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망각 모리스 블랑쇼 선집 4
모리스 블랑쇼 지음, 박준상 옮김 / 그린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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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프랑스 철학의 얼굴없는 사제’라고 불리는 모리스 블랑쇼는, 은둔을 하면서 비평적 에세이도 쓰고 소설도 쓰고, 여러가지 글쓰기를 한 사람이다.  20세기 기라성같은 학자 · 예술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한 사람을 꼽는다면 모리스 블랑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블랑쇼와 함께 따라다니는 또 한 사람이 있다면 조르쥬 바타이유. 1962년 바타이유의 죽음 앞에 블랑쇼가「우정」이라는 글을 써서 바쳤던 것을 보면 아마도 둘은 돈독한 교분을 유지한 사이였지 않았을까.

 

 

   
 

  서로가 서로에게 현전하기 위해 자신들의 현전으로부터 돌아서서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고, 서로를 찾고 있었다. 그녀가 단지 기다림의 밑바닥으로부터 그에게로 온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얼마나 불충분한다. 그녀는 모든 기다림 바깥에서 자신의 현전에 따라 급작스럽게 결정을 내려 거기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기다릴 수 없었고, 비밀스럽게, 명백하게, 가장 단순한 욕망이 가져온 흥분 속에서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요"라고 끊임없이 말하고 있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기다림의 무한에 노출된 자신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다.
  연결되어서, 연결되어 있기를 기다리면서.  (82p)

  


  기다림 속에서 말은 모르는 사이에 물음으로 바뀌었다.
  기다림이 가져오는 물음을 기다림 속에서 찾아가면서. 그것은 그가 발견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물음도 아니고 고유한 묻는 방식도 아니다. 그는 찾고 있다고 말하지만 찾지 않으며, 그가 묻는다면, 아마 그는 단언하지도 묻지도 않으며 다만 기다리는 기다림 속에 이미 충실히 있지 못한 것이다. (83p)

 

 기다림 속에서 그는 기다림에 대해 물을 수 없었다. 그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는가, 그는 왜 기다리고 있었는가. 기다림 속에서 기다려진 것은 무엇인가? 기다림의 고유한 점은, 기다림이, 기다림에 따라 가능해지지만 기다림과 양립될 수 없는 모든 형태의 질문들을 비껴간다는 데에 있다. (87p)

 
   



 

 기다림 망각(L’attente L’oubli)은 언어로서 서사를 그려나가는 이야기 구조가 아니다. 언어에는, 두가지 측면이 있다. 언어, 그 자체. 그리고 언어가 지시하는 것.  언어가 지시하는 것을 극단적으로, 다 빼 버리고 글을 쓴다면? 언어의 의미와 질서를, 언어에 의해 다지고 쌓아지는 언어의 공간을, 배제하고 쓴다면?  요컨대, 언어의 즉물성으로 산문을 쓴다면?

 

글에서 자주 보여지는 ‘현전’은, 하이데거의  ‘현존재:다자인(Dasein)’과,  ‘기다림’은,  역시 하이데거의 전통에 있는 데리다의 ‘차연(differance)’ 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실존주의 철학에서의 실존이란 ‘주체’인 반면, 하이데거 철학에서의 현존재는 주체가 아니고 ‘장소’ 개념이다. 주체와 장소는 틀리다. 존재가 드러나는 장소가 현존재다. 존재란, ‘무엇’도 아니고 ‘누구’도 아니고 “장소”다. 관계맺음에 의해  ‘은폐’되는 장소인 동시에 ‘존재를 여는’ 장소이기도 한 것이다.

 

 기다림 망각(L’attente L’oubli)은 색즉시공(色卽是空)공즉시색(空卽是色)의 블랑쇼 버전이다. 목적론과 인과론이 다 부정되고 있다. 공(空)은 텅 비었고, 색(色)은 무엇인가가 있다. 기다림을 하나의 유(有)로 보면, 기다림의 대상도 기다림 자체도 실체가 아닌 공(空)으로 볼 수 있다. 무엇을 한다는 것(기다림)은 그것이 무엇이건, 어떤 것을 하는 것이건, 결국은 인연의 다발 속에서 끊임없이, 존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기각시킴으로써 유효하게 만드는 것이다.   

 

 

*  


   
 

여기에서, 그리고 그녀에게 아마 전할 이 문장에서 그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는 거의 실제로 그녀가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이 메모들을 써 나갔었다. 그는 쓰면서 여전히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는 그 메모들을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그녀는 읽기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몇 대목만을 읽었을 뿐이고, 그것도 그가 그렇게 하도록 조용히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누가 말하나요?" "그런데 누가 말하나요?" 그녀는 뭐라고 지적할 수 없는 실수를 범했다는 감정을 느꼈다. "당신에게 올바르게 보이지 않는 것을 지우세요." 그러니 그녀 또한 아무것도 지울 수 없었다. 그녀는 우울하게 종이들 전부를 내던졌다. (11p)

 
   

 서구어는 대명사 중심이다. 인칭대명사와 지시대명사가 굉장히 발달했다.  불어 원문에서 대명사가 들어가 있더라도, 우리말에는 인칭대명사를 많이 쓰지 않으니까, 조금 순화시킨 우리말 문장 구조로 번역할 수 있지 않을까?  번역자가 센스가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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