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1916-1956 편지와 그림들 - 개정판 다빈치 art 12
이중섭 지음, 박재삼 옮김 / 다빈치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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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 이중섭, <이중섭 1916-1956 편지와 그림들>

 

 

[끝끝내 만나지 못한, 그래서 더 절절한 사랑 이야기]

 

   붉은 배경의 황소그림으로 유명한 이중섭. 이 책은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이중섭이 일본인 아내(마사코/한국이름 이남덕)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그의 작품들이 담겨있다. 그가 남긴 편지는 아내를 향한 사랑과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 한데 겹쳐 하나같이 절절함이 묻어난다.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 지금의 아내인 후배 마사코를 알게 되고 둘은 사랑을 약속하며 따뜻한 미래를 꿈꾸지만 현실은 가혹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1916-1956)를 봐도 알 수 있듯, 그는 우리나라의 일본 식민시대와 해방, 독립, 6.25전쟁 등 온갖 고난의 시기를 지나야 했다.

 

    애국자였던 그가 일본과 대립구도를 이루고 있던 국가 분위기 속에서, 일본인 아내를 두고, 작품 활동을 하며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지독히 가난했고, 남의 신세를 자주 져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중섭의 편지에는 긍정적이고 희망찬 미래를 기대하는 말들이 가득하다. 무엇보다 자신의 두 아들들에게 아빠가 가면 꼭 자전거 사줄게. 조금만 기다려라고 말하는 부분은 정말 눈물겹다.

 

    자신은 밥을 굶고, 난방을 떼지 못해 덜덜 떨어가며 작품을 그리면서도 끝까지 아내와 두 아들의 건강을 걱정하는, 뼛속부터 다정한 남편이자 아빠였던 이중섭. 그와 이남덕 여사, 두 아들이 결국은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 병실에서 홀로 생을 마쳤던 그의 외롭고도 고달픈 삶이 헤아릴 수 없이 긴 여운을 남겨준다.

 

 

* cf )

  1. 그의 편지는 모두 일본어로 쓰였고, 그것을 박재삼씨가 한국어로 번역했다.

  2. 편지글에 나오는 아고리는 턱이 길다고 해서 붙인 이중섭의 애칭이고, ‘대향구촌은 이중섭의 호이다. 발가락 군은 발가락이 예쁘다고 해서 붙인 이남덕 여사의 애칭이다.

 

 

  "춥고, 배고픈, 그런 괴로운 때는 사경을 넘어 분명히 아직도 대향(이중섭)은 살아남아 있으니까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만난다는 희망과, 생생하고 새로운 생명을 내포한 믿을 수 있는 새로운 방향을 지시하고 행동하는 회화를 그릴 수 있다는 희망으로 참고 견뎌왔던 것이오." p18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정말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소. 그러나 앞으로 대향은 꼭 훌륭하고 새로운 예술을 창작하고 표현할 자신으로 부풀어 있으니 이제부터는 당신에게나 아이들에게나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될 생각이오. 멀지 않았소." p44 

 

 

 

   "나의 호흡 하나하나는 귀여운 아내, 남덕의 진심에 바치는 대향의 열렬한 사랑의 언어라오. 다정하고 따뜻하고 살뜰한 당신의 모든 것만을 나는 생각하고 있을 뿐이오." p48

 

 

  "우리 가족 넷이서 단란하게 손을 잡고, 힘차게 대지를 밟으면서 정확한 눈, , 눈으로 모든 것을 분명하게 응시합시다. 한 걸음 한 걸음을 확실하게 내디딥시다. 돈 걱정 때문에 너무 노심하다가 소중한 마음을 흐리게 하지 맙시다. 돈은 편리한 것이긴 하지만, 돈이 반드시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하오. 중요한건 참 인간성의 일치요. 비록 가난하더라도 절대로 동요하지 않는 확고부동한 부부의 사랑 그것이오. 서로가 열렬히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한다면 행복은 우리 네 가족의 것이 아니겠소. 안심하시오. 가난해도 끄떡없는 우리 네 가족의 멋진 미래를 확신하고 마음을 밝게 가집시다

." p59-60

 

 

