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렌초의시종 > 진리와 말, 검의 양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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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8
헤르만 헤세 지음, 박병덕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평점 :
헤르만 헤세가 빚어낸 인물, 싯다르타의 생애를 따라가면서 느낄 수 있었던 점은 무엇보다도 싯다르타의 고집스러움이었다. 처음의 다소 억지스럽고 조악한 논리로부터 시작해서 노년에 이르러서의 치밀하고 정교한 논증에 이르기까지 외부적인 틀에 있어서의 변화는 있었지만, '진리에의 도달에 있어서의 언어와 교육의 한계'라는 중심적인 내용만큼은 항상 굳건히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가 스스로 누구보다도 탁월하고 위대한 각자(覺者)로서 인정했던 고타마의 문하에 들지 않은 것과, 그 결정을 내리고서 깨달음에의 중요한 계기를 찾은 후에 자진해서 속세로 돌아가 온갖 환락과 방탕함을 누리고서 다시금 새로운 깨달음에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일련의 과정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고타마의 문하에 들지 않은 것은 깨달음은 결국 누군가의 가르침에 의해서가 아니라, 먼저 깨달은 자가 그 정각(正覺)의 순간에 느꼈던 비밀스러운 체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그의 강한 소신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런 까닭으로 그 이후의 속세 행 역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일련의 과정으로써 현실의 고와 락의 끝을 직접 체험해야한다는 주장으로 충분히 정당화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싯다르타의 구도행은 분명 깨달음에 있어서의 개별적인 사유와 실천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주장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이 작품이 집필되기 얼마 전에 그가 겪었던 제1차 세계대전과도 연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프랑스와 영국을 중심으로 했던 유럽 열강 체제에서의 주도권을 잡고자 했던 독일 제국은 '게르만 민족의 영광'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강력히 제창했으며, 이제 경도된 국민들은 결국 전쟁 주장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기에 이르렀다. 국민 개개인이 저마다의 비판적이고 독자적인 사유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채, 단순히 국가와 사회가 일방적으로 소리 높여 주장하고, 가르치는 주장을 옳은 것이고 '진리'라고 받아들인 결과가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었던 것이다. 개인들이 저마다가 지닌 사유의 책임을 방기할 때 일어나는 결과는, 그 자신의 삶의 타락 내지는 정체뿐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삶 자체를 붕괴시킬 수 있다는 것을 헤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이와 같이 시종일관 싯다르타의 입을 빌려서 홀로 자신의 깨달음을 추구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때로는 젊은 싯다르타의 물정 모르는 오만함으로, 시간이 흐른 후에는 뱃사공 싯다르타의 강물의 흐름과도 같은 도도함으로 말이다.
그런데 실은 가르침에 의한 일방적인 진리의 학습이 지닌 문제점은 단순히 앞서 1차 대전의 예에서와 같이 그 진리 자체가 틀렸을 때에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좀더 깊이 있게 파고든다면 가르쳐지는 진리에는 무엇보다도 그러한 가르침의 도구로써 사용되는 언어 그 자체가 지닌 한계가 자리잡고 있다. 말년의 싯다르타와 고빈다의 대화에서도 드러나듯이 싯다르타가 주장한 사물에 대한 '사랑'을 고빈다는 지극히 단순한 의미로 받아들인 나머지 그것이 석가모니가 일찍이 금지한 세속에 대한 사랑, 곧 집착이라고 공박했다. 실상 싯다르타가 말한 것은 일찍이 고타마, 곧 석가모니가 그 한평생을 바쳐서 모든 인간 중생을 구원하려 함으로써 보여주었던 한없이 큰 자비심, 곧 전혀 다른 차원의 무량한 사랑이었던 것을 고빈다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예는 요즘의 언론들이 지닌 문제에서도 충분히 보고 느낄 수 있는 문제이다. 똑같은 한 사람의 발언을 놓고도 언론 매체에 따라 강조와 생략, 해석을 가함으로써 저마다 다르게 표현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물론 1차적으로는 각 언론 매체들이 저마다의 의도라는 기본적인 틀을 가진 상태에서 그 발언을 그에 끼워 맞추고자 억지를 쓰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발언자의 생각이 '말'이라는 것을 통해 전달되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이미 오해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는 정치가의 경우, 여러 가지 제반 상황을 통해서 그가 지닌 생각이나, 의도, 목표가 이미 은연중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할지라도 일단 그 내면의 것이 자신의 입을 통해 표현되는 순간, 그것은 그 자신의 뜻과 무관한 방향으로 전달될 가능성을 포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꼭 우리가 언론을 통해서 그의 발언을 들었다고 해서만 부담하게 되는 위험성이 아니라, 설령 우리가 직접 가서 그의 발언을 보고 듣는 다고 할지라도 얼마든지 그러한 오해와 편견을 가질 가능성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이는 각종 메스미디어의 발달을 타고 정치인들의 간접적인 대(對) 국민 접촉이 활성화되었음에도 여전히 그들의 발언과 행동에 대한 온갖 논란들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것은 