘여성들은 가부장 사회에 깊숙이 배어 있는 규범인 순결․정절 이데올로기를 수용함으로써 모순적인 자아 정체감을 지니고 있다. 즉 한편으로 자신들을 버린 여자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남성의 성욕을 위해 매춘여성은 있어야 한다는 성의 이중규범을 내재화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기지촌 여성들은 자신들이 한국인 여성들을 강간과 미군의 성적 학대로부터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매춘여성들은 자립적이고 대항적인 자기 긍정적인 모습과 보호를 필요로 하는 의존적인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오지연 1997, 64). 또한 자신이 매춘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심리가 있다. 그래서 매춘을 통해 관계하는 미군들과의 관계를 연인관계라고 믿고 싶어한다. 미군들은 이런 심리를 알고 화대를 지불하지 않고 동거하면서 그녀들을 이용하는 사례도 많다.*주1) 이러한 모순은 비난과 경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매춘여성들의 생존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주2)

*주1) {{ 정희진. 1999. ꡔ1997년도 새움터 사업평가자료ꡕ(미간행). 319쪽에서 재인용.}}
*주2) {{ 오지연은 그의 연구에서 매춘여성들의 모순된 모습과 다양한 생존전략을 잘 분석하고 있다(오지연 1997).}}

대부분의 매춘여성들의 꿈은 ‘결혼’이다. 결혼은 자신들에게 이른바 ‘정상적인 삶’을 주고 가족구성을 통해 자신들을 ‘정상적인 여성’으로 만든다고 믿는다. 이들에게 결혼은 일종의 ‘신분상승’인 셈이다. 결혼에 대한 갈망은 ‘보통여자’, ‘평범’에 대한 이들의 갈망과 탈매춘에 대한 갈망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주)

*주) {{ 매춘여성에 대한 사례 및 연구를 통해 이런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Moon 1997 ; 이옥정․엄상미 2000 ; 두레방 2001 등 참조).}}

그러나 그들은 자신에게 따라 다니는 ‘윤락녀’라는 낙인과 또 돌변하는 남편의 태도와 구타, 생계를 꾸리지 못할 정도의 저임금 등을 견디지 못하고 많은 경우 다시 매춘생활로 돌아오는데, 매춘생활이 그들에게 바깥세상보다 편했던 것이다.

‘다들 당했다. 짓밟혔다고 생각하면서 그 구렁텅이에서 빠져 나오질 못한다. 의지가 약해서 안타깝다’는 어느 탈매춘 여성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매춘에서 벗어나기는 대단히 어렵다(강영수 1989, 106). 매춘여성들이 탈매춘하기 어려운 이유는 사회적 비난이나 왜곡된 인식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자신감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전직 매춘여성은 ‘이 세계는 한 번 들어가면 머리가 하얗게 세어야만 나올 수 있는 곳’(김연자 1997, 24ꠏ25)이라고 하였다.


파편화된 삶

대부분의 매춘여성은 낙인과 폭력으로 인한 극단적인 소외 속에서 파편화된 상태로 살고 있다. 이들을 ‘인간’으로 존중하며 동등한 처지에서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며 대부분의 매춘여성들은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을 만한 대화 상대자조차 없는 실정이다. 언제 배신당할지 모르는 불안정한 분위기에서 매춘여성들은 어떤 관계도 맺으려고 하지 않는다.

될 수 있으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스스로를 지키고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알아간다. 사회와 동료를 향해 마음의 문을 닫고 또 말하고 싶은 자신의 내면과의 조우를 차단한 채 소외된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이 스스로를 차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손님, 포주, 경찰의 감시와 협박, 그리고 폭력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그들에게 인간관계의 모든 가능성을 말살시켜 버린다. 믿음이 싹틀 자리가 없다. 심지어 자신들을 위해서 일하는 단체의 활동가를 만나도 피할 정도이다. 이들을 위해 일하는 단체인 두레방을 찾아오는 기지촌여성들을 포주들이 가두어 놓고 때리거나 협박했기 때문에, 기지촌여성들은 길거리에서 두레방 활동가를 만나도 일부러 모르는 척하기도 하였다(정희진 1999, 315). 이러한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조직을 만들고 운영한다는 것은 어렵다(강영수 1989, 121).


변화가 시작되다

이렇듯 무력화되고 개별화된 여성들 사이에서 느슨하긴 하지만 연대가 형성되고 모임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고 보듬기 시작했으며 서로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갔다. 또한 너와 내가 같은 존재라는 동류의식을 갖고 상호 협조망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매춘여성을 무력하게 만든 바로 그 상황이 그들에게 자의식 계발의 계기를 제공하고 자신들의 문제에 직면하게 하였다. 즉 그들은 자신을 무력하게 했던 매춘여성에 대한 사회적 비하, 여성 억압적인 가치관, 그리고 자신들에 대한 자의적 규정의 부당함을 깨닫고 이에 분노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그들은 삼삼오오 함께 하면서 생존을 위해 협력관계를 맺기 시작하였고 그들 자신을 조직화하기 시작하였다. 이러는 과정에서 그들은 리더를 배출해 냈고 자신들의 권익과 인권을 위해 집단적 저항을 시작했으며 드디어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 살펴보자.


3. ‘우리’ 만들기

매춘여성들은 여러 가지 단계를 거쳐 자신들 사이에서 ‘집단’을 만들어 갔다. 먼저, 일상 속에서 형성되는 동류의식을 들 수 있다. 함께 살지는 않더라도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기지촌여성이건, 포주의 집에서 함께 거주하는 매춘여성들이건, 그들은 서로 얼굴 정도는 알고 지낸다. 일상 생활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서로서로 조언을 해 준다. 기지촌여성들의 경우에는 기지촌의 상황이나 미군을 상대하는 법, 미군들의 특성 등에 대한 정보를 교환한다. 임신, 낙태 등도 그들이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주요한 이슈이다. 친하게 어울리는 여성들끼리 모여 생활의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 이런 일상적인 교류 속에서 ‘우리’라는 동류의식이 존재하며 보통의 사람들과 비교하여 ‘우리 같은 사람들’로 자신들을 동일시한다. 이런 동류의식은 소외된 생활을 하고 있는 매춘여성들에게 아주 소중한 위안이 되고 있다(오지연 1997, 56). 매춘여성들의 집단의식은 이러한 정서적 공동체 의식을 시작으로 점차 ‘조직’적인 모양을 띠게 된다.

그들은 ‘우리’의 기준, 즉 조직 내부의 원칙을 존중하고 이를 지키고자 한다. 그들은 내부에서 평소의 행실이 비도덕적이거나 신뢰할 수 없는, 또는 다른 매춘여성들의 ‘값’을 떨어뜨리는 여성들을 ‘진짜 창녀’라 하여 비난하며 자신들과 분리하기도 한다(오지연 1997, 56). 이들이 자신들과 분리한 ‘진짜 창녀’는 믿었던 친구를 배신하고 애인을 가로채는 여성, 빌린 돈을 갚지 않는 여성, 화대를 조금 받고 매춘을 하는 여성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분리는 일종의 자체 질서 잡기로서 매춘여성들 간에도 최소한 지켜져야 할 규범과 기준이 존재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을 억압하고 자신들을 이간질하는 환경에 민감하여 연대의식을 견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주). 군산에서 지역 매춘여성들이 필리핀 매춘여성들의 활동을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는 매춘여성들이 이권 싸움하는 것으로 비춰지기도 했지만, 관계자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지역의 매춘여성들이 집회를 진행한 것이 아니라 지역의 이익집단(포주, 지역상인 등)들 간의 상권다툼이었다. 해당 지역에서 살고 있는 매춘여성들은 오히려 외국인 매춘여성들의 편에서 포주를 비판하고 있었다.

*주) {{ 김현선과의 인터뷰.}}

매춘여성들의 집단의식은 이러한 정서적 유대와 의식적 연대에서 행동으로 발전한다. 이들은 서로 탈매춘을 도와주거나 빚을 갚아주기도 하고 힘을 합하여 악덕 업주에 항의하기도 하며 자조모임을 꾸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을 한 세 사람의 사례를 들어보자.

먼저, 1980년대 후반 의정부 기지촌의 한 악명 높은 클럽에서 일하던 서정아는 학벌이 낮은 여성이나 청각장애가 있는 여성들을 데려다가 적은 월급을 주면서 이용하고 이중장부까지 만들어서 이중으로 착취하는 포주에 맞서 싸웠다. 서정아는 포주의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여성들을 설득해 포주에게 이중장부에 대해 따지면서 권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또 다른 여성들과 함께 빚을 갚기 위한 계를 조직했는데 그녀는 먹는 것까지 아껴가며 돈을 모았다. 그렇게 해서 열 명이 넘는 여성들의 빚을 갚아주었고 그 여성들이 클럽을 나간 후에 직장을 구하는 일이나, 결혼하는 일까지 보살펴주었다. 기지촌에는 알려지지 않은 이런 제2, 제3의 서정아가 많이 있다(김현선 1997, 13).

현아 역시 가짜 장부를 이용해 여성들에게 적은 보수를 주고 있는 클럽에 항의하여 싸웠다. 또 포주에게 당하는 아가씨가 있으면 대신 싸워주기도 하고 여러 가지 도움을 주기도 했다. 클럽생활을 그만두고 싶지만 빚 때문에 그만두지 못하는 친구를 도와 “그 날부터 모든 수입을 합해 꼭 필요한 생활비만 지출하면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현아의 도움으로 그 클럽을 빠져 나온 사람이 세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유영님 2001, 52).

은자는 한국의 미군 전용 클럽에서 일할 때 계를 조직해서 다른 기지촌 여성들의 빚을 차례로 갚아 10여 명의 여성을 클럽에서 나가게 도와주었다고 한다(김현선, 새움터 소식지 1997.12).

기지촌 여성 중에는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로 돕고 고통을 나누면서 자신의 환경에 대해 일상적인 저항을 해가고 있는 현장 여성들이 많다(정희진 1999, 313). 매춘여성들이 서로 도와주는 방식은 집단동거, 탈출, 탈매춘 등 대단히 다양하다. 매춘여성들은 도망치는 일도 서로 돕고 있다. 혼자 도망치는 것은 위험하고 어렵다. 또 용기를 내기도 어려워 리더쉽 있고 용기 있는 여성이 주도하여 함께 도망친다. 매춘여성들은 도망치는 것 이외에도 탈매춘을 서로 도와주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생긴 연결망은 차츰 매춘여성들간의 자치적인 자조모임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4. 조직화 및 집단행동

고개 드는 자의식

매춘여성의 자의식의 발달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나타난다. 인간 이하로 취급받는데 대한 분노 표출, 자신들에 대한 존중감 요구 및 자의적 규정에 대한 항변, 자신들의 인간적 존엄성 주장 등이다.

먼저, 그들은 손님들이 자신들을 ‘공중변소 갔다 나온 기분’으로 대하는데 분노하며 “고객은 사람 취급 안 한다. 인간 이하로 취급한다. 나야 그렇지만 니들도 인간이 아니다…. 나도 꿈이 있고 희망이 있는데…”라고 절규한다(강영수 1989, 80 재인용). 또한 그들은 매춘여성이 자기 존중감이 없는 것은 가부장제에서 여자는 부모님말씀 잘 듣고 식구부양하고 결혼 전 순결을 지켜야 착한 여자라고 배웠기 때문이라고 바라보며 점차 ‘착한 여자는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라고 깨닫게 된다(다카기․JT․박혜정, 1995).

기지촌 성매매의 실태와 기지촌 여성들의 삶을 가시화시킨 최초의 기지촌여성운동가인 김연자는 한국 사회에서 기지촌여성이 다루어지는 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기지촌여성을 ‘인간 이하’로 보는 것, 동정하는 것, 반미의 상징으로 이미지화 하는 것, 제국주의 침략의 가장 큰 희생자로 보는 것에 모두 반대하였다(정희진 1999, 309). 그녀는 매춘여성은 “동정의 대상도 멸시의 대상도 아니다. 끊임없이 인간답게 살고 싶어하고 단란한 가정과 행복을 꿈꾸는 평범한 사람들이다.”라고 주장하였다(김연자 1995, 26).

1960․70년대 정부는 외화 획득과 미군의 주둔을 위하여 매춘여성들을 미군에게 만족을 주는 애국자이며 외화를 벌어들이는 ‘민족주의자’니 ‘민간대사’니 하며 추켜세웠다. 그러나 매춘여성들은 오히려 기지촌에서의 그들의 역할을 애국적이라고 부르는 정부에 대해 모욕감을 표현하며 정부를 비웃었다.

매춘여성들은 또한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수동적인 채로 남아 있지 않았다. 1970년대 초에 미 공군 병사들이 한국상품구매거부 운동을 하자 매춘여성들은 기지촌의 경제적․정치적 생활을 지배하려는 미국의 헤게모니에 대항하기 위해 지역 ‘조직’을 만들어 저항하였다. 즉 기지촌 공동체 안의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자신들이 극한으로 내몰리게 되었을 때는 자신들의 인간적 존엄성에 대한 의식을 드러냈던 것이다(문 1998, 206ꠏ208).

매춘여성들은 이제 개인으로서가 아닌 한 집단으로서의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의 공유를 바탕으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자신들을 갈취하는 사람들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또한 자신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생명까지 위협하는 환경에 저항하며 자신들에게 자행되는 범죄에 집단적으로 항의하기 시작했다.