 + 부록 : 이중섭의 인품과 예술, 구상

   "중섭은 참으로 놀랍게도 그 참혹 속에서 그림을 그려서 남겼다. 판잣집 골방에 시루의 콩나물처럼 끼어 살면서도 그렸고, 부두에서 짐을 부리다 쉬는 참에도 그렸고, 다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그렸고, 대폿집 목로판에서도 그렸고,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합판이나 맨종이, 담배갑, 은종이에다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고, 잘 곳과 먹을 것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워도 슬퍼도 그렸고 부산제주도통영진주대구서울 등을 표랑전전하면서도 그저 그리고 또 그렸다."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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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1916-1956 편지와 그림들 - 개정판 다빈치 art 12
이중섭 지음, 박재삼 옮김 / 다빈치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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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남덕아! 이 대향(중섭)이 힘껏 안아줄게˝ 일제 식민지와 6.25전쟁 등 고난의 시대를 살며 자신의 창작과 아내와 두 아들을 모두 사랑으로 껴안은 남자. 그가 직접 쓴 편지와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의 생애를 다룬 부분은 약했지만 이 책의 초점은 편지와 작품이므로 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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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 (양장) - 무기.병균.금속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가, 개정증보판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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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레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

 

[인류 기원과 진보, 불평등에 관한 거대한 서사]

 

    이 책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조류학자 및 생물학자로, 뉴기니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그곳 생물과 원주민들의 삶을 관찰했다. 뉴기니는 오스트레일리아 북쪽에 있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열대 섬으로(파푸아뉴기니로 더 잘 알려진), 다양한 생물과 희귀종들이 살고 있어 생태적 가치가 어마어마하게 높은 섬이다.

    어느 날 그가 뉴기니의 해변을 걷고 있을 때, 그곳의 남다른 정치가로 알려진 얄리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 만남은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을까. 얄리가 던진 질문이 바로 이 책 <, , >를 탄생하게 했기 때문이다.

    얄리는 그에게 자기 민족의 조상들이 과거 수만년 동안 어떤 경로를 통해 뉴기니에 도착했으며, 또 유럽의 백인들은 어떻게 지난 200년 사이에 뉴기니를 식민지로 만들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200년 전까지만 해도 모든 뉴기니인은 아직 석기시대에 살고 있었다. 그곳은 세계의 진보와 발전과는 동떨어진 곳이었다. 그러나 백인들이 그곳에 들어왔고, 그들에게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백인들에게는 이미 익숙한)를 강요하면서 의약품, 의복, 음료 등 새로운 문물을 잔뜩 들여왔다.

    당신네 백인들은 그렇게 많은 화물을 발전시켜 뉴기니까지 가져왔는데 어째서 우리 흑인들은 그런 화물들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간단해 보이는 얄리의 이 질문은 사실 인류의 발전에 대한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그 질문을 부와 힘은 왜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분포하게 되었을까?, 인류의 발전은 어째서 각 대륙에서 다른 속도로 진행되었을까?, 어째서 아프리카인 또는 아메리카 원주민이 아니라 유럽인들이 총기, 병원균, 그리고 쇠를 갖게 되었을까?’와 같은 물음으로 확장시켰다. 그리고 이 책은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한 하나의 여정이 담긴 결과물이다.

 

    이 책의 핵심 요지를 한 마디로 압축하면, “민족마다 역사가 다르게 진행된 것은(세계의 불평등이 기원한 이유는) 각 민족의 생물학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환경적 차이 때문이다.”고 할 수 있다.

    즉, 어떤 이들은 백인이 흑인보다 우월하기 때문에(유전적 혹은 지능적으로) 현재 아프리카를 비롯한 흑인들의 대륙이 못 살게 된 것은 필연적 결과라고 말한다. 태생이 그렇다는 얘기다. 하지만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이를 절대 부정하며, (인류를 흑과 백으로 나누는 것도 우습지만 굳이 나눈다면) 둘 사이는 생물학적으로 결코 우열을 따질 수 없고, 이들의 조상이 살았던 대륙의 지리, 환경적 차이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 지리, 환경 차이로는 우선 식량 생산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비옥한 땅이 전제조건이 된다. 사막지대보다 고온다습한 환경이 인류에게 풍성한 먹거리를 제공하고, 그런 조건을 우연히 갖게 된 사람들은 악조건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기 때문에 인구밀도도 높아진다. 인구밀도가 높아지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계급을 형성하고, 이 때 낮은 계층 사람들이 높은 계층 사람들을 먹여 살리면서 기술도 발전하게 된다. 높은 계층 사람들은 농사 걱정 하지 않아도 되니, 그 시간에 새로운 기술을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렇게 발전된 기술은 대륙에서 대륙으로 퍼져나가게 되는데, 아메리카처럼 수직으로 긴 땅보다, 유라시아처럼 수평으로 긴 땅이 전파 속도에 더 유리하다. 무엇보다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대륙의 중간에 자리하고 있는 사막은 기술을 전파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되었다. 따라서 유라시아가 다른 대륙보다 더욱 빨리 기술을 습득해 발전할 수 있었고, 그 기술은 인류에게 총과 쇠를 가져다주었다.

