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네가 세계의 마지막 소년이라면 ㅣ 워프 시리즈 2
알렉산더 케이 지음, 박중서 옮김 / 허블 / 2022년 9월
평점 :
알렉산더 케이의 작품은 처음 접했다.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들을 접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특정 세대의 대표작들을 잊혀지지 않게 번역해 소개한다는 일은, 독자 입장에서는 정말 의미 깊고 감사한 일이다. <네가 세계의 마지막 소년이라면>을 읽을 수 있게 해 주신 허블 출판사에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의 작품에서 두드러진 점은 인간의 '개체성'이 무척 희미하다는 점이다. 그는 뚜렷한 선악 구도가 아닌, 상황과 경험이 만들어내는 인간의 모습에 집중했는데, 이 작품이 시대를 초월해 울림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인 듯 하다. 세계의 절반 이상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상황, 동력원들과 자원들은 고된 노동을 통해서만 겨우 사용할 수 있을 정도라는 '낯선' 세계관 속에서도 뚜렷한 현실감과 공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그의 인물들이 매우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개별적인 기질보다는 그 상황에서 '보통의 사람'이 충분히 취할 법한 사고방식과 행동 패턴을 보인다.
이미 붕괴되었음이 확실한 체계의 잔재들을 그러모아 '신체계'를 유지하려는 인더스트리아는 일견 아집스러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절망을 겪은 이들에게 새로운 대체제를 제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의 억지스러움 안에서 어떻게든 '일상'의 환상을 부여하기 위한 노력을 읽어내는 패치의 시각은 작가의 그것이기도 하다. 일단 '살아남아야' 그 다음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이들 간의 공감이다.
그러나 그 모습들이 아름답지 않았음 또한 사실이다. 나 자신의 생존을 최우선에 두는 것은 본능적인 영역이지만, 이후 자신의 안위와 발전을 위해 매몰된 시야를 가지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현 체제가 영원하리라는 믿음 하에 움직이는 것은 말 그대로 부서져가는 파도에 몸을 맡기는 행동이다. 소설 속의 주요 인물들은 다른 등장인물들과는 달리 모두 자신만의 가치관을 가지고 그 흐름을 직시하고 있었다는 점, -설사 방향이 다를지라도- 그것은 그들이 대단한 인물이라서가 아니라 자신을 알고 자신을 움직이는 흐름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은 흔히 말하는 '깨어있는 자'와 겹쳐 보인다.
개인적으로 소설 속에서 패치가 말하는 '귀를 기울이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조언'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이 다르다. 그 조언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인 내용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 조언 자체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는 '방법론'일 뿐이다. 나침반은 목적지를 가리키지 않는다. 원하는 자와 원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코난이 보여주는 당돌함과 젊은 치기, 패치가 보여주는 연륜과 고집과 현명함, 라나가 상징하는 자연과의 교감과 포용과 생산은 굉장히 익숙한 삼위의 구도다. 또한 한 문명의 파괴와 쓰나미(홍수), 기계 문명의 종말 등은 이제는 익숙할 레무리아와 아틀란티스를 떠올리게 한다. "오래전에 사라져 버린 땅에 살았던, 누군지 모를 사람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이 책에 나온 내용은 이전에도 분명 일어났던 일이었을 것이다."라는 저자의 서문은 이 일이 이전에도 있어왔고 현재도 일어나고 있는, 누구 하나 예외없이 휩쓸리고 있는 거대한 흐름임을 암시한다.
"우리가 만들어 낸 세계는 무척이나 서글픈 세계이며, 이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바로 젊은이들이다. 그들의 정신은 여전히 열려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이런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에, 젊은이들을 위한 책을 쓰는 것이야말로 유일하게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내면의 목소리'에 관해 가장 익숙한 설명은 아마도 '양심의 소리'일 것이다. 아주 작게 속삭이는 그 소리에 조금씩만 귀를 기울이더라도 세상의 균형추는 조금씩 이동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