타율적 조직화

매춘여성들이 조직을 경험한 것은 1960년대 초반 이후 대부분의 기지촌에서 만들어진 자치회를 통해서였다. 이태원의 ‘장미회’, 송탄의 ‘꿀벌회’, 동두천의 ‘민들레회’가 바로 이것이다(Moon 1997, 24). 자치회는 매춘여성들을 관리하고 교육하는 역할을 하며 매춘 여성들과 현지 관료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담당하는 ‘여성들의 모임’이지만, 매춘 여성의 이익을 반영하기보다는 매춘여성들에 대한 현지 한국인(포주 및 상인들)과 미군 당국의 이해를 전달하는 기능을 하였다. 김연자는 자치회는 관광협회에 정식으로 등록된 12개 클럽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단체였으며 클럽에서 일하는 여자들에게 성병 검진증을 발급해주고 검진카드가 없는 여성들을 단속하는 일을 했다고 증언한다(KBS1 1999). 또한 동두천의 민들레회의 경우, 보통 생활기금 조성과 민들레회 운영비 명목으로 정기적으로 회비를 걷어 여성들을 위해 쓰기보다는 다른 명목으로 이용되곤 하여 매춘여성들이 이를 부정적으로 보았다(오지연 1997, 34, 주 20). 즉 현실적으로 자치회가 결코 자율적인 적은 없었고, 지역 경찰과 정부 당국자들은 자치회의 대표를 선택하여 여성들의 활동을 감시하게 했던 것이다.*주) 이런 조직이 매춘 여성들의 이익을 반영하는지 여부는 리더에 달려 있었다(문 1998, 205, 주52). 매춘여성들의 이해를 대변하여 성병 진료소의 비리에 맞서 싸웠던 자치회 대표는 1970년대 군산과 송탄의 김연자와 안정리의 이정자였다(문 2001, 205, 주52).

*주) {{ 자치회의 역할에 대하여 Moon 1997, pp.24ꠏ25 참조.}}

매춘여성들이 처음으로 조직화된 것은 본인들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닌 외부적인 필요에 의해서였고, 여성들이 자율적으로 이 조직을 운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은 타율적으로 관리된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자치회가 매춘여성들에게 조직화를 경험하게 했다는 것이다. 또한 자치회를 통해 매춘여성들은 집단적인 저항을 경험했고 리더를 만나게 되었으며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집단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우리가 신발값과 같을 순 없다!”

1972년 송탄의 자치회 회원 1천여 명이 미군 성토대회를 열고 기지 정문 앞으로 몰려가 농성을 벌인 일이 있다. 미군부대 장병들이 한국 상품과 여성들의 화대가 너무 비싸다고 하면서 이를 절반 이하로 인하하라는 요구가 담긴 유인물 1천장을 배포한 것이다.

“슈스 $10, 롱타임 $10, 숏타임 $5, 가방 $5!!!” 한국의 물가가 비싸고 여자들의 몸값이 비싸다며 미군 부대 측에서 뿌린 유인물의 제목이었다. 이에 여성들은 시위를 준비했고 “구두 값하고 사람값이 같냐? 우리가 신발만도 못하냐?”하며 몰려가서 악을 썼다. 당시 시위를 이끌었던 김연자에 의하면 “분노하는 여성들의 마음속에는 우리도 사람이라는 분노가 게거품 같은 침과 뒤섞여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고 한다(김연자, 새움터 소식지 1997.12). 미 공군은 이들의 시위에 맞서 소방차의 호스로 물을 뿌려 매춘여성들은 그 물줄기에 맞아 속옷까지 다 젖고, 서로 홀에서 교합했던 미군과 적이 되어 싸웠다(안일순 1993, 150). 이 데모는 기지촌 여성들이 ‘우리도 인간이다’고 외친 최초의 몸부림이었다(김연자 1995, 18).


“개처럼 카드를 목에 달라니!”

매춘여성들을 억압하는 또 하나의 체계는 이들에게 강제되는 성병검사였다. 기지촌여성의 경우 클럽에서 일을 하려면 한 달에 한 번 성병검진 진료소를 들러야 했다. ‘이상 없음’이라는 보건증을 받아야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빙자로 매춘여성들의 인권을 모독하는 일들이 자행되었고 성병검사를 둘러싼 비리가 성행하였다.

홀 게시판에는 성병검사에 합격한 여성들의 번호가 매겨져 있었고 클럽 입구에는 얼굴 사진과 함께 검진표가 전시되어 있었다. 여성들은 성병검사표를 가슴에 달아야 했다. 이를 어길 경우에는 영업정지까지 내려졌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행태에 매춘여성들은 모독감에 치를 떨며 “성병검진카드를 목에 걸고 다니라고 한다. 어떻게 사람이 개처럼 그럴 수 있나?”하며 항변하였다(이윤경, 다이애나 리 1995).

또한 검사결과 이상이 있으면 곧장 산 속에 있는 ‘성병수용소’에 감금되어 철 침대에 하루종일 묶여 있어야만 하며 게다가 미군이 성병에 걸리기라도 하면 미군 홀에 있는 여자들은 집단으로 성병 검진을 받아야 했다. 이런 통제 속에서 매춘여성들은 스스로가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함을 느꼈고 마치 ‘달러 몇 푼에 돼지우리 안에서 사육되고 있다’는 모멸감을 느껴야 했다(김연자 1997, 18). 또한 돈을 주는 조건으로 성병검사와 매달 한 번씩 있는 엑스레이 검사에 대한 허위 확인증을 받는 등 홀 주인, 포주, 그리고 정보과 직원들, 성병진료소와 자치회간에는 뇌물이 오고 가는 등 각종 비리가 난무했다.

김연자는 이런 보건소의 비리와 매춘여성들의 인권을 유린하는 행위에 저항하였다. 그는 자신들도 엄연한 대한민국 국민이고 인권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항변하며 철마다 자치회에서 경찰서 정보과로 상납하는 돈 봉투며, 월마다 보건소로 상납되는 돈 봉투, 성병검진과정의 부정, 자치회의 부당한 운영 등을 밝혀내고 자신들의 빼앗긴 권리를 찾고자 총궐기를 부르짖었다.

김연자는 그 동안 모아 둔 적금을 깨고 땅을 팔아, 자치회의 비리와 성병 검진과정의 부정을 고발했지만 결국 공범자가 되어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그 일로 보건소장이 물러나고 보건소 방역계장과 자치회장이 구속되고 보안과장이 좌천되었다(KBS1 1999).

이러한 투쟁이 비단 송탄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른 지역 여성들도 그런 투쟁을 했다고 한다.


“우리를 함부로 하지 마라”

매춘여성들의 삶은 ‘억울함’ 그 자체이다. ‘윤락녀’이기 때문에, 또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을 함부로 해도 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고, 따라서 일상적으로 그들은 ‘억울함’을 경험하고 있다. 창녀이기 때문에 돈만 주면 그녀의 동의가 필요 없다는 손님의 인식과 태도로 인해 그들은 손님들로부터 함부로 취급당하고 화풀이의 대상이 되며 ‘창녀’로 비난당한다(오지연 1997). 범죄 신고된 미군들은 적반하장격으로 매춘여성들을 구타하거나 강간하는 등 보복을 일삼았다. 또한 포주들은 장사가 안 된다고 그녀들을 괴롭히거나 다른 곳으로 팔아버리는 사례가 많았다. 매춘여성들은 이에 억울함을 호소하며 항의했고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범죄에 대해 집단적으로 저항했다.

일례로 억울하게 미군에게 성병을 옮긴 장본인으로 지목 당한 여성이 당하고 있지만 않겠다며 긴 손톱으로 미군의 얼굴을 할퀴었고 이 일로 인해 그녀는 의정부 경찰서로 끌려가 구류 처분을 받는 사건이 있었다. 이에 기지촌 여자들은 부대 앞에 모여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누가 선동하지 않았는데도 너나 할 것 없이 몰려들어, 부대정문을 막고 그 앞에 드러누워 항의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새움터 소식지 11호).

일상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미군범죄에 대해 자신들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려 한 매춘여성들의 저항은 오래 전부터 진행되었다. 200여명의 매춘 여성들은 1971년 7월 16일 기지촌 여성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던 미군의 즉각 체포를 요구하며 몽둥이를 들고 기지 앞에서 시위를 벌인 일이 있었다. 이들은 부대 앞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기지촌 여성의 장례를 지내고 살인자 이름을 외치면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문 1998, 203).

이후에도 수많은 기지촌여성들이 미군에 의해 비참하게 죽어갔지만, 사건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잡아떼는 미군 앞에 물증 없는 매춘여성들은 그저 넋 놓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으며, 한국 경찰은 미군과의 관계가 불편해 질 것을 두려워하며 사건을 덮어두려고만 하였다. 이에 여성들은 증거를 확보하여 범인을 잡으려고 하였다. 예를 들면 김연자는 1977년 동료 이복순이 안테나에 목이 감긴 채로 불에 타 죽어갈 때 녹음기를 그녀의 머리맡에 장치해 놓고 누가 그랬는지 말을 시켰지만(김연자, 새움터 소식지 15호) 증거가 없어 범인을 잡지 못했다. 한달 뒤 옆방에 살던 이영순이 칼에 찔려 죽었을 때 김연자는 증거가 없어 억울하게 묻혔던 이복순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바로 문을 걸어 잠그고 경찰에 신고했던 것이다(김연자 1997, 22).

이렇듯 비참하게 죽은 동료의 시체 부검이 끝나자 누군가가 ‘부대로 쳐들어가자’고 소리를 질렀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또한 ‘죽여!!’ 하는 함성이 곳곳에서 일었다. 그녀들은 삼삼오오 떼를 지어 부대로 뛰기 시작하였다. 오백여 명의 여자들이 그 길고 긴 저수지를 어떤 이는 맨발로, 또 어떤 이는 신발 한 짝 신고, 아우성 치며 달려가는 모습은 마치 장중한 한편의 영화장면 같았다고 한다. 분노한 여성들은 미군용 트럭을 뒤집어엎었고, 이에 당황한 미국 헌병들은 그녀들을 방망이로 마구 두들겨 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밤새도록 모깃불을 피워놓고 부대 앞에서 데모를 했다.*주)

*주) {{ 이 사건과 매춘여성들의 시위에 대해서 김연자 1997 ; 김연자 새움터 소식지 16, 2ꠏ4쪽 ; 안일순 1993, 5ꠏ6쪽 참조.}}

그 후에도 많은 여성들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지만, 대부분 진상이 규명되지 않았고 범인 체포 없이 그냥 묻혀져 갔다.*주1) 매춘여성들의 비참한 죽음이 국민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1992년 10월에 발생한 윤금이 살해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그 잔혹한 살인수법으로 인해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으며*주2) 이 사건으로 국민들은 분노했다. 동두천의 시민단체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이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사건의 진상을 전국적으로 알려나갔다.

*주1) {{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1999, “기지촌 여성살인사건 관련 성명서” 새움터 소식지 2000.4.28. 3ꠏ4쪽 참조.}}
*주2) {{ 윤금이 살해사건과 사건해결을 위한 활동에 대해서 정유진․조재학(1994), 주한미군범죄근절 운동본부(1999), 주한미군의 윤금이씨 살해사건 공동대책위원회(1993) 참조.}}

동두천 유사이래 최대규모의 집회였던 시민규탄대회가 미2사단 정문 앞에서 열렸고 이 대회에 많은 기지촌 여성들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미군철수문제가 시기상조라고 판단한 여성단체들의 구호에 불만을 표시하기도 하며 집회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김현선 1997, 13ꠏ14). 기지촌여성들은 “그 새끼 불러다가 여기서 목매달아라, 우리 여성들 죽이지 말고 니네 나라 다 가라” 하며 분노를 표출하였다.


5. 우리만의 모임, 우리만의 공간 만들기

매춘여성들에 의한 자조적인 움직임은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먼저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함께 살지는 않더라도 모임을 만들어 자조적인 생활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꿈에도 소원은 우리 공간을 마련하는 것

기록에 나타난 최초의 매춘여성 공동체는 군산에서 만들어졌다. 앞서 말한 군산에서의 이복순․이영순의 죽음 이외에도, 물에 빠져 죽고, 연탄가스에 중독 되어 죽고, 화상 입어 죽고, 질식해서 죽는 등 많은 여성들이 줄줄이 죽어나갔다. 이는 매춘여성들에게 대단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김연자는 “더 이상 이러고만 있을 수 없다. 우리도 살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더 이상 미군을 상대하며 살아가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기독교를 통한 정신적 전환을 맞게 되었다. 이들은 클럽에서 입던 요란한 옷을 태웠다. 그리고 돈을 모두 털어 타운 근처 공터를 사서 그곳에 천막을 치고 ‘안식처’를 만들었다. 기지촌여성들만의 작은 쉼터였다. 하나 둘씩 모여드는 여성들 사이에 참된 자매애가 싹트고 그들은 서로를 아끼며 다시 태어난 느낌을 맛보았다(안일순 1993, 153 ; KBS1 1999).

그들은 천막에 ‘백합선교회’를 만들었다. 그들은 밤마다 모여 기도하고 통곡하고 하나님을 찾았다. 시끄럽다는 마을 주민들의 신고로 들이닥친 경찰들과 싸워야 했다. 그러나 “우리들의 유일한 쉼터이자 위안처였던 이곳을 절대 내줄 수 없었다”*주)고 한다(김연자 1997, 24).

*주) {{ 천막공동체를 마련하기까지의 어려웠던 과정이 김연자의 연재 글 ‘살고 싶으면 똥을 퍼내라’에 잘 묘사되어 있다(새움터 소식지 17)}}

이 천막교회가 씨앗이 되어 또 다른 쉼터가 탄생하였다. 천막생활을 하면서 김연자는 전라신학대학을 졸업하여 전도사가 되었고 1989년 송탄에 ‘참사랑 선교원’이라는 기지촌여성 쉼터를 마련했다. 이 쉼터는 매춘여성들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주고자 설립된 것으로 혼혈아들에게 공부방을 마련해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매춘여성들의 자활을 지원하였다. 그 후 1992년 학생운동가, 두레방 자원활동가 출신들과 결합하여 ‘참사람 쉼터’라는 이름으로 정식 개원하게 되었다(김연자 1997, 24 ; 정희진 1999, 312).