    한편 균은 가축동물에서 인류에게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 또한 비옥한 땅이 전제되어야 한다. 척박한 땅에서는 가축동물을 키울 수 없을뿐더러, 그러한 동물들이 생기거나 살아남을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옥한 땅 사람들은 가축을 통해 각종 세균에 감염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균에 대한 면역력을 갖게 돼, 다른 대륙을 정복할 때 의도치 않게 유리한 조건을 지니게 된 것이다.

 

    나는 사실 책의 목차를 봤을 때 잠깐 혼란스러웠다. 책 내용은 당연히 제목에 따라 총과 균과 쇠파트로 나뉘어져, 각각이 인류와 세계 불평등에 미친 영향이 무엇인지 살펴보리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본문은 총, , 쇠를 자세히 다루기보다, 그 세 가지가 어떤 경유로 어느 대륙에 먼저 생기게 되었는지를 살핀다. 그리고 저자는 책의 말미에 파격적인 말까지 덧붙인다. ‘만약 과거에 유럽이 아니라 아프리카 흑인들이 먼저 총, , 쇠를 다룰 수 있었다면, 그런 환경적 요건들이 허락되었다면, 지금 이 세계는 그들이 주도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역사책은 그 책을 쓴 학자의 관점과 주관에 따라 천차만별로 해석된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한 책만 읽고서는 온전히 그 책이 기록한 주제의 역사를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두고서도 다양한 관점, 해설, 의견이 존재하기 때문에 더더욱 많은 책을 읽고, 많은 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

 

    <, , >를 읽으면서 기뻤던 것은,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역사적 관점이 내게 충분히 납득될 만했다는 점이고, 무엇보다 번역이 무척 깔끔해 이 두꺼운 책을 막힘없이 술술 읽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거듭 반복하며 관철해 나가기 때문에, 독자는 이 방대한 책의 주제가 무엇인지 중간 중간 잊어버리지 않으면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한 사람(얄리)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 시작된 여정. 그 여정이 인류 기원과 진보의 역사,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대륙 간 불평등의 본질을 파헤쳐주었다. 저자의 방대한 지식과 그 지식을 섬세하게 풀어내는 능력, 인류에 대한 사랑과 뛰어난 관찰력,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번역이 빛난다는 점에서 별 다섯 개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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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 (양장) - 무기.병균.금속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가, 개정증보판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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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 시작된 여정. 그 여정이 인류 기원과 진보의 역사,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대륙 간 불평등의 본질을 파헤쳐주었다. 저자의 방대한 지식과 그 지식을 섬세하게 풀어내는 능력, 인류에 대한 사랑과 뛰어난 관찰력,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번역이 빛난다는 점에 별 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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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기독교
프란시스 쉐퍼 & 한스 로크마커 지음, 김진선 외 옮김 / IVP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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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시스 쉐퍼 & 한스 로크마커, <예술과 기독교>

 

 

[자유와 아름다움을 향한 여정]

 

1. 예술과 성경 (프란시스 쉐퍼)

 

p9-10

(그리스도의 주재권)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예술을 삶의 가장자리로 밀어내고 격하시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생활의 나머지 영역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재권에 대해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면서도 그 범위를 매우 협소한 삶의 영역으로 축소시켜 적용해 왔다. 우리는 인간의 전 영역과 우주의 전 영역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잘못 이해해서,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의 삶과 문화에 성경이 제공하는 그 부요함에는 아직 근접하지 못하고 있다.