그의 입을 통해 나온 그의 발언들과 그에 담긴 생각들이 수용하는 하는 이들에 의해 재해석되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거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며, 또한 그 수용자들은 발언의 당사자와는 상이한 지적 수준이나 감정적 배경을 바탕으로 저마다의 생각과 경험을 통해 그 해석과정에 나서게 되기 때문에 남는 것은 그의 발언에 담긴 단어 하나하나 일뿐, 발언자의 의도는 기본적으로 그것들과 유리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비단 말을 통한 깨우침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진리는 가르쳐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싯다르타의 주장에도 문제와 위험의 소지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단순히 진리 그 자체가 직접적으로 가르쳐질 수 없다고 해서, 진리에의 탐구과정에 있어서 타인에 의한 가르침과 그 영향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이는 싯다르타가 겪은 그러한 가르침에 있어서, 그가 겪은 속세의 생활이 맡았던 반면교사의 역할, 타인들의 삶과 주장의 이해를 위한 길잡이의 역할을 긍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일찍이 그가 보고 들었던 타인들에 의한 깨달음을 위한 가르침은 그 자신이 주장하는 것처럼 끝없는 오해의 가능성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이가 갖춰야할 사유와 관점의 성숙을 위한 기반을 제공하는 역할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는다. 비록 싯다르타는 시간의 지양과 동시성의 관점에서 모든 인간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부처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할 것을 주장하지만, 그 모든 인간이 진리에 대한 배움이 전혀 없는 상태로 한평생을 살게 된다면 그 사람들은 비록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부처를 존중할 수는 있다고 할지라도 결코 그 자신이 부처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설령 그 부처가 그들 모두의 내면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부처를 볼 수 있는 눈을 갖추지 못했으며, 꼭 그 부처를 찾아야만 할 필요성도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가르침이 배제된 진리에의 인식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비록 진리 그 자체만은 가르침에 의해 도달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진리가 가르침 없이 도달된다는 주장에는 찬성할 수도 없고 그러한 주장에는 분명 위험성이 있다고 본다.
진리 추구에 있어서 적절한 가르침에 대한 무용론은 자칫 잘못하면 앞서 말했던 '모든 인간의 내면에 있는 부처'에 대한 참칭으로 비화될 수도 있다. 바꿔 말한다면 어떤 이들은 단지 진리에 있어서 가르침이 무용하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객관적 근거와 배경 없이 자신만의 조악한 사유를 바탕으로 그 자신의 부처됨을 자만하고 남들에게 강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재 미국 대통령으로 있는 부시의 경우에는 나이 40세에 이르도록 방탕하고 타락한 생활을 하다가 별안간 회심(悔心)하여, 오늘날의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 과정에서 빌리 그레이엄 등의 영향이 다소 있었다고는 하나, 그 자신이 말하듯이 그의 종교적 변화는 어디까지나 그 스스로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되며, 그 이후의 신학적 학습 역시 그의 회심 이후에 그가 자신의 논리를 체계화하기 위해 꾀한 것이지 그가 회심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 까닭으로 그 누구의 적절한 가르침이 결여된 상태에서의 그의 종교적 회심이라는 것은 오늘날 목도하다 시피 지극히 단순하고 치졸한 형태의 종교와 정치의 일치 상황을 불러오고 말았다. 지금 부시가 주장하는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그 자신의 '당선과 번영을 바라는' 하나님일 뿐이며 미국에서 소외 받고 고통받으며 살고 있는 수많은 소수 계층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다. 앞서 헤세가 주장했던 개개인의 노력을 통한 깨달음은 결국 이런 식으로 극단화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헤세와 싯다르타가 말했던 깨달음이란 단지 그 과정에서의 개별화일 뿐, 그 결론에 있어서는 석가모니와 싯다르타가 그랬듯이 확실한 동일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깨달음에 대한 보편적인 인정의 기준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도 어렵고, 존재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볼 때, 깨달음의 과정에 있어서, 타인에 의한 가르침이라는 동일성의 요건이 배제된다면, 그 수가 많던 적던 부시와 같은 독선적이고 거짓된 각자(覺者)의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때로는 그 가르침 자체가 잘못되어 수많은 거짓 각자를 길러낼 수도 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결국 싯다르타 본인의 주장처럼, 진리라는 개념 자체가 세상의 그 모든 양극성(兩極性)을 포괄하는 단일성으로써만 그 참된 의미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이라면, 그가 주장한 진리와 깨달음의 관계가 보여주는 이와 같은 두 가지의 상반된 가능성이야말로 그의 주장이 진리에 대한 하나의 '가르침'이라는 증거로 삼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역설적으로 그 역시도 나에게 하나의 진리를 가르쳤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