자치적인 자조모임: 개나리회

매춘여성들의 내적 연대는 차츰 자치적인 자조모임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자치적인 자조모임은 어떤 공식적인 조직을 가진 것도 아니고 운동을 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어떠한 기록도 없다. 다만 매춘여성들을 위해서 같은 지역에서 일했던 활동가나 나이 많은 매춘 여성들의 입을 통해서만 알려질 뿐이다.

이러한 모임 중의 하나가 용산 지역에 있었던 ‘개나리회’이다. 용산 매춘여성들의 모임이었던 ‘개나리회’는 1981년 7월에 조금이라도 인간답게 살아 보자는 뜻에서 만들어진 모임이었다.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억압하고 비하하는 사람들에게(업주들, 경찰, 기둥서방, 펨푸 등) 맨날 당하며 살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회원 250명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한 이들은 자신들의 생활부터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자기가 번만큼이라도 모으면서 살자는 뜻에서 ‘한 사람이 한 통장 갖기 운동’을 했고, 상습적인 약물 복용과 환각제 등 여성의 몸을 망치는 약을 먹지 말자는 운동도 했다. 또한 원하는 여성들을 모아 나환자 마을, 양로원, 고아원에서 봉사 활동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둥서방에게서 잘못된 일을 당하면 이에 맞서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이옥정․엄상미 2000, 19 ; 한국교회여성연합회 1988, 31ꠏ32).

‘개나리회’에서는 ‘우리 처지를 비관하기보다는,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하늘 아래서 똑같은 공기를 마시고 사는 사람들이니, 용기를 갖고 살자’는 말로 여성들을 설득했다. 한 삼 년 꾸준히 활동하니 점점 회원들도 늘어나고 ‘힘’도 생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매춘여성들이 뭉치면서 비리에 저항하게 되자 이제껏 개별적으로 일삼던 착취를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된 업주와 기둥서방, 그리고 이들 편인 경찰은 이들을 더 강하게 단속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개나리회’의 간부들을 데려다 부녀보호소에 몇 개월씩이나 수용시키곤 했다.*주)

*주) {{ 1년에 두 번 정기적으로 명절 때 상납하는 뇌물(떡값)이나 법 적용 과정에 합의조로 상납하는 돈 등에 대한 그 동안의 이권이 박탈되는 것이 아쉬워 방해했다고 함(강영수 1989, 123 주124).}}

포주, 경찰 등의 압력과 훼방, 그리고 매춘여성들의 잦은 이동으로 인해, 또한 모임을 지속하려는 내적인 자세가 충분치 않아서 결국 ‘개나리회’는 그 뒤로도 만들어졌다, 없어 졌다를 되풀이하다 결국 사라졌다(강영수 1989, 122ꠏ123; 이옥정․엄상미 2000, 20). 그러나 이름은 없어졌지만 개나리회는 내적으로는 현재 매춘여성들을 위해 활발하게 일하는 막달레나의 집으로 발전하였다.


6. 커밍아웃

위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매춘여성들의 커밍아웃(자신의 정체성 드러내기)이 시작되었다. 커밍아웃은 사회적 규범을 어겨 낙인이 찍힌 집단(동성애자․매춘여성 등)의 구성원이 자신의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행위를 말한다. 물론 지속성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한번 공개하고 다시 자취를 감추거나 다음 번에는 다시 공개하기를 꺼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번 공개 후 지속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 전자에 속하는 사람은 한번 드러낸 후 많은 상처를 입고 다음부터는 되도록 공개석상에 서는 기회를 피하는 경향이 있다. 공개석상에 선다 하더라도 자신의 과거의 전력이나 현재의 정체성을 공개하지 않는다. 후자에 속하는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드러내고 보다 적극적인 운동가로 변모한다. 전자에 속하는 여성이 후자에 속하는 여성보다 수적으로 많을 것으로 예상되나 후자보다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88년 한국교회여성연합회에서 주최한 국제세미나에 현장에서 일하는 전직 매춘여성이 강연을 하였다. 비록 용기를 내어 여러 사람 앞에 섰지만 문헌에는 그녀의 이름을 ‘000’으로 표시하였다.*주) 그녀는 “저는 현장에서 오래 살았고 그리고 잘 하는 것이라고는 욕하고 싸움하고, 술 잘먹고, 이런 아주 악한 것만 전문으로 해왔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지역에서 그렇게 악하게 살면서 몇 년 전부터 새 출발을 시작했습니다”(한국교회여성연합회 1988, 29)라며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시작했다. 교회여성들과 매춘여성의 만남은 그들간의 정서적 유대는 물론, 교회여성들로 하여금 교회가 매춘여성들의 문제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결의를 이끌어 이들이 매춘여성들의 인권과 권익보호를 선교적 과제로 채택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민경자 1999, 255ꠏ256).

*주) {{ 이러한 표기가 본인이 원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주최측에서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알아서 그렇게 표기한 것인지는 확인한 바 없다. 그러나 필자 역시 현재 현장 운동가로서 열심히 활동하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다. }}

현재 매춘여성운동을 하는 활동가 중에서 유일하게 커밍아웃하여 얼굴을 드러내고 실명으로 활동하는 사람은 김연자뿐이다. 김연자는 1964년부터 1989년까지 25년간 기지촌 매춘 여성으로 살아온 ‘현장’ 출신의 여성운동가이다. 그녀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 말까지 동두천, 송탄, 군산에서 살아왔고 또 기지촌의 자치회장을 지내면서 많은 여성들을 상담했다. 따라서 그는 기지촌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직접 지켜본 기지촌 역사의 산 증인이다(안일순 1993, 148). 김연자는 1995년 2월 뉴욕헌터대학에서 열린 한국 기지촌 여성에 관한 공개 토론회에서 어떻게 매춘여성이 되었는지를 공개하였다. 또한 아래에 언급하는 3개의 다큐멘터리에 출연하여 국내외에 자신이 매춘여성이었다는 것을 공개하며 매춘여성들의 삶에 대해 말하였다.

1995년에 매춘여성에 대한 두 개의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졌는데 매춘여성들이 여기에 직접 출연하여 자신들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하나는 이윤경(Grace Yoonkyung Lee)과 다이애나 리(Diana S. Lee)가 만든 [캠프 아리랑, Camp Arirang]이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한 기지촌 여성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서 기지촌 여성들이 어떻게 기지촌으로 흘러 들어왔는지, 매매춘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이 나라에서 정부와 미군은 어떻게 이들을 통제하고 관리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앞서 언급한 김연자가 바로 주인공이다. 김연자는 당시 53세였는데 얼굴을 드러내고 자신의 삶을 공개하였던 것이다. 자기가 매춘을 하던 군산 아메리카타운(America Town Corporation) 까지 소개하면서 11살 때 성폭행 당한 이야기, 25년간 매춘한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공개하였다. 또한 군산에서 매춘한 방까지 내보이면서 보건소 비리를 폭로한 이야기를 하고 또한 자치회에 관해 진술하고 있다. 미군들의 범죄행위에 대해 “미국 놈 말을 믿지 제 말을 믿겠어요?”하며 자신의 한 맺힌 사연을 당당한 표정으로 고발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박혜정과 J.T. 다카키가 만든 기지촌여성들의 삶을 담은 기록영화 <이방의 여인들(The Women Outside)>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1996년 미국공영 TV PBS로 미국 전역에 방송되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한국과 미국 내 기지촌여성들이 털어놓는 생생한 이야기와 이들에 대한 한미 양쪽의 다양한 인터뷰 내용과 공문서 기록, 각종 자료화면들로 구성된 것으로 미국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주)

*주) {{ ꡔ새움터ꡕ 창간호 17쪽에 이 두 편의 영화에 대한 설명이 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기지촌여성에 대한 올바른 시각이 영화 속에서 펼쳐진 적이 없었고 단 한번도 기지촌여성들의 얘기에 귀기울이지 않았던 상황에서 재미 교포여성에 의한 2편의 기록영화는 매춘여성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이 영화에 많은 매춘여성들이 얼굴을 드러내고 자신들의 목소리로 직접 기지촌에서의 삶을 이야기하였다. 실제 인물이 등장한 관계로 이 2편의 다큐멘터리는 국내에서는 공개적으로 상영되지 않고 있다.

또한 1999년에 KBS1에서 김연자의 인생을 담은 프로그램 「이것이 인생이다: 기지촌으로 간 여자」를 제작 방영하였다. 당시 김연자의 나이는 56세였다. 전국적으로 방영되는 프로그램인데도 불구하고 김연자는 또 한번 얼굴을 드러내고 인터뷰에 응했다. 성폭행 당하고 가출하고, 버스차장, 외판원, 구두닦이 등 궂은 일 다하고 기술원에까지 간 이야기를 진술하였다.

1999년에 매춘여성의 애환을 담은 최초의 본격적인 성매매 다큐멘터리(70분)가 만들어졌다. 대통령직속 여성특별위원회가 지원하고 ‘한소리회’에서 제작한 “성매매 거리에서 쓴 꿈에 관한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에서도 매춘여성들이 얼굴을 드러내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전직, 현직 매춘여성 8명이 “얼굴을 드러내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하겠다”는 열의로 제작에 참여하였다(YTN 1999). 이 다큐멘터리는 매춘여성들의 일상과 그들의 꿈에 초점을 맞추었다. 매춘여성이 출연한 다큐멘터리로서 국내 최초의 공개시사회는 대 성황을 이루었다.*주) 이 다큐멘터리 제작을 총지휘한 막달레나의 집 대표 이옥정은 “한 번도 제 목소리 곱게 펼쳐 보지 못한 이들, 아직도 부족할 테지만 비로소 동료의 입을 통해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수많은 여성들에게 이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바치고 싶다”고 고백하고 있다(이옥정․엄상미 2000, 239). 이러한 고백을 담은 다큐멘터리의 의미는 매춘여성이 당당하게 자신들의 얼굴을 드러내고 자신들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자신들의 목소리로 했다는데 있다. 이들이 얼굴을 드러내고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과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매춘여성운동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주) {{ 꿈에 관한 보고서의 취지, 만들어진 과정, 에피소드 등에 관해서 한소리회 소식지 5. 8ꠏ9쪽 ; 이옥정․엄상미 2000, 233ꠏ239쪽 참조.}}

이후 매춘여성들은 아직은 매우 소극적이고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문제를 공개화하기 시작했다. 한 예로, 2001년 3월 23일에 화재사고(2월 14일)로 8명의 인명피해를 낸 부산의 대표적 성매매지역 ‘완월동’의 매춘여성 4명이 기자회견을 열어, 비록 모자를 쓰고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긴 하였지만, 자신들에 대한 관심과 대책 마련을 눈물로 호소했던 일이 있다.


7. 합법화된 공간의 확보와 대안적 삶의 추구

매춘여성, 운동가를 만나다

이렇게 매춘여성들이 작지만 자신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매춘여성들을 돕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보다 효율적으로 매춘여성들을 돕기 위해 작은 조직(쉼터)을 만들었고 이러한 조직이 매춘여성 집단의 형성에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쉼터운동의 시작은 앞서 언급한 1984년에 용산에서 시작된 ‘막달레나의 집’에서부터였다. 1984년 카톨릭 수녀연합회 모임에서 계획한 성매매에 관한 현장교육에 미국인인 문애현 수녀가 참석하여 용산에서 일하고 있는 이옥정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988년에 사마리아의 집이 생기는 등 매춘 여성을 위한 쉼터는 증가하였다.

여성들이 스스로를 해방하며,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선교적 사명을 띠고, 기지촌 매춘여성들과 국제 결혼을 한 여성들을 위해서 1986년대 후반 의정부에서 두레방이 출범하였다(정희진 1999, 314). 또 기지촌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삶을 살고 있는 여성들과 아동들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 위해서 1996년에 새움터가 동두천에서 문을 열었다. 이 밖에 소냐의 집, 정다운 집 등이 잇달아 개원했는데 주로 서울과 경기지역에 집중되었다.

쉼터는 일차적으로 도망 나온 매춘여성에게 머물 곳을 제공하고 위로하며, 그들이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이들은 매춘여성들에게 빨리 매춘에서 벗어나라고 조급하게 다그치지 않으면서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안심하고 편하게 놀고 이야기하면서 ‘오랜 매춘 생활에서 쌓인 생활 습관과 사고 방식을 자기만의 삶으로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이옥정․엄상미 2000, 56). 쉼터는 매춘여성들의 가족, 친정, 사랑방 역할을 하면서 그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용기와 힘을 갖도록 하고 있다

쉼터 운동가들이 하는 중요한 활동중의 하나는 매춘여성의 인권을 보호하는 일이다. 현행법상 매춘여성들은 ‘범법자’이기 때문에 정부의 보호를 전혀 기대할 수 없고 매춘여성에 대한 사회복지 서비스는 거의 없다. 더구나 일부 경찰, 지역유지, 조직폭력배, 일부 관련 공무원 등이 성매매 조직과 연결되어 있는 상황에서 매춘여성들이 기댈 수 있는 곳은 비공개적으로 활동하는 쉼터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 쉼터는 매춘여성들의 인권을 보호하는데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민경자 1999, 264ꠏ265).