  삶의 전 영역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재권이란 의미는, 기독교는 이상적인 영역이 따로 존재할 수 없으며 육체와 영혼에 대한 위계나 이분법이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도 창조하셨고 그분의 구속 사역은 전인(the whole man)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복음주의자들은 영혼이 구원을 받고 천국으로 간다는 데 지나치게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인간의 전인성에 대해서 소홀히 한다는 비판을 종종 받아왔다. 그러한 비판은 타당성이 있다

 

p13

  예술에 대한 관심에도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적용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예술들을 단순한 삶의 한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도구로 보고 이러한 예술들을 사용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한다. 예술 작품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될 수 있다.

   

p19

  “또 솔로몬은 보석으로 전을 꾸며 화려하게 했으니”(대하3:6). 성전은 아름다움을 위해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성전을 보석으로 꾸밀 실용적인 이유는 전혀 없었다. 어떤 실리적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성전 내부가 아름답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미에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

 

p37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서 주인이시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진리뿐 아니라 아름다움도 창출해야 한다

 

p39

  사실상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실제적인 의미이다. 위대한 예술가의 경우에도 가장 중요한 예술 작품은 자신의 삶이기 때문이다.

   

p73

  그리스도인 예술가들은 상상과 환상의 위협을 받을 필요가 없다. (..) 그리스도인은 실제로 자유로운 인간이다. 다시 말해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존재다. 이것 역시 우리의 유산이다.


2. 예술과 그리스도인 (한스 로크마커) 

 

p29

  교회의 후퇴로 말미암은 두 번째 결과는 기독교계 내에서 문화와 예술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은 우리를 단지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거나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려 함에 있지 아니하고, 우리를 구속하셔서 참 인간이(이 말이 지니는 충만한 의미에서) 되도록 하심에 있음을 명심하고 있어야 한다.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함은 생활의 모든 면에서 충만하고 자유롭고 인간다운 능력을 발휘하며 살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p34

  우리에게 주어진 질문은, 현대의 풍요가 어디까지 복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 혹은 어디까지 저주로 변해 버린 복에 해당하는가 하는 것이다.

 

p42

  복음 전도의 틀에 맞추기 위해서는 자주 타협을 해야, 즉 예술을 팔아야 한다. 그런데 헨델의 메시아”, 바하의 마태 수난곡”, 렘브란트의 부인한 베드로”, 그리고 시토 수도회의 건물들은 복음 전파의 수단도 아니며 복음 전파를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작된 것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예술을 더럽히지 않았다. 그들은 종교적 선전, 혹은 거룩한 광고를 위한 수단을 제작하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의 작품은 심오하고 소중한 것이다. 그 작품들은 영혼 구원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었고, 그 자체로서 목적이었으며 의미가 있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무엇인가 호소하려 하거나 원래 예술이 전달할 내용이 아닌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바로 그러한 노력 속에서 예술이 비정직해지고 이류로 속화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p42-43

  참으로 예술가에게 복음 전도자가 되라고 요구하는 것은 예술의 의미,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다른 활동의 의미에 대해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우리는, 자든지 먹든지 혹은 열심히 일하든지 항상 그리스도인이다.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한다. 우리 기독교는 경건한 순간들, 종교적 행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의 삶의 목적도 복음 전도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목적인 것이다.

 

p45

  몇몇 토론회에서 나는 종종 그리스도인으로서 작업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 여기에서 받는 느낌은 흔히 이러한 질문들은 율법주의적 틀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이다. 마치 기독교적 요소는 몇몇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구성된다는 것인데, 그 규칙도 대개 부정적인 것들이다. 예컨대, 내가 이것을 해도 괜찮을까? 그것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영성을 너무 기계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우리는, 기독교라 불리는 특별한 것이 부가된 인간이 아니다
 

 

-

  쉐퍼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의 주재권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분의 구속 사역은 전인(the whole man)을 대상으로 한 것임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과 그분 밖에 있는 것을 명백하게 구분하거나 배제시킬 수 없다. 모든 것은 그분 안에 있다. 아무리 세속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분의 권한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유율법주의’ 혹은 문화 예술기독교 전통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일 것이다. 이 투쟁은 사실 기원전후부터 시작되었다. 구약과 신약, 유대인과 비유대인(이방인), 할례받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 믿음이냐 계명이냐 등. 그러나 자유는 율법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율법을 완성한다. 율법이 자유를 끌어안을 수는 없지만, 자유는 율법을 끌어안을 수 있다. 여기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의의가 있다.

 

 우리는 견고한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세상 모든 만물을 누릴 자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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