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행복한 이유 워프 시리즈 1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 허블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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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다. 강렬하다.

'SF 작가들의 작가'라는 수식언이 결코 과하지 않다. 대체 언제 발표된 것인지 궁금해지게 만드는 묵직한 문장과 설정이었다. '모든 것은 결국 그 원형이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이번 단편선에 수록된 작품들은 주로 90년대 위주로 발표된 글들로 알고 있는데, 이미 그 시대부터 지금의 시류를 꿰뚫는 SF가 나오고 있었다. 최근까지 유명세를 떨쳤던 SF 작품들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를 되짚어보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다.  읽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100광년 일기>

우주 속에 다양한 은하와 블랙홀이 존재한다면, 어딘가에서는 다른 시간선을 가진 은하도 존재할 것이다. 그중 계의 수축으로 미래에서 과거로 흐르는 은하가 발견된다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관측 망원경은 기본 원리인 방출된 광자를 수신하는 대신, 이쪽의 광자를 '빼앗기게' 된다. 틀림없이 지금 내가 관측하고 있지만, 과거로부터 역관측을 당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곳에서 반사된 광자는 미래가 아닌 과거로 가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과거의 우리 자신에게 메시지를 남길 수 있게 되었다. 하루에 100 단어 정도 분량의 텍스트를, 매일. 


태어나기도 전에 나의 일생을, 내가 직접 기록한 문장으로 만나게 되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이미 모든 것이 정해져 있어 '그 무엇도' 바꿀 수 없는 기분은? 바꾸려고 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이 허무한 노력까지도 이미 존재했던 미래인 걸까?


인간의 자유 의지와 결정론, 광자 원리를 유려하게 엮어낸 단편.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모든 것이 결정되어 그 무엇도 결정되지 않았다. 내가 읽은 그렉 이건은 휴머니즘적이고, 절대 신과 광신에 대한 울렁증이 있는 작가다. 그의 소설이 휴머니즘 SF와는 결을 다르게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내가 행복한 이유>

행복함, 충만함, 불행함, 박탈감 같은 감정들은 흔히 순수하게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난 어떤 것이라고 여겨지게 마련이다. 정신적이고, 실체가 없는 것.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이미 해피 드럭 같은 감정을 조절해주는 정신과 약물들이 존재한다. 그중 대다수가 기전을 명확히 밝혀내지 못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검정에 영향을 주는 '물질'이 존재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감정' 또한 물질이니까. 


이에 관한 소설이 바로 <내가 행복한 이유>이다. 특정 호르몬 수치가 높아지게 되어 모든 것을 행복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소년이 겪게 되는 일련의 -혹은 일생의- 삶. 그것을 읽으며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당신이 의식하지 못할 뿐, 우리에게는 모두 '똑같은 작용'이 일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살아가야 할 이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

어쩌면 'reasons to be cheerful'은 이것을 가리키고자 했던 게 아닐까.  



<바람에 날리는 겨>

이 단편 제목의 번역은 조금 의아하다. 이렇게 감성적으로 번역할 필요가 있었을까? 

'chaff'에 '겨, 겉껍질' 같은 의미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사실 'chaff'는 군사 작전에서 레이더 망을 교란시켜 추적을 피하기 위해 흩뿌리는 금속 조각 같은 것을 의미한다. 소설 내에서는 양자의 의미가 복합적으로 뒤섞여 있다. 번역가 분이 '김상훈'이시니 아마 이 부분을 놓치셨을 리는 없고, 식물학자와 아마존 같은 삼림이라는 부분을 고려해 이런 제목으로 정하신 게 아닌가 한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어려운 단편이었는데,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가 명확하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글을 통해 저자의 생각과 의도를 완전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저자의 의도'와 '내게 와닿은 의미'를 구분해서 읽고자 노력하는 습관은 유지하고 있다. 자신이 읽은 대로, 받아들인 대로가 전부라고 생각하고 읽는 읽기는 위험하다. 언제나 '상대가 말하고자 한 바'와 '내게 느껴진 바'를 분리해서 듣고 말해야 완전한 소통이 불가능한 세계에서 조금이라도 오해를 줄일 수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유전자적 한계, 생물학적 양육 환경 등으로 고정된 '나'라는 존재에 대한 고정관념을 뿌리부터 지워낼 수 있다면 어떨까? 이것은 종교에서 말하는 업장 소멸과도 연결된다. 오롯이 '내가 선택한 대로' 이루어지는 '나'는 어떤 모습일까? 


흔히들 완벽하고 온전한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식물 뿌리 같은 것들로 한계와 경계를 상상하지만, 나는 어떤 면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흩어져버릴 수 있는 것들을 하나의 존재로 뭉쳐주고 보호해주는 겉껍질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그 안에서 충분히 흔들리고, 이것과 저것 사이의 모순을 함께 뒤섞을 수 있는 혼란한 하나의 존재로 지켜주는.


이 단편 안에서 라르고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족쇄를 풀어주는 '회색 기사'를 개발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통한 변화가 반드시 개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온전한 '나'를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의 껍질 제거는 무정형의 괴물을 탄생시킬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알'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chaff'는 유인물이자 미끼이자 교란물이자 의미 없는 부산물, 그리고 껍질이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미래에서 오는 정보의 노예가 되었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일기에 적힌 인생 이외의 다른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착각에 매달릴 필요를 느낀 적도 없었다.

"당신이 뇌졸중을 일으켰다고 가정해 봐."
말이 술술 나온다.
"그결과 당신 뇌의 일부는 조금이지만 손상을 입었어. 그래서 의사들은 손상된 부위가 수행했던 기능을 대신 수행해 줄 기계를 당신 뇌에 이식하기로 했어. 그럴 경우, 당신은 여전히 예전과 같은 당신일까?"
"당연히 그렇지."
"그렇다면 같은 일을 두 번, 열 번, 아니 천 번 더 되풀이하는 경우는..."
"그건 처음과 같다고 할 수는 없잖아."
"정말? 그럼 당신이 ‘당신이 아니게 되는‘ 마법의 비율은 도대체 몇 퍼센트인 거야?"
대프니는 나를 노려보았다.
"그런 낡고 진부한 논리를 동원해 봤자..."

"아니. 나는 단지 내가 되고 싶은 바로 그 인물이 됐을 뿐일세. 회색 기사를 쓸 경우 그 이외의 선택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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