또한 기지촌여성들을 위한 두레방과 새움터는 이러한 일 이외에 매춘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전업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1989년에 두레방이 시작한 두레방 빵 사업은 기지촌에서 나이가 들어 생계가 막막한 여성들에게 전업(轉業)할 기회를 주고, 이를 통해 기지촌여성들도 건강한 노동으로 전업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우리 사회 최초의 매춘여성 전업 프로그램이었다.*주1) 새움터에서도 1997년 5월에 시장조사, 허브재배, 직업재활상담 등 직업재활 프로그램을 시작하였다. 1998년에 시민운동지원기금과 대통령직속 여성특별위원회로부터 탈매춘을 위한 전업 프로그램 사업으로 지원금을 받아 동두천에 허브 가공가게를 열었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여성들을 위한 공동작업장을 마련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김현선 2001, 58).*주2)

*주1) {{ 두레방은 빵 프로그램에서 당시 40대 후반의 기지촌여성을 노동자로 고용하고 이후 현장 여성 3명을 더 고용했다. 또한 이 사업을 통해 여성들과 규칙적이고 장시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집중적이고 지속적인 상담이 가능해졌고 따라서 여성들은 더욱 빠른 변화를 보였다. }}
*주2) {{ 이후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에서 ‘기지촌 지역 실직여성 다시 서기 일 공동체’라는 프로젝트로 기금을 지원 받아 현장 여성 10명을 고용하였다(정희진 1999, 328). 비록 지원금이 허브가게를 지속적으로 꾸려나가기에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지만 여성들에게 전업의 희망과 가능성을 주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2001년 6월 현재 8명의 여성이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으며 전업을 위한 상담을 진행하고 있는 여성은 20여명에 이르고있다(김현선 2001, 58).}}

또한 이들은 점차 매춘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항거하며 성매매, 기지촌여성문제 등을 ‘여성’문제로 접근한다. 예를 들면, 기지촌여성 살인사건에 대한 왜곡된 사회적 해석에 대해 저항하며 ‘여성’이 ‘군인’, ‘남성’에게 살해된 사건으로 볼 것을 촉구하였다.

이렇듯 매춘여성의 인권과 복지를 위해 일하는 쉼터 운동가들은 각자의 현장에서 성매매 문제를 사회에 제기하고 매춘여성들을 효율적으로 지원하고 국제연대를 강화하기 위해서 연합체인 ‘한소리회’를 구성하였다.*주) 한소리회는 1986년 각 지역의 쉼터와 개인의 비정기적 모임으로 시작되었고 1998년 독립적인 사무실을 마련하면서 명칭을 ‘매매춘 근절을 위한 한소리회’라고 변경하였다. 한소리회는 상담은 물론 개별 쉼터들이 하지 못하는 매춘여성인권 활동을 하고 있다. 상담의 대부분은 빚 때문에 탈매춘을 하지 못하는 사실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이에 한소리회에서는 개별 쉼터와 연계하여 관계기관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일, 포주의 빚 포기 각서를 받는 일, 빚을 청산하여 주는 일 등을 하고 있다. 또한 상담활동을 통해 그들의 인권유린 문제를 사회에 알리고 있다. 이러한 일상적인 활동을 통해 한소리회는 궁극적으로 성매매 근절, 매춘여성들의 인권 보호, 그들의 사회 복귀 지원, 성매매 문제 공론화, 정부의 성매매에 관한 정책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1980년대 중반에 시작된 쉼터운동은 이제 한소리회를 통해 보다 조직적인 매춘여성인권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다(민경자 1999, 266ꠏ267).

*주) {{ 한소리회는 1986년 필리핀 「착한 목자 수녀회」 소속의 사람들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매춘여성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여러 지역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던 숨은 일꾼들이 모이게 된 것이 시작이 되었다. 한소리회는 ‘매매춘 근절을 위한 하나의 목소리 혹은 매춘여성들의 한(恨)의 목소리’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민경자 1999, 265쪽).}}


안전한 공간, 새로운 연대의 형성

매춘여성 운동에서 매춘여성이 믿을 수 있는 바깥세상으로의 매개자를 만났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다. 쉼터는 그들에게 하나의 안전망이었으며 가족이었고, 심리적․정서적 안정을 주는 공간이었다. 또한 쉼터는 삶의 의미를 새롭게 해주는 관계망을 제공해 주고 대안적 삶을 찾게 해주는 공간이었다.

매춘여성들은 상담을 통해 극도의 사회적 소외와 폭력 속에서 짓눌린 심성을 바로잡고 자신감을 회복하고 있다. 이성혜 전두레방 원장은 두레방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같이 울고, 같이 아파하며, 이처럼 비참한 삶의 모습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같이 울부짖고 분노해야하는 억울한 일을 겪는다”고 토로하고 있다(유영님 2001, 143). 이렇듯 자신을 드러내는 경험을 하고 또 자신들의 목소리가 존중받는 경험을 함으로써 그들은 점차 자신을 찾고 자긍심을 회복하게 된다. 특히, 집단 상담을 통해 회원들은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낄 뿐 아니라 자신의 문제를 드러내는 연습 과정을 갖는다.

상담은 기지촌 여성들이 자신을 객관화하고 상처를 치유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상담을 통해 인간적인 관계와 교류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자신의 경험에 대한 재해석이 가능해졌다. 자신의 한 많고 기구한 인생이 순전히 자신의 탓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이들은 자기 존중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일단 자기도 타인에게 애정과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들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정희진 1999, 315). 이런 경험을 하면서 그들은 서로 서로 쉼터를 소개하거나 쉼터에 직접 데리고 오기도 한다.

쉼터를 중심으로 여성들은 삶의 활기를 되찾게 되었고 또한 비공식적인 연결망을 넓혀나갔으며 내적 연대를 공고히 해 나갔다. 쉼터의 여성들은 쉼터를 ‘우리 집’이라고 부르며 함께 사는 여성들을 ‘식구’로 여기고 있다. 또한 쉼터에 있는 매춘여성들이 아파서 입원하면 돌아가면서 병실을 지키는데 식구들 중 어느 누구도 불평 한마디,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돌보고 있다. 이는 “수시로 토악질을 하고, 똥을 싸도, 여전히 밝은 얼굴로 온갖 수발을 다 들었다. 이는 ‘우리 식구니까’ 하는 것”이었다. 이옥정은 “식구들이 병원을 향할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컸는데, 정작 그들은 식구로서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고 매춘여성들간의 가족의식을 강조하고 있다(이옥정․엄상미 2000, 211ꠏ213). 이러한 매춘여성들간의 연대의식은 특히 매춘여성이 죽었을 때 잘 표출된다. 이처럼 쉼터는 고립되고 소외당하는 생활에 익숙해 온 여성들이 자신감을 갖고 나 아닌 다른 이웃을 생각하게 하는 소중한 장이다. 쉼터를 통해 매춘여성들은 서로의 고충을 털어놓으며 서로 위로하고 동지의식을 느끼면서 여성으로서의 집단의식을 향상시켜 나갔다.

쉼터에서 진행해 온 전업사업과 교육 그리고 단체 간사들의 격려와 배려는 매춘여성들에게 지식․정보․기술, 그리고 용기를 줌으로써 그들이 세상에 나가 살아갈 수 있는 자신감을 주고 있다. 간사는 자신의 무능력을 비관하고 쉽게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되는 여성들을 언제나 염려해주며 격려해 주었고 여성들은 이를 통해 힘을 얻었다.

이들은 쉼터를 통해 ‘사랑을 배웠고 인간애를 배웠고 세상을 알았다. 그리고 자격증을 얻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들은 더욱 열심히 살 것을 결심한다. 또한 전업사업에 참여하면서 그들은 “이제 나는 어느 곳을 가더라도 빵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며 희망을 향한 첫 걸음을 내딛곤 했다(유영님 2001, 139)

매춘여성들은 또한 쉼터를 통해 자신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받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일례로, 미군과 결혼해서 미국 가서 남편에게 구타당하던 여성이 멀리 타국에 가서도 쉼터에서 가르쳐준 것을 잊지 않고 활용하면서 스스로를 보호했다. 이런 여러 가지 과정을 통해 매춘여성들은 자기비하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1990년대 초 기지촌여성운동이 확산되고 대학생들의 기지촌활동이 활성화되면서 기지촌 여성들은 이른바 ‘정상’적인 여성과의 연대의 폭을 넓혀 나갔다.


대안적 삶을 찾아서

두레방의 빵 사업과 새움터의 허브사업을 통해 매춘여성들은 탈매춘의 희망과 가능성을 보았다. 실제로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 지원금 공모에서 1위로 선정된 새움터의 허브사업 프로젝트는 매춘여성들의 아이디어를 그대로 써서 낸 것이었다. 현장 여성들은 안정된 가게를 하고 싶어했고 이러한 소망이 아이디어로 발전된 것이다. 그 후에도 현장여성들이 상품개발에 주체가 되고 있다.

이러한 전업사업은 탈매춘의 대안으로 의미가 있다. 가끔씩 개인적으로 탈매춘을 위해 전업을 시도해 보지만 성공하기는 매우 어렵다. 사회정보의 부족과 사회의 편견으로 인해 다시 매매춘 현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현실이다(유영님 2001, 105). 이런 현실에서 작지만 돈을 벌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탈매춘을 실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이다. 현재로서 매춘여성이 그 일을 그만둘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민간단체의 직업프로그램 뿐이다.

이러한 전업사업이 처음에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춘을 해야 하는 기지촌 여성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극복하고자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고령의 여성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기지촌 매춘 여성이 전업대책을 세우는데 중요한 모델로 참고되기도 한다.

그러나 허브사업은 단순히 경제활동만은 아니다. 여성들은 허브사업을 통해 향기, 새 옷, 예쁨 등의 이미지를 심으려고 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자신들에게 씌워진 ‘타락한 여자’, ‘더러운 여자’라는 낙인을 제거하고자 하고 있다.


여성운동가로의 변신

이제 현장의 매춘여성들은 단순히 단체에 의해 수동적으로 도움을 받는 수혜자를 넘어 스스로 본인들의 삶을 바꾸려는 적극적인 운동가로 변신하고 있다.

두레방 빵 사업에 참여한 여성들은 다른 기지촌여성들을 상담하며 돕고, 새로 온 자원활동가들을 교육한다. 더 나아가 두레방 활동의 방향을 주시하고 여러 가지 중요한 충고를 해주기도 했다. 이제 두레방 빵 사업에 취업한 여성들은 두레방의 활동가로서 기지촌여성운동을 더욱 활발하게 전개시키는 원동력으로서 인정받았다(김현선 1997, 15). 새움터에서도 프로그램 참여자가 스스로 인권활동, 조사, 강의까지 하면서 새움터 같은 활동을 하게 된다고 한다(김현선과의 인터뷰). 심지어 “제게 소망이 하나 있다면 빨리 몸이 건강해져서 돈을 벌어 두레방의 어려운 회원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라고 할 정도이다(두레방 2001, 72). 이렇듯 매춘여성들은 민간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다른 여성들에게도 신임을 받게 되고 이들에게 상담을 청해 오는 여성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매춘여성들은 쉼터 및 운동단체와의 만남을 통해 자기를 전적으로 믿어주고 자기를 위해 헌신하는 활동가를 만난다. 이러한 만남은 그들에게 안전한 공간, 새로운 연대, 그리고 세상으로의 통로, 대안적 삶 등을 제공하고 있다. 이제 여성들은 이러한 만남과 공동활동을 통해 집단의식을 형성하고 자신들의 인권과 권익을 위한 일에 대한 적극적인 주체로 성장하고 있다.


8. 이제는 그들이 말할 때

한국매춘여성운동의 특징

이상으로 매춘여성들이 집단적으로 자신의 주체성을 찾아가는 지난한 과정을 살펴보았다. 우리 사회의 매춘여성들은 원시적이고 부분적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집단의식 및 집단내 연대를 경험했고 자신들만의 모임, 공간 등을 형성해 왔다. 또한 산발적이긴 하지만 자신들의 인권을 위해 집단적인 투쟁도 경험했다. 물론, 모든 매춘여성들이 이러한 과정을 겪었던 것은 아니다. 소수의 여성들만이 이러한 경험을 했으며 많은 매춘여성들은 아직도 무기력한 상태에 놓여있다.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을 누르고 있는 억압 속에서 파편화된 상태로 개별적으로 숨어 얼굴을 가린 채, 목소리를 못 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매춘여성들이 이러한 발자취를 남겼다는 것은 그들에게도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제 매춘여성집단은 의식 있고 헌신적인 외부지원자를 갖고 있으며 이들과 함께 자신들만의 공간을 확보하면서 자신을 찾고 대안적 삶을 찾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또한 점차 넓어져 가는 매춘여성들의 인권에 대한 국민들의 공감대를 배경으로 외부 지원자들과 함께 자신들의 인권과 권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매춘여성들의 운동의 특징을 살펴보면 ‘매춘여성 정체성’에 대한 부정이 여전히 전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매춘여성들의 운동은 두 방향으로 진행되었는데, 하나는 자신들을 ‘함부로 대하는’ 사회, 고객, 포주, 경찰 등에 대한 저항과 집단행동이고 다른 하나는 매춘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다. 탈매춘은 매춘여성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부정이 전제되는 것이고, 인권운동은 매춘여성을 비범죄화하고 이들의 인권을 사회가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매춘여성 정체성’의 가능성은 배제하고 있다. 즉 우리 사회의 매춘여성운동은 매춘여성의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주장하는 인권운동의 수준과 남성에 비해 차별 받는 여성으로서의 인권을 주장하는 여성운동의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아직 매춘을 성노동으로 인정하라는, 따라서 매춘여성을 직업여성으로 인정하라는 성노동 운동으로는 확장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한계는 우리 사회 매춘여성의 특수한 상황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즉 매춘여성을 ‘윤락녀’라고 낙인찍도록 한 우리 사회 특유의 사회적 맥락이 이러한 요구를 원천적으로 봉쇄했고, 사회적 힘에 비해서 우리 사회의 매춘여성들의 집단적 힘은 너무 약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아직 우리 나라 매춘여성의 운동은 기존의 사고방식이나 사회구성방식에 대한 대안을 추구하진 못하고 있다. 성을 둘러싼 사고의 주류흐름은 완강하지만 이에 대항하는 조직체로서의 매춘여성의 소수자운동은 아직 미미하다고 하겠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저항과 인권옹호를 둘러싼 집단적인 움직임은 미약하게나마 성(sexuality)을 둘러싼 여성에 대한 지배적인 사고방식과 가부장제 사회에서 당연시 되어온 남녀간의 권력관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흔들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더구나 부도덕한 여성의 상징이던 매춘여성들의 인권을 공개적으로 논의하고 법으로 보호하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인권’논의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며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한 차원 높이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이제는 그들이 말할 때

