앰 아이 블루?
마리온 데인 바우어 외 12인 지음, 조응주 옮김 / 낭기열라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양지바른 그늘



  우선 서평을 쓰기 앞서, 생각을 나열하는 것이 내게 어느 정도의 책임감이 부여된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말그대로 생각을 나열한다는 것이지 잘못된 정보를 입력시키기 위한 작업이 아님은 분명하다. 동성애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고 그것을 나눌 준비가 되있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 서평은 부적절한 글이라 사료된다.
  우리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앞서 내가 접한 그대로의 ‘앰 아이 블루’에 대해 말해보자면 정말 Blue한 책이 아닐 수 없다. 


  동성애에 대한 전반적인 시각이나 심각한 성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오히려 추 티엔 원의 ‘이반의 초상’ 이라든지 이경화의 ‘나’를 읽는 편이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청소년 문학의 한계점이란 바로 그런데 있는 것일까.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감정적이며 적당히 머무른다. 그렇다고 대다수의 청소년 문학이 다 적당하다는 뜻은 아니다.
  자아를 형성하고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유년 시절에 혼곤한 트라우마를 가질 필요는 없다해도 적어도 그것에 대한 생각이 올곧게 뻗어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에서는 선천적인 이반들이 나오는 것 같았다. 너무도 쉽게 받아들이고 주변 사람들 역시 큰 어려움 없이 그들을 받아 들인다. 그러나 사회는 그렇지 않다. 어느 정도의 픽션임을 감안한다해도 자신의 정체성을 바라는 이들에게 이 책이 적당할 것인가. 성정체성에 대한 올바른 경각심이야말로 청소년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 책이 어떤식으로 다가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게는 썩 좋지도 썩 나쁘지도 않았다. 모호함이 아니라 별다른 기억을 심어주지 못한 책이라는 것이다. 책장에 꽂아두면 언젠가는 잊게 될.

 

  동성애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무너뜨리는, 개성과 자긍심, 감동이 가득한 단편들이란 말이 무색하다. 무엇이 어떻게 어떤식으로 편견과 고정관념을 무너뜨린다는 말인가.
  자, 이제부터 모여보세요. 말한 사람이 갑자기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진 것 같은 당황감이 가독성을 떨어뜨렸고, 주제의식을 흐리는 몇몇 단편들 때문에 글의 흐름이 매번 막히는 기분이었다. 청소년기에 접한 이들에게 이 책이 얼마나 많은 계기와 터닝포인트를 줄지는 알 수 없다. 손안에 남는 것이 없다면 그것이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소설을 통해 부분적으로나마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편견없는 시선으로 풀어나가고자하는 취지는 좋았으나 ‘적당함’ 주변을 웃도는 이야기는 현실감이 없다.
  ‘앰 아이 블루’에는 일률적이지 않은 이야기들이 있고 그 속엔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이 남아있다. 가볍게 거부감없이 읽을 수 있다는 점이 어쩌면 비현실적이다, 라는 느낌을 더욱 부각시키는지도 모른다. 천륜을 져버리고 힘든 선택을 해야했던 그들의 삶을 생각한다면 그 현실감이 떨어진다는 것만큼 치명적인 결함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크로스 섹슈얼로 ‘왕의 남자’와 ‘이준기’가 예쁜남자 신드롬과 사회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대세는 ‘동성애’를 받아들인다는 시각을 던져준다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반짝’ 떠오르는 아이돌 그룹처럼 언제든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흥미위주의 가십으로 떠돌 뿐, 가슴으로 받아들인적이 없는데 그것이 각인되어 새겨지리라는 기대는 어리석은 것이다. 


  사회적으로 억압받고 음지로 내몰려 손가락질 받는 그들의 기구한 삶과 인생, 그것을 하나의 이슈로 떠올려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비슷함을 사랑한다. 사랑을 하면 닮아가고, 닮았기에 사랑한다. 닮아가기 위한 절대적 요소는 ‘배려’이며 ‘이해’이다. 그렇기에 그 익숙함을 사랑하고 그것이 낯설지가 않은 것이다. 
  반인륜적 삶이라 일컫어 죄인의 낙인을 찍고 그들을 음지로 내모는 것이 옳지 않다, 느끼면서도 그리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다르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던가.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사랑하는 것이 보편적인 일은 아닐테니 말이다. 나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가 주는 생소한 감각은 낯설고 두렵기까지 하다. 그렇다해서 그들이 선택한 삶이라는 이유로 마땅히 손가락질 하고 비난할 당위성은 없다는 것이다. 


  음지에서 죽음으로 내몰리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어쩌면 사회적인 멸시과 편견 가득한 시선이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도 용납하지도 인정하지도 못하는 성정체성이 아닌가도 싶었다. 그것은 명명백백 ‘일반’인들과 ‘다르’다는 개념으로 정의되고 그렇게 고립되어 세상 속 사람들과 어우러지지 못하는 이방인이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양지바른 곳에 사는 식물들은 음지에 가서는 살 수 없다. 또 음지에서 자라난 식물들 역시 양지에서는 살아갈 수 없다. 팽배하게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삶이 있다. 그것이 지금 현재 우리들의 모습일 것이다.

 

  “괜찮아. 오빠. 오빠가 남들하고 다른 거 어쩔 수 없는 거잖아. 나도 그래. 나도 다른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거 좋아해보려고 했거든. 그러면 애들이 날 좋아할 것 같아서. 근데 아무리 해봐도 유치한 파티에 가는 거랑 쇼 프로그램 보는 건 너무 싫어.”

  라고 마이클의 여동생, 이란 단편 속 베키가 마이클을 향해 말했다. 하기 싫은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중립을 지킨다. 지나치게 애정을 쏟지도 그렇다고 무관심으로 대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 삶속으로 함께 뛰어들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주는 것이 내가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닌가 싶다.

 

  이 서평의 제목이 양지바른 그늘인 이유는 양지바른 그늘이 갖는 말의 어폐에 있다. 말그대로 양지바른 곳은 햇빛이 잘드는 창가처럼 명당 자리이다. 세상에 양지바른 그늘이란 말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제 아무리 양지바른 곳이라 할지라도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는 것 같다.
  공존되어 살아가나 상반된 삶은. 빛과 어둠의 뚜렷하고도 선명한 경계처럼 반쪽으로 나뉘어있다. 세상이 반쪽이 나도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쉽고 편한 길이 있음에도 어렵고 힘든 길로 접어든 그들의 용기와 선택에 기꺼이 박수를 쳐줄 수는 없다해도, 그 용기와 그 삶과, 그 선택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앰 아이 블루에서 느끼고 싶었던 것은 책표지만큼이나 무게감이 느껴지는 푸름이었지만 그렇지 못했던 점이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루 24시간 동안, 세상 속 다른 ‘이’반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파랗게 물들어 세상 속에 드러나면 어떨까? 싶은 재기발랄한 상상은 상상으로만 그쳤을 따름이라 그 역시도 아쉬움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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