우리 사회에 엄연히 존재하는 소수자 매춘여성들이 인권과 권익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그들의 다양한 요구와 욕구가 드러나야 한다. 매춘여성들을 둘러싼 제 집단들의 정치학이 다르기 때문에 매춘여성들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겠다.*주) 아직 이들이 그런 힘이 없다면 그들과 함께 매춘여성운동을 하고 있는 활동가들이 이제는 보다 적극적으로 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주) {{ 오랫동안 매춘여성운동을 전개해 온 엄상미는 매매춘 해결을 위한 여러 가지 방법 중 매춘여성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YTN, 1999).}}

다른 운동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아직은 매춘여성운동에서도 그들의 활동과 운동가들의 활동이 제대로 기록되지 않고 있다. 열악한 재정과 부족한 인력으로 인해 기록하는 작업이 쉽지 않고, 또 아직까지 많은 매춘여성들은 자신들의 이야기가 기록되는 것을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쓰는 행위는 정치적 행위이다. 이들이 자신들을 위해 무엇을 해 왔는가를 분석하고 이를 공개함으로써 이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작업은 권력관계에서 소수자의 지위를 극복하는데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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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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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1999.12.04. 채널 24 집중조명 “매춘여성들의 외침-우리도 여성이고 싶다!”
새움터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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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 > 3월 반딧불 인권영화제: 나는 페미니스트다

3월 반딧불, "나는 페미니스트다"
 
 
때와 곳 : 3월 19일(토) 3시,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 대강의실

상영작 : <멈추지 않는 그녀들, Unlimited Girls>  파로미타 보라/2002/97분/인도

부대행사 : 조이여울(여성주의 저널 일다 편집장)과 함께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들을 나누어 보는 자리
 

 

 

여전히 여성들에게 '페미니스트'란 꼬리표는 부담스럽다.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순간 개인의 참모습은 무시되고, 잘난 체하거나 이기적인, 혹은 나서길 좋아하는 여자라는 외부의 시선이 그녀를 규정해버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인식하면서도 페미니즘을 '동경은 하지만 실행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역시 페미니스트를 왜곡된 시선으로 규정짓는 사회의 편견과 차별 때문이다. 파로미타 보라(Paromita Vohra)의 2002년작 다큐멘터리 <멈추지 않는 그녀들(Unlimited Girls)>은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이런 고민에서 출발한다. 혼자되고 싶지 않아서 페미니스트이길 거부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과연 우리는 페미니즘의 혜택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일상에서 여성들은 과연 페미니즘을 생각하기는 할까?


             <멈추지 않는 그녀들>의 한 장면
 

<멈추지 않는 그녀들>의 주인공은 인도 봄베이의 유일한 여성 택시운전사를 비롯해 노동조합, 출판사, 여성발전센터 등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페미니스트들, 그리고 연애를 하고 결혼한 평범한 커플, 남녀공학에 다니는 남학생과 여학생들을 찾아다니며 페미니즘에 대한 그들의 목소리를 담는다. 여기에 채팅방에서의 논쟁과 함께 주인공이 페미니즘을 고민하고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겪는 물음들과 혼란스러움이 덧붙여진다. 카메라에 담긴 수많은 목소리와 공간들만큼이나 이를 표현하는 방식 역시 다양하다. 이모티콘이 난무하는 채팅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컴퓨터 화면, 주인공이 상상해본 가상의 상황들을 보여주는 픽션들과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혼란스러운 질문들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그래픽 등은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발랄하게 또 때로는 진지하게 페미니즘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멈추지 않는 그녀들>은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 혹은 우리는 왜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정답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페미니즘을 고민하기 시작한 주인공 여성을 따라가다 보면, 페미니즘 혹은 여성 운동이 이 사회에서 발휘해온 영향력과 효과들, 그리고 그것이 바꾸어낸 변화들, 한편으로 여전히 지난하게 남아있는 과제들을 새삼 돌아보고 생각해보게 된다. 남자노동자들이 훨씬 많은 노동조합에서 리더 역할을 하는 활동가를 비롯해 각계각층에서 페미니스트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지만, 여전히 한편에서는 결혼지참금으로 인해 죽는 여자들이 존재하고, '우리'와 '가족'을 강조하는 가부장제가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받는 차별은 참을 수는 없지만 남을 위해 희생하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는 없다고 말하는 여성이나, 여성들이 미니스커트나 민소매 옷을 입는 이유가 남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가 아니냐고 반문하는 남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나는 다른 페미니스트의 노력과 운동의 혜택을 고스란히 받기만 해도 괜찮은 걸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는 것이다.

 


3월 인권영화 정기상영회 반딧불은 <멈추지 않는 그녀들>의 상영과 함께 이러한 여성의 고민들을 함께 풀어내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다. 영화 상영에 이어 조이여울 씨와 함께 하는 부대행사를 통해 그저 부담스럽기만 한 꼬리표나 동경의 차원에서의 페미니즘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에서 페미니즘을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졌으면 하는 바램에서이다.

 
 
 
 
2월 반딧불, '절반의 진실, 강요된 용서'를 넘어  후기
                
                                                                                          나 윤
 
 

지난 2월26일 영상미디어센터에서 ‘절반의 진실, 강요된 용서를 넘어’라는 제목으로 열린 칠레의 과거사 청산을 다룬 영화 ‘피노체트 재판’ 상영회에 다녀왔다. 미디액트의 작은 상영관에서 약 한시간 반 동안 영화가 상영되었다. 그 시간이 나는 한시간 반 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다. 피노체트 재판이 보여준 시간의 역사와 무게가, 결코 짧고 가볍지 않기 때문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칠레의 아옌데 정권을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독재정권을 수립한 피노체트와 군부정권이 행했던 일들과 가려진 세월을,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그들의 ‘생존’과 ‘기억’과 ‘말’을 통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과거사 청산을 둘러싼 논란과 진실을 향해가는 여정은 한국도 현재 진행형이다. 여전히 진행형이며, 그것이 왜곡의 논리로 덧칠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과거사 청산과 관련한 가해자들을 옹호하려는 논리뿐 아니라, 과거사 청산이 ‘평범한 사람들’과는 관계 없는 일이라는 통념들도 과거사 청산이 넘어야 할 벽이다. 과거사 청산과 관련한 기사가 인터넷 기사에 실릴 때면 ‘지나간 일을 이제와서 들추어서 어쩌자는 것이냐, 어차피 소수의 문제이다, 사회 갈등을 부추길 뿐이다.’와 같은 논리로 마치 없었던 일인듯 덮고 넘어가면 사라지는 문제라는 발언들을 보게 된다.

                                                                

피노체트 정권 고문의 생존자 가브리엘라는, 영화를 통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군부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의식속에 독재가 살아 있는 것이 가장 힘들어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잊는게 더 낫지 않아요? 당신은 용서해야 해요. 그러나, 고통을 당한 사람만이 용서할 자격이 있어요, 아무도 대신할 수 없죠. 용서를 빌어올 때만이 용서할 수 있어요.”

 

1985년에 피노체트 정권에 의해 두 아들을 잃은 루이자는 이렇게 말했다.

“살아 있는 것이 복수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고통으로 한번 죽었기에, 다시 일어서서 인간처럼 느끼는 것. 제가 할 수 있는 복수는 젊은 애들을 만나는 거에요. 청년들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전하는 거죠. 우리를 없애고, 우리의 생각을 없애려 했고, 또다른 사회,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우리의 생각을 뿌리채 뽑아버리려했던. 그러나 그들은 실패했어요. 그러한 생각들은 여전히 살아있으니까요."

 

한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진실과 ‘정의’가 아니라, 진실과 ‘화해’를 말하는 과거사법은 어떠한가. 그것은 누구에 의한 진실이며, 누가 원하는 화해인 것인가.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뒤로 가고 보상부터 말하고 있거나, 공소시효 배제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채 과거사 청산을 진행하려는 현실은, 역사적 진실과 사법적 진실 모두를 가로막는 벽이다. 또한 과거사가 소수 당사자의 문제이지, 한국사회와 무관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통념들도 또다른 가해이다.

 

피노체트 재판은 결코 떠올리기 쉽지 않은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그녀의 입을 열어 전달하는 가브리엘라의 말로 끝을 맺었다.

“기억이 역사적인 재판을 하겠죠. 고문을 가한 모든 가해자들과 그걸 지지했던 모든 민간인들, 그리고 여전히 변호하는 사람들, 그 일에 동의했던 사람들, 오늘에조차도 여전히 권좌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망각하려 애쓰는 사람들. 전 믿어요. 기억의 힘이 우리를 돕고 치료할 거라는 것을. 그것이 집단적 기억이 중요한 이유죠. 오늘을 살고 내일을 건설하기 위해서."

 

카메라를 통해 나를 바라보던 가브리엘라의 시선이 기억난다. 우리는 기억해야 하며, 진실을 찾아야 한다. 기억의 힘이, 오늘을 살고 다시 또 내일을 살게 할 것이다. 가브리엘라의 말처럼. 기억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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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플레져 > 허브 백과 사전

출처블로그 : naver  Hyun
펜넬(Fennel)
지중해 연안 원산의 다년초 크게 자라면 1.5m나 된다.
딜과 꼭 닮은 새 날개와 같이 밝은 녹색의 가벼운 잎 우산같이 노랗고
큰 꽃이 특징이다. 이꽃은 여름에 피고 가을에는 아니스와 비슷한 향기가 좋은 종자를 맺는다. 종자,줄기, 잎의 식물 전체를 이용할 수 있는, 폭넓은 허브의 대표격이다. 플로렌스 펜넬(Foeniculum Dulce)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는 그비대한 하얗고 굵은 줄기를 채소로서 작용하는 품종으로 샐러드 등에 이용한다. 이탈리아어로는 "피노키오"라고 부른다.
원예종으로서 잎이 아름다운 청동색의 브론즈 펜넬도 있는데 허브가든에 심어서 즐거움을 더하는데 유용하다.
네페타 카타리아
케트닙
캐트닙, 캐트네프로 불리는 이 향기좋은 허브는 민트 종류로
북아메리카, 유럽이 원산이다. 영국에서는 생울타리에 보이는 들풀이기도 하고 캐러민트로 불리는 경우도 있다. 네페타 카타리아(N. cataria)는 옛날부터 약초로서 이용된 품종으로 연한 녹색의 잎에 하얀 꽃을 피운다. 라벤더와 같이 화단의 둘레에 즐겨 심는 귀엽고 청초한 청자색의 꽃을 피우는 네페타 카타리아(N. cataria)라는 품종이다.
 
슈퍼민트(Super Mint)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는데 60~90cm 정도로 자라며, 직립성의
붉은색의 줄기를 갖는다. 잎은 털이 없고 밝은 녹색을 띠며, 꽃은 연한 보라색이다. 요리에 주로 사용되며, 민트 중 향이 가장좋다. 옛날부터 긴히 쓰인 약초였는데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생잎이나 스피아민트 오일을 목욕물에 넣으면 신경이나 근육을 이완시켜 주어 진정, 진통효과가 크므로 널리 이용했다. 또 옛날에는 딸국질을 멎게 하는 데도 이용되 었으며 통풍제, 소화불량 및 뱃멀미와 메스꺼움에도 진정효 과가 크다고 하였다.
잎의 즙은 상처, 벌에 쏘인 데, 입안이 헤졌을 때, 손발이 튼데에 약용했다.
또 담배의 냄새를 없애는 향유의 원료로도 쓰인다. 그리고 방충용으로 양복장서랍에 향낭을 만들어 넣기도 하여 유럽에서는 지금도 널리
애용되고 있다.




헬리오트러프(Heliotrope)
짙은 자색의 꽃에 강한 향을 가진 1년초. 종자에서 용이하게 재배할 수 있고 화단의 둘레 장식으로 즐겨 심는다. 그리이스 신화에서는 물의 님프 클리티에(Clytie)의 화신이라는 꽃으로 전해지고 있다. 클리티에는 태양의 신 아폴로에게 마음을 주었으나 그 사랑은 성취되지 못하여, 사후에 아폴로가 그녀를 이 꽃으로 변화시켰다고 한다.


레몬그라스 (Lemon grass)
다년초로 키가 11.5m로 자라며 억새를 닮았다.
줄기는 땅 속에 있어서 짧고 마디가 있다. 내한성이 없는 것이 결점이며 잎을 손으로 비벼보면 레몬향이 난다. 해가 잘 들고 따뜻한 곳의 배수가 잘 되는 사질 양토가 좋다. 요리의 부향제나 약품, 비누, 향수, 린스 등의 부향제로 쓰이며 차로 마시면 향기가 좋다.
이용부위는 잎,오일,줄기이며 원산지가 인도,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의 열대지방이다. 번식법은 파종,포기나누기로 하며,허브차와
향료로 많이 쓰인다.
 

체리세이지

블루세이지

멕시칸세이지
세이지 (Sage)
벨벳처럼 촉촉한 감촉의 잎에 장뇌와 비슷한 산뜻한 방향과
쓴맛이 있다. 수많은 변종이 있고, 대표종은 컴먼 세이지(common sage) 또는 가든 세이지(garden sage)라 불리우는 종류로 요리, 약용에 가장 적합하다.
샐비아와 세이지는 자매어이며 일반적으로 샐비아라 불리는 경우도 있다. 60cm 정도로 자라는 은색 잎의 군락은 생활에 유용할 뿐만 아니라 정원에 심으면 장식으로서도 매력적이고 아름답다.
지중해 북안지방이 원산이며 유고슬라비아의 다르마티아 구릉지대에는 야생화되어 있고 그 건조엽, 세이지 벌꿀은 유고슬라비아의 주된 수출품이 되어 있다. 6~7월에 걸쳐 피는 자색의 꽃은 밀월식물로서 꿀벌도 즐겨 모여든다. 그 열린 문의 모양은 태양의 불꽃속에서 물을 마시는 작은 사자의 입과 닮았다고 옛날부터 이야기해 왔다.
살균작용,소화촉진에 탁월하며 건강유지에 융요한 허브이다.
돼지고기 등 기름기 많은 요리에 가해서 기름기를 억제시키는 효용도 있다. 이러한 일 때문에 1551년 독일의 약초가가 이 허브에 딱 들어맞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세이지는 의사, 얏사에게도, 부엌, 지하실 같은 장소도, 빈부를 불문하고 유용한 허브이다.
품종으로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도 있다.
- 레드 세이지(S. offficinalis 'Purpurascens') 진한 자색의 잎이 있으며 요리용으로도 쓰인다.
- 트리칼라 세이지(S. offficinalis 'Tricolor') 말 그대로 세가지 색깔인데 녹색,홍색,크림색의 3색의 잎이 있다.
- 브로드리브 세이지(S. garndiflora) 꽃이 피지 않는 것도 있으며 잎이 넓은 품종으로 향이 좋고 건조에 적합하다.
 


제노바실 (Geno Basil)
유인도,열대아시아,아프리카 원산의 2년초, 더위에는 강하나 건조에
약하므로 한여름에는 포기주변에 짚이나 낙엽등을 덮어주어 흙의 건조를 막아주는 것이 좋으며 월1회정도 복합비료를 시비하는 것이 좋다.
이용부로는 잎,꽃,줄기,열매,씨를 쓴다. 높이 40~80cm의 7월초에서 9월말 흰색,분홍색의 꽃을 피운다.
스테비아 (Stevia)
원산지인 파라과이에서는 “단풀”이라는 뜻으로 차의 감미료로 썼다.
키가 60cm 내외로 자라는 다년초로 추위에 약하다.
해가 잘 들고 배수가 잘 되는 사질 양토가 좋다. 잎은 설탕처럼 단맛이 있어 감미료로 이용하며 분말, 정제, 티백 등으로 상품화되고 있다.
아이스크림, 껌, 청량음료, 약품 등의 감미료로 쓰이며 다이어트 식품의 감미료로도 이용된다. 당뇨병, 심장병, 비만, 충치 등의 저 혈당제로써 스테비아는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허브차로 이용할 때는 1컵에 생잎 1~2장이면 된다.
파인애플 세이지 (Pineapple Sage)
멕시코가 원산으로 녹색잎을 갖고, 둥근 잎에 파인애플 같은 향기가
있으며 빨간색의 가느다란 꽃이 가을까지 아름답게 피어 포플리나 절화로 꽃다발 등에 쓰며 쿠키를 만들때도 이용된다. 추위에 약하다.
재배는 간단해서 해가 잘 드는 장소에서 키우고, 물이 잘 빠지고 영양이 풍부한 흙에 심으면 크게 생장한다.산성의 토양이나 추위에는 약하고, 더위나 건조에는 강하다.
병충해의 염려가 적어 튼튼하게 잘 키울 수 있다.번식은 씨와 꺾꽂이를 통하여 이루어지며, 파종은 4~6월에 직파한다. 파종은 최저 15도 이상은  되어야 한다. 꺾꽂이는 봄에서 여름 사이에 다소 굳은 가지를 15~20㎝로 잘라 꽂으면 쉽게 활착한다.
봄과 가을에 질소분이 적은 비료를 주며, 수확은 30센티이상 성장하면 밑둥에 잎을 좀 남기고 자르면 된다.
 
디기털리스 (Digitalis)
1.5m의 높이로 자라는 2년초로 유럽에 널리 분포하고 있다. 인도에서도 재배되고 있다. 여름에는 핑크, 자색, 백색 등의 종모양의 꽃이 같은 줄기에 연이어서 아래를 향해 피는데, 그것이 매우 아름다와서 사람 눈을 끌기 때문에 허브가든에 즐겨 심어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잎에는 불쾌한 냄새가 있고, 디기톡신(digitoxin)이란 독소가 포함되어 있는 독초로 유명하다. 또한 꽃의 모양이 여우장갑을 연상시켜서 폭스 글러브란 별명을 갖고있다.
현재는 디기털리스(digitalis)라는 강심작용이 뛰어난 성분을 추출하는데 이 잎이 유용하게 쓰인다.이것은 기능이 약해진 심장을 강하고 정상적인  기능으로 들리는 효용이 뛰어나 중요한 약재가 되어 있다.



화이트 야로
유럽 원산의 다년초이며 영국을 비롯하여 유럽각지의 공터, 도로변 등에 자생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60cm종도 자라며 진한 녹색으로
레이스 모양으로 가늘고 깊게 패인 잎이 특징이다. 회색이 낀 흰색 또는 연한 핑크의 작은 꽃이 뭉쳐서 여름동안 계속 핀다. 야로란 이름은 이 풀의 앵글로색슨 명 gearwe, 홀랜드어 yerw의 사투리이다.


히솝
성서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오래 전부터 이용된 히솝은 손끝만 스쳐도 강하고 상쾌한 향이 난다. 남유럽과 중앙아시아가 원산지이며 꿀풀과의 다년생으로 줄기가 1미터 정도인 상록 반저목이다. 가지 끝에서
10센티미터 정도까지 한쪽에 3개의 꽃이 피며 잎은 마주 나고 잎몸은 길고 원형이다. 히솝에는 스파이스용과 관상용이 있는데 스파이스용의 꽃색은 청자색이고 관상용은 분홍색이나 흰색이 많으며 담홍색도 있다. 잎과 꽃에서 아니스향이 나며 개화기가 비교적 길어서 8-10월까지 자줏빛의 꽃이 계속 핀다. 발아 온도는 15-20도 가 좋은데 파종 후
발아까지 꽤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가을 이나 이른 봄에 줄기를 나누거나 꺾꽂이를 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


 
슈퍼 탄지
영국을 포함시킨 북유럽 원산의 다년초. 북미에서는 야생을 쉽게
발견 할 수 있다. 높이 1m까지 자라며 고사리와 같은 진한 녹색의 잎에는 장뇌를 닮은 강한 향이 있다.
코스트마리에 대해서 잉글리쉬 코스트(English cost)라 불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8~9월에 걸쳐서 둥글고 평평한 버튼같은 형태의 황색꽃이 핀다. 그래서 단순히 버튼스(Buttons), 또는 골든버튼즈(golden button), 뱃첼러스 버튼즈(batcheloisbuttons: 독신남성의 버튼),
버터 버튼즈(butter bottons)등 으로 부르는 것도 그 강한 향기 때문이며,진저 플랜트(ginger plant)줄여서 진저라고도 부른다.





체리 세이지
체리세이지는 가을에 가지끝에 새빨간 꽃을 피운다. 어릴적 사루비아 꽃을 따서 먹던 아련한 추억이 꽃을 입안에 넣게 된다. 꽃은 샐러드나 과자 등의 장식으로 이용된다. 추위에 강한편이나 줄기가 쉽게 꺾인다.



토멘토즘 제라늄
로즈와 페퍼민트의 향이 겸비되어 나타나는 독특한 향을 품는 제라늄, 잎은 어느때든지 딸수 있으나 개화직전에 잎을 수확해서 신선한 상태나 말려서 이용한다.
 




다이어스 케모마일
유럽, 북아프리카, 아시아에 걸쳐 널리 자생하고 있는데
대표적 품종으로는 로만종(다년초)과 저면종(1년초)이 있다.
밝은 에머랄드 그린의 가늘게 파고 들어간 잎은 부드럽고 새의 날개를 생각게 한다. 로만 캐모마일은 털모양의 줄기가 지면에 기는 성질이 있어 30cm 정도로 낮게 자란다. 이성질이옛날 부터 잔디 만드는데 이용되었다. 데이지와 비슷한 사랑스러움 꽃이 피는데 직경은 1.5cm~3cm 정도로 작다. 흰 꽃잎에 둘러싸인 중앙의 황색부분에 모든 약효성분이 포함되어 있다. 그 때문에 안테미스 노빌리스 '플레나'(A. nobilis 'Plena')라고 하는 꽃잎이 많은 겹꽃 재배종에 비하면 홑꽃의 야생종 쪽이 약효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한다.
그러나 홑꽃은 알칼리성이 강해 위장 벽에 장해를 준다고 해서 영국의 약국법은 공식적으로는 캐모마일을 건조시켜 판매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잔디 만드는데 가장 적합한 품종으로는 꽃이 피지 않는 안테미스 노빌리스 '트레네구이'(A nobilis 'Trenegue')를 들 수 있다.
봄에 20cm 간격으로 심으면 이듬해 여름에는 향기가 좋은 잔디를 걸으며 즐길 정도로 성장이 빠르다.
염색에 이용되는 안테미스 틴크토리아 (A tinctoria)는 선명한 주황색에 가까운 황금빛 꽃이 피며 주로 프랑스에서 재배, 이용되고 있다





클라리 세이지 (Clary Sage)
남유럽 원산으로 가장 큰 종으로 1.2~1.5m까지 도달하며 2년생으로 첫해에 잎의 기부 rosette를 만들고 2년째에 꽃을 피운다. 잎은 크고 울퉁불퉁하며 회록색을 띤다.
이 품종은 안약으로 사용되어서 'Clear eye'라고 하며 줄여서 'Clary'라고도 한다. 또한 잎은 훌륭한 차로도 사용된다.



웜 우드
꿀풀과에 속하는 여러 해 살이 식물로서 2m까지 성장하며 줄기의 상부에 곁가지가 무성하게 난다. 잎은 어긋나기를 하며 아래 부분의 잎은 잎줄기가 있고 2-3회 깃털모양으로 찢어져 있다. 줄기의 위로 올라갈수록 잎의 모양은 단순해지고 잎줄기가 없이 줄기에 붙어 있는 경향이 있다. 잎에는 은빛털이 나있다.
꽃은 작고 고개를 숙이고 있으며 작은 구슬모양이다.
 



허니써어클(Honey Suckle)
향인동덩굴.덩굴성 관목, 길이 6m, 잎은 잘고 난형대생, 꽃은 6~9월에 피며 통꽃으로 꽃봉오리 일 때 붉고, 꽃잎 안쪽은 붉은 색을 띤 크림색, 바깥쪽은 적자색 달콤한 짙은 향기가 있다.
레몬 버베나
낙엽성 관목의 다년초. 그 길다랗고 황색이 낀 녹색 잎에 대단히 상쾌한 레몬의 향이 있어 허브차나 포푸리의 재료로 선호된다. 남미 칠레가 원산이며 유럽에는 스페인인이 1784년에 가지고 들어왔다. 그이후 그 잎에서 채취된 엣센셜 오일이 향수,비누, 화장품의 향료에 이용되어 왔다. 그 향이 좋기 때문에 현관 입구나 발코니에 심는 나무로서도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고 있을 정도다. 여름에 엷은 핑크색의 눈에 띠지 않는 원추화가 핀다. 온화한 기후에서는 2m 이상으로는 자라지 않는다고 하며, 영국 등에서는 실내식물로 눈에 띄는데 남,중앙 아메리카에서는 8m나 되는 큰 나무로 자란다고 한다.

우로바노 라벤더
꽃색의 흰색과 옅은 보라색으로 봄과 가을에 많이 개화하며 특유의 라벤더향을 느낄 수 있다. 잎은 톱니바퀴 모양으로 가장자리에 요철이 규칙적으로 나있으며 옅은 녹색으로 성장이 빠르다.
다년초로 줄기는 40~70cm로 자라며 줄기는 곧고 밑쪽은 목질화된다.
꽃은 6~8월에 줄기 끝에 수상화서로 윤생하며 남색을 띤 짙은 보라색이 가장 많다. 배수가 잘 되는 곳을 좋아하고 고온다습에는 약하다.
식물 전체(잎, 꽃, 줄기)에 향기가 있다. 라벤다는 프랑스가 가장 유명하고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미국, 호주, 헝가리 등에서 산업적으로 재배하여 수출하고 있다. 약 28종이 있으며 유럽에서는 향기의 매력 때문에 옛날부터 널리 재배된 역사가 오랜 식물이다. 이 성 분은 심신을 진정시키며 불면증에 효과가 있고 살균, 소독, 방부, 항염 작용이 있다. 포푸리나 향수, 비누, 베개 등에 많이 이용한다. 마른 꽃은 향기가 더 진하며 오래간다.

 



피나타 라벤더
지중해연안 원산의 상록 관목으로 자라는 다년초. 20종 이상의 변종이 있는데 줄기, 꽃, 잎의 식물 전체가 모두 강하고 시원스런 방향을 가지고 있다. 영국을 비롯하여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꽃으로부터 화장품에 쓰는 오일을 추출하기 위해서 널리 상업적으로 재배되고있다.



차이브스(Chives)
아리움(Allium)속에는 마늘,쪽파,리크를 들 수 있는데 그중 에서도 챠이브스는 가장 섬세한 풍미를 가졌다. 풀과 같은 가늘고 길며, 가운데가 비어 있고, 30cm 종도의 높이로 자란다. 희고 적은 구근으로 늘어나며 포기가 군생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차이브스(chives)라고 복수형으로 부른다. 초여름에 공모양의 적자색 꽃이 핀다. 이 꽃이 장식용으로 아름답기 때문에 옛부터 허브가든, 노트가든에 생울타리 로 이용되었다.
과수원에 심으면 사과에 생기는 부패병을 막는다고 한다. 상업적으로는 북유럽, 특히 서독과 미국에서 재배되고 있다.




예루살렘 세이지 (yerusalem sage)
학명은 Phlomis fruticosa이며, 세이지라 하지만 세이지와는 별개의 식물이며 가지를 잘친다. 잎은 피침형, 잎양면에 흰색 성모가 발생한다. 꽃은 5~9월에 금어초 같이 생긴 잘다란 노란색 통꽃이 가지끝에 14~36송이씩 윤생한다. 식용으로는 이용되지 않으며, 꽃꽂이용으로 이용하거나 건조시켜 포푸리 등에 이용한다.



월계수
녹나무과에 속하며 비내한성,호일성의 성질을 가졌다.
이용부위로는 잎,열매,줄기이며 지중해 연안,남유럽이 원산지이다.
추위에 약하므로 겨울철 방한에 신경쓰며 분에 옮겨 심어 실내에 보관하는 것이 안전하다. 특징은 암수 나무가 따로있는 큰 나무다. 향료,관상용, 요리등의 용도로 쓰인다.
약효:방충,건위제,쥬마리스 등의 도포제,진통제
 



멕시칸 세이지 (Mexican sage)
가을에 산뜻한 자주색 꽃이 가득 핀다. 꽃이 특이하게 피므로 눈에
두드러지게 호감이 간다. 가을을 감상하는데 적합한 허브이다. 식용에는 이용되지 않는 빌로드 모양의 풍부한 꽃이다.
꽃꽂이용이나 드라이플라워의 재료로서 인기가 높다.



빅토리오 라벤더
연보라색으로 일반 라벤더보다 조금 늦게 개화하면서 매우 길고 꽃을 자극하면 짙은 라벤더 향기가 매혹적이며 잎은 연중 은색으로 아름답고 스스로 안정된 수형을 이룬다. 추위에 강하여 -20℃에서도 견디며 성장은 중간 정도 크기로 자란다.





안테로라벤더
잎은 옅은 녹색의 바늘형이고, 자극하면 매혹적인 향기가 잎에서도 진하게 나며 가지는 스스로 아름다움을 뽐내고 50~1m 정도로 자란다. 추위에는 -7℃까지 견딘다.



마리노라벤더
연보라색으로 꽃대의 길이가 짧고 꽃들은 산발적으로 개화하여 올라가며, 잎은 톱니모양의 긴 은색으로 성장이 매우 빠르고 순을 치면 옆순이 나와 또 다른 모양을 이룬다. 0.5~1m 정도 자라며 추위에 -5℃까지 견딘다.



스위트바이올렛(Sweet Violet)
좋은 향을 가진 제비꽃으로 200이상의 변종이 있는 다년초.
유럽, 아시아, 북아메리카가 원산. 동그라미가 있는하트형 잎 사이에서 자라나온 10cm 정도의 줄기 끝에 짙은 자색의 홑꽃이 핀다. 2월말부터 피기 사작하여 4월말에는 끝나버려 마치 봄이 찾아오는 것을 알려주는데 아울리는 꽃이다. 석호질로습한 반음달의 땅을 좋아하며 가을에파종, 포기나누기로 늘릴 수가 있다.
한번 불어나면 곤란할 정도로 번식이 강하다.


네페타 무시니

캐트민트(Catmint)
캐트닙, 캐트네프로 불리는 이 향기좋은 허브는 민트 종류로 북아메리카, 유럽이 원산이다. 영국에서는 생울타리에 보이는 들풀이기도 하고 캐러민트로 불리는 경우도 있다. 네페타 카타리아(N. cataria)는 옛날부터 약초로서 이용된 품종으로 연한녹색의 잎에 하얀 꽃을 피운다. 라벤더와 같이 화단의 둘레에 즐겨 심는 귀엽고 청초한 청자색의 꽃을 피우는 네페타 무시니(N. mussini)라는 품종이다.




슈퍼잉글리쉬 라벤더 (Lavender)
잉글리쉬 라벤더(Lavandulaaugustifolia Mill) 1.2m 정도로 자란다. 가장 대표적인 품종이며 가느다란 잎, 얕은 자색의 긴 꽃대가 특징이다.
보라색꽃의 아름다움이 봄이면 꽃뭉치를 이루듯 한꺼번에 개화하며 잎은 바늘형으로 줄기에 짧게 붙어있다. 성장이 느린편이며 잎은 관상이 좋고 조밀하며 내한성이 강하며 -20℃까지 견딘다.
프린지드 라벤더 (L. dentata L.) 75cm 정도의 크기로 자란다. 연하고 얇은 라일락 같은 꽃이 가을에 핀다. 화분 심기에 최적이며, 겨울에슨 실내로 옮길 필요가 있다. 길쭉길쭉하게 들어간 잎, 섬세한 발삼향이 특징이다.

 




그린타임
유럽,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카나리아 제도를 포함한 각지에서 자라고 있다. 지중해 연안 지방이 원산이며, 고대 그리이스의 산들을 훌륭한 향기로 가득 채웠다. 티몰이라는 살균력이 있는 에센셜 오일을 포함하고 있으며, 지금은 중요한 조리용 허브의 하나이다.




산토리나 뷰렌스
은녹색의 깊은 톱니가 있는 잎, 캐모마일과도 비슷하다고 하여 이 이름이 붙었다. 남유럽 원산의 관목상이 되는 가년초. 작고 노란 단추같은 꽃이 여름에 피는데 그화경은 60cm에 달한다. 요리용으로나 약초로서도 과거에 쓰이지는 않았으나 옛날부터 허브가든을 비롯하여 정원 만드는데 빼놓을 수 없는 허브였다.



엘로우 야로
영국 등 유럽이 원산지이고 국화과에 속하는 다년생이며 30 -60센티미터로 성장한다. 잎의 모양때문에 '서양토풀' 이라고 불리고 있다. 부드러운 인상의 허브로 하얀색이나 황색, 적색의 꽃이 6,7월에 피기 시작하여 2개월 정도 계속되며 꽃꽂이용으로도 쓰인다. 풀 전체가 연한 털로 덮여 있으며 줄기나 잎에서 방향이 퍼진다. 파종은 봄부터 가을까지 언제나 가능한데 발아 온도는 15-25도가 좋다. 씨뿌리기나 포기나누기로도 간단히 번식할 수 있는데 포기나누기는 겨울과 한여름을 제외하고는 언제든지 가능 하다.



오레가노
오레가노는 줄기가 30-90센티미터이며 뿌리가 수평으로 퍼지는 성질이 있어 줄기도 지면을 기는 것처럼 자라난다. 6월 하순경에 엷은 보라에서 홍색의 꽃이 피는데 그 모양은 포트 마조람과 비슷하다. 발아온도는 20-25도가 좋으며 4월에 파종하고 흙을 얕게 덮는다. 싹이 나면 얽히지 않게 솎아내고 본잎이 4,5장 정도 나오면 30센티미터 정도의 간격으로 정식 한다. 한여름의 고온 상태에서는 좋은 종자를 얻기가 매우 어렵고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불 확실한 종자를 파종하기보다는 새롭게 자란 줄기를 잘라서 꺾꽂이하거나 포기나누기로 번식시켜 재배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3-4년이 지나면 나무처럼 단단해지는 목질화 현상이 일 어나므로 다시 심어주는 것이 좋다.

 



블래더 캄피온
채소로 이용되는 허브로 이태리 요리에는 필수적인 허브. 핑크색의 꽃은정원장식에 쓰이며, 샐러드와 요리의 장식에 이용된다. 자웅이 특이한 성질의 허브이다.





소프워트 (Soapwort)
유럽 원산의 다년초로 미국에도 귀화 되었다. 1m 정도로 자라고 작은
개울이나 길바닥에서 볼 수 있는 야생종은 합겹의 핑크색 꽃, 재배종은 두겹의 꽃도 있으나 어느 것이나 7~9월에 걸쳐 긴 꽃받침으로 지탱되는 꽃을 피운다. 이 꽃이 사랑스러우므로 실용을 위해서만이 아나라 허브가든에는 꼭 심어볼 만하다. 연녹색의 광택이 있고 잎과 뿌리에는 천연의 비누성분이 되는 사포닌이 포함되어 있다.
벨가못 (Bergamot)
눈에 확 뛸 정도로 붉으며, 작은꽃(小花) 사이에서 자라나오는 포(包)가 마치 불꽃처럼 뛰어나온 꽃이 매력적이다. 이 꽃에 상쾌한 방향이 있다.
모나르다 푼크타타(monarda punctata)라는 품종은 북미에서만 보이며 이 향기의 주성분 티몰을 가장 많이 함유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 품종에도 양은 다르지만 같은 티몰이 포함되어 있다. 핑크, 적자색 등의 꽃색도 있으나 케임브리지 스칼렛으로 불리는 이 붉은색 품종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 외에 짙은 보라색의 꽃이 피는 와 일드 베르가모트, 모나르다 피스툴로사(monarda fistulosa), 잎에 짜릿한 레몬 향기가 있는 베르가모트, 모나르다 시트리 오도라타(monarda citriodorata) 등 많은 품종이 있다.
북미 원산의 다년초로 캐나다 북부 에서 미국 북부에 걸처 분포하고 있다. 45~90cm로 자라며 허브가든을 꾸미는데 최적이다.



와일드 스트로베리
즙이 많고 맛있는 야생딸기로 오랜기간동안 재배할 수 있는 덤블형 딸기로 잎, 뿌리, 열매를 모두 다 활용할 수 있다. 잎은 허브차로, 열매는 여름에 쥬스 첨가제로 이용한다.




소프워트 (Soapwort)
유럽 원산의 다년초로 미국에도 귀화 되었다. 1m 정도로 자라고 작은 개울이나 길바닥에서 볼 수 있는 야생종은 합겹의 핑크색 꽃, 재배종은 두겹의 꽃도 있으나 어느 것이나 7~9월에 걸쳐 긴 꽃받침으로 지탱되는 꽃을 피운다. 이 꽃이 사랑스러우므로 실용을 위해서만이 아나라 허브가든에는 꼭 심어볼 만하다. 연녹색의 광택이 있고 잎과 뿌리에는 천연의 비누성분이 되는 사포닌이 포함되어 있다.

 


마르타 로즈마리
진한 보라색의 꽃이 피며 위를 향해서도 자라지만 기어가며 자라는 것이 특징이다. 잎은 소나무 향 내음을 풍기며 신선한 잎, 또는 말린 잎은 물고기, 육류, 닭고기, 스프, 차에 쓰인다.
로즈마리는 꿀풀과에 속하는 다년생 식물로서 자생지에서는 식물의 크기가 2m까지 자라는 관목성으로 일반적인 크기는 30~I50cm에 달한다. 줄기는 사각인데 굉장히 잔가지를 많이 형성하며 잎은 길이 1.5~3.5cm, 폭1.5~3.5mm로서 가늘고 길다. 잎은 윗면은 번들거리는 암녹색이고 뒷면은 회색의 솜털이 많다. 보통 온난지에서는 3월부터,
그렇지 않은 곳에서 는 5월부터 7월에 거쳐 연한 하늘색 또는 연한
분홍빛의 꽃이 피는데, 종류에 따라서는 하얗게 핀다. 식물 전체에서 아주 강한 향기를 내는데, 대체로 소나무나 향나무향이 섞인 듯하다. 로즈마리는 민간요법으로 흥분제, 혈액순환촉진제, 강장제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램스이어 (Lamb'sear )
다년초, 키 30~90cm. 회록색의 연한 털이 덮여 있는 식물. 잎이 양의 귀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피침형의 잎에 향기가 있다. 여름~가을에 긴 꽃대에 연보라, 자주색의 잔꽃이 수상화서로 핀다.




슈퍼버글
잎을 여름에 채취해서 말린 후 액을 뽑아낸다. 수확하면 신선한 채로 고약을 만드는데 이용되고 의학용 오일을 생산하는데도 쓰인다.
 



페파민트 (Pepper mint)
어디서든 잘 자라 초보자들이 키우기에 적합한 허브. 서양 박하라고도 불리는 다년생으로 치아 건강을 도와 치약이나 껌 등의 원료로 쓰이고 있으며, 지성 피부의 유분을 적절히 조절해주면서 모공을 수축시키고 시원한 느낌을 주어 화장품이나 헤어용품에도 많이 쓰인다. 위장병, 두통, 콜레라, 설사, 히스테리, 신경통, 류마티스 등에도 효과가 있으며 감기에도 좋다.




보리지
식물 전체가 흰 털로 덮여 있고 45~90cm의 크기로 자란다.
타원형의 깊은 녹색 잎은 만지면 아플정도의 가는 털로 덮여 있고 꽃이 피기 전에는 24×10cm정도로 자라며, 그 모양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소의 혀"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이다.
줄기가 위로 자람에 따라 잎은 작아진다. 무엇보다도 마돈나 불루로 불리는, 고개를 숙인 것처럼 피는 파란 별모양의 꽃이 청초한 분위기를 자아내 사랑스럽다.




퍼플세이지
레드세이지(Red Sage)라고도 하며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로 어린잎이 자주색을 띠고 흰털이 밀생하여 아름다우나 자라면 세이지처럼 은회록색이 된다. 요리용으로 쓰인다.



로케트(roket)
1년초이며 줄기는 가늘고 가지를 잘 친다. 잎은 장타원형으로 둔한 거치가 있으며 엽맥이 오목하게 들어가 있다. 표면은 짙은 녹색이며 뒷면에는 짧은 털이 있다. 어린 잎에 참깨 같은 향기와 톡쏘는 매운 맛이 있다.
꽃은 줄기 끝에 네장의 꽃잎으로 된 십자화과 특유의 꽃이 핀다. 꽃잎에 자색 맥이 있는 것이 다른 십자화과 식물과 다르며 개화기 또한 8∼9월의 가을인 점이 다르다 .
클레오파트라는 마케도니아의 왕가.프톨레마이오스 가문의 한 여성의
이름이다.클레오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둘째 딸로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와 결혼하여 이집트를 통치하였다.그러던중 안토니우스와 재혼하여 안토니우스와 사이에서 아이를 낳고,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에게 안토니우스 통치권하의 복속국 통치권을 물려 주었다.
로마 이전 로마땅을 모두 그녀가 통치하게 되었을 정도로 그녀는
지략과 미모가 뛰어났다.
클레오파트라의 미모의 비결....
그녀는 용모와 자태에 있어서의 여성적 매력과 수개 국어를 자유로이
구사하는 외교 수완을 발휘할 줄 아는 그녀의 미모비결은
로켓트(roket)라고 불리는 허브라고 한다.
그녀는 미모의 유지를 위해 로켓트를 즐겨 먹었는데 실제로 로켓트에는 비타민C를 비롯한 피부미용에 좋은 비타민E가 많이 함유되어 있다고 한다.
이뇨작용이 있어 다이어트에도 상당한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퍼실컴먼
잎을 계속적으로 베어내 쌈채나, 식용할 수 있는 것으로 미나리 처럼 식용할 수 있는 것으로 국내 참나물과 같은 모양이 비슷하나 향이 있어 향나물로도 불린다. 보통은 2~8월에 파종하는데, 25~30cm 간격으로 심는다. 처음 씨앗을 뿌린후 2개월 부터 수확하여.. 첫 수확후 25일
간격으로 계속 수확한다.




나스터티움 (Nasturtium)
금련화라는 이름으로 여름 화단을 장식하는 1년초. 이국적인 오렌지와 적색 꽃에서 알 수 있듯이 남미 페루가 원산이다. 그 꽃을 샐러드나 차로 만들어 먹는 습관이 고대 오리엔트에서부터 계속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진 허브이다. 반들반들한 둥근 잎에는 크레송을 날카롭게 한 것같은 찌르르한 풍미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줄기는 아래로 퍼지는 성질이 있고 길게 자라면 2m 이상도 된다.


 




컴먼 로즈마리
지중해 연안이 원산인 상록관목, 소나무 잎처럼 뾰족한 잎에 장뇌와 비슷한, 산뜻하고 강한 향이 있다. 라벤더와 나란히 유럽에서는 약, 향수에 사용되었으며, 셀 수 없을정도로 전설과 일화가 많다. 크게되면 2m 가까이 되며, 유럽에서는 로즈마리로 만든 생울타리도 볼 수 있다.




피버퓨 (Feverfew)
남유럽, 아시아가 원산. 16, 17세기에는 약초로 재배되었는데, 지금은 실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원예종으로서 즐겨 재배되는 허브의 하나다. 영국에서는 화이트가든으로 부르는 흰 꽃으로 통일된 정원에 많이 심는 것을 볼 수 있다. 국화와 아주 닮아 있으며, 깊게 파여 들어간 황록색의 잎, 작은 개양귀비 같은 꽃이 핀다. 이 때문에 학사의 단추들(bachelor's vottons), 악마의 개양귀비(devil daisy) 등의 지방이름을 가지고 있다. 식물 전체가 악취, 쓴맛이 있는 향을 가지고 있다.

허브로즈 (Herb Rasa)
효능으로는 신경의 긴장 완화, 냉감증, 임포텐스, 아름다운 피부 가꾸기, 회춘으로 쓰인다.개화기에 꽃을 따서 요리의 향기 내기에 이용한다. 요리의 장식용으로 비타민 C가 많은 독 로즈(유럽 장미)의 열매는 티나쨈, 시럽, 와인에 사용된다.
샐러드, 포푸리, 드라이 플라워, 목욕제 등으로도 쓰인다 허브로서의 장미는 독 로즈(로쟈 카니나), 에센셜 오일의 원료가 되는 다스크 로즈, 사과향이 나는 스위트 프라이어, 로쟈 가리카나등, 하마나스(로사 루 고사)도 향기가 높은 품종이다.

 



슈퍼 페리윙클
땅을 기어가는 상록의 다년초로, 3월말부터 5월까지 피는데 꽃잎 5개가 프로펠라 모양으로 피어난다. 탄닌과 알카로이드를 함유하고 있어
민간약으로 사용되어왔다. 전체 식물의 식용으로 할 경우 독성이 있어 취급시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하며 잎이 너무 아름답다.




하우스 릭
국내에서는 봄에 소나무가 많은 야산의 바위 부근에서 자라거나 시골
기와장 위에서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선인장과같은 다육식물 형태로 지붕위에 기르는 것은 벼락맞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상처난 피부에 붙여 치료제로 사용하기도했다.



페니로얄
학명은 Mentha pulegium은 그리스신화의 여신 Mente가 변하여 다시
태어난 것이라 하여 그녀의 이름을 따서 박하류에 mentha라 붙였다고 한다. Pulegium은 라틴어의 벼룩이라는 뜻의 pulex에서 비롯되었는데 벼룩을 물리치는 데 최고라는 뜻인 puleium regium의 합성어라 한다. 영명의 pennyroyal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페니로얄은 인간에게는 최고의 좋은 향기지만 벼룩이나 모기 같은 해충에게는 최고로 나쁜 향기여서 벼룩이 접근할 수 없도록 쫓아주는 효과가 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페니로얄을 베어다가 천에 싸서 침대 속에 넣어두면 벼룩구제가 되었다.

 



트리칼라 세이지
학명을 Salvia officinalis var tricolor라 하며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다.
잎은 녹색, 백색, 자주색의 3색이 섞여 있어서 이름 그대로 3색 세이지인데 꽃처럼 아름답다.
세이지와 같은 성질이 있어 요리용 또는 약용으로 쓰인다.



케모마일 (Chamomile)
유럽, 북아프리카, 아시아에 걸쳐 널리 자생하고 있는데 대표적 품종으로는 로만종(다년초)과 저면종(1년초)이 있다. 밝은 에머랄드 그린의 가늘게 파고 들어간 잎은 부드럽고 새의 날개를 생각게 한다. 로만 캐모마일은 털모양의 줄기가 지면에 기는 성질이 있어 30cm 정도로 낮게 자란다.
이성질이옛날 부터 잔디 만드는데 이용되었다. 데이지와 비슷한
사랑스러운꽃이 피는데 직경은 1.5cm~3cm 정도로 작다. 흰 꽃잎에
둘러싸인 중앙의 황색부분에 모든 약효성분이 표함되어 있다. 그 때문에 안테미스 노빌리스 '플레나'(A. nobilis 'Plena')라고 하는 꽃잎이 많은 겹꽃 재배종에 비하면 홑꽃의 야생종 쪽이 약효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한다. 그러나 홑꽃은 알칼리성이 강해 위장 벽에 장해를 준다고 해서 영국의 약국법은 공식적으로는 캐모마일을 건조시켜 판매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잔디 만드는데 가장 적합한 품종으로는 꽃이 피지 않는 안테미스 노빌리스 '트레네구이'(A nobilis 'Trenegue')를 들 수 있다. 봄에 20cm 간격으로 심으면 이듬해 여 름에는 향기가 좋은 잔디를 걸으며 즐길 정도로 성장이 빠르다. 염색에 이용되는 안테미스 틴크토리아 (A tinctoria)는 선명한 주황색에 가까운 황금빛 꽃이 피며 주로 프랑스에서 재배, 이용되고 있다




코리아 타임
라벤더나 로즈메리 등과 더불어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허브인 타임은
지중해가 원산지이다. 학명은 '향기를 피운다'는 뜻이며 이른 여름에
흰색에서 분홍색에 이르 기까지 다양한 색의 작은 꽃이 핀다. 타임에는 레몬타임, 골든 타임, 실버타임 등 많은 종류가 있다

 



허브 귤
상수허브랜드에 오시면 더 많은 종류의 허브를 직첩체헙하실 수 있습니다.




클로브 핑크
잿빛이 낀 가는 잎이 우아한 분위기의 덤불로 자라는 다년초. 향신료의 하나로 클로브(T자)와 비슷한 향이 나므로 클로브 핑크라 하며 현재 재배되고 있는 카네이션의 가장 오래된 원종이다. 영구에서는 헌 건물이나 돌담의 페허에서옛적의 추억으로 자생하고 있는 것도 보이는데 원산은 지중해 연안, 북아프리카의 따뜻한 지방이다.





루바브
루바브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시대부터 재배하여 식용으로 이용했던 역사가 오랜 채소이다. 식용부위는 봄에 나오는 잎자루를 연화시켜서 이용하는데 신 맛과 독특한 향기가 있다. 연화시키면 신 맛이 감소되므로 잎을 따버리고 잎자루만 이용하는데 껍질을 벗기고 2-3cm길이로 썰어서 삶아 샐러드에 섞기도 하지만 주로 설탕과 함께 졸여서 잼, 젤리, 파이 , 푸딩, 케익 등에 이용하 면 맛있다. 완하작용이 있으며 산성식품이다. 많이 먹으면 설사를 일으키므로 변비에는 좋다. 그러나 신장염이 나 요도염이 있는 사람은 먹지 않는 것이 좋다. 잎에는 수산이 함유되어 있어서 먹지 못하며 동이나 놋쇠 제품을 닦는데 쓰인다. 또한 주전자에 넣고 물을 끓이 면 주전자 속에 낀 물때를 없애준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뿌리 를 담배의 향료로 쓰며 약용으로 말라리아, 아구창, 기침, 강장제 등으로 이용한다.

 



코튼 라벤더 (Cotton Lavender)
은녹색의 깊은 톱니가 있는 잎, 캐모마일과도 비슷하다고 하여 이 이름이 붙었다. 남유럽 원산의 관목상이 되는 가년초. 작고 노란 단추같은 꽃이 여름에 피는데 그화경은 60cm에 달한다. 요리용으로나 약초로서도 과거에 쓰이지는 않았으나 옛날부터 허브가든을 비롯하여 정원 만드는데 빼놓을 수 없는 허브였다.





레몬 밤
지중해 지방이 원산인 다년초. 레본밤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잎은 문지르기만 해도 강한 레몬의 향이 난다. 그 하트모양의 잎은 테두리가 톱니 모양이며 줄기에 싸으로 붙으며 황색이 낀 녹색이다. 덤불이 되어 자라는데 근경은 짧다. 6~10월에 걸쳐 황색이 낀 흰 꽃이 피는데 가지 위쪽의 잎 기부에 방이 되어 붙는 작고 소극적인 것이다.



로즈 제라늄 (Geranium )
향신제라늄은 화장업계와 향료 산업체에서는 아주 잘 알려진 식물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향수는 겹게 노화된다. 따라서 구입은 믿을 수 있는 상점에서 구해야 한다. 겨울철에는 식물을 방안에 두고 가끔 흔들어 주면 좋은 향이 난다.
여름에는 실외에서 햇빛을 충분히 받게 해준다. 많은 향과 어울리지 않지만 수집가의 취향(Collectors dream)에 따라 아름답고 좋은 냄새가 나면서 빨리 자라는 식물군으로 인기 가 있다. 자체의 독특한 생육 습성과 향기를 가져 많이 선택되게 된다. 색깔있는 꽃은 봄에 피지만 일반적으로 작다.
맛있고 좋은 냄새나는 제라늄은 여러 형태로 가꾸게 된다.
공중걸이(Hanging basket), 창가식물(Wind box)이나 어떤 형태의 용기에서도 자랄 수 있다. 덩굴형 식물은 지피식물로서 이용될 수 있고 다른 형태의 식물은 키가 0.3~1m로 화단 경계로 이용할 수 있다. 아이들은 향기나는 제라늄에 많은 흥미를 갖는다

 



골든타임
라벤더나 로즈메리 등과 더불어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허브인 타임은 지중해가 원산지이다. 학명은 '향기를 피운다'는 뜻이며 이른 여름에 흰색에서 분홍색에 이르 기까지 다양한 색의 작은 꽃이 핀다. 타임에는 레몬타임, 골든 타임, 실버타임 등 많은 종류가 있다






세인트 존즈 워트 (St. Jogn's Wort)
세례자 요한에게 봉헌된 허브. 유럽 아시아 원산의 다년초 야생은 삼림 가운데 등 그늘에서 볼수 있다. 수많은 변종이 있으나 허브가든에서 재배되어 온 품종은 이 H. pertoratum이다. 1m 정도로 자라며,
성 요한의 날(St. John's dat, 6월 24일) 무렵에 별 모양의 노란 꽃이 핀다. 이 꽃은 크롬을 매염제로 쓰면 오렌지색의 염료로도 된다.




러시안 타라곤
달콤한 방향과 짜르르한 쓴맛을 함께 가진 도특한 풍미로 위대한 요리용 허브의 하나로 들고 있다. 농록의 잎은 가늘고 길며, 광택이 있고, 높이 90센치 정도의 무더기로 자라는 가년초이다. 7~9월에 걸쳐 산탄(散彈)과 같은 형을 한, 황색을 띈 작은 봉오리를 맺는데, 꽃이 피지 않는 불임성이다. 그 때문에 종자가 생기지 않는다. 대표적인 품종으로서 이 프렌치 종 외에 러시안 타라곤이라는 품종이 있다. 이 러시안 타라곤 아프테미시아 트라쿤쿨로이데스(Artemisia racunculoides)는 시베리아가 원산이다.
프렌 치 타라곤에 비해 큰 무더기(1.5m)로 자라고 잎의 색도 연하고, 크다. 자극미는 강하지만 향기가 떨어지므로 오래의 풍미로서는 거의 이용되는 일은 없다. 그러나 페르시아에서 는 구운 양고기에 첨가하는 샐러드용으로서 널리 이용된다고 한다. 프렌치종과 같은 섬세함은 기대할 수 없고, 종자로서 손에 넣는 것은 이 품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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