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수커피 / 케냐 AA 200g - 원두(빈)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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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AA를 즐겨먹는데 전광수커피가 가장 탁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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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LAY] 메모홀더 WoodyFam. memo holder_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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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도 기능도 만족스럽습니다. 다른 곳보다 여기가 저렴하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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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사 3 : 자기 배려 나남신서 138
미셸 푸코 지음, 이영목 외 옮김 / 나남출판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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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그의 마지막 저서가 되어버린 <성의 역사> 연작의 세 번째 책인 <자기에의 배려>에서, 쾌락의 활용을 통해 어떻게 자아를 구성하는지, 양생술 같은 자기 배려의 기술을 통해 자아를 어떻게 구성하는지를 연구했던 <성의 역사> 제2권, <쾌락의 활용>의 논지를 이어받아 1,2세기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 인간 주체가 성에 대해 어떻게 사색했는지를 탐구한다. 들뢰즈는 푸코에 관한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 바 있다. 

<앎의 의지> 이후에 있었던 긴 침묵의 시기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아마도 푸코는 이 책에 대해 일종의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푸코 스스로가 권력 관계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푸코 스스로도 다음과 같은 난점을 제기한다: “자, 이제 우리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선을 넘어서지 못하는 무능력만을 소유한 채로 다른 쪽으로 넘어가게 된다…….” 

푸코가 말년에 견지한 주체의 자기관리나 자기반성에 대한 관점은 일찍이 그가 <감시와 처벌>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근대적 권력이 개인에게 부과한 규율과 훈련에 대한 이해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시각이다. <감시와 처벌>에서 주체가 규율과 훈련에 의해서 만들어진 ‘순응적 육체’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면, <성의 역사> 마지막 두 권에서 ‘주체’는 문제설정의 장소이자 자신과 타인들의 관계에 대한 모든 성찰이 집중될 수 있는 핵심적인 주제로 부각된다. 이제 성(性)은 더 이상 권력과 관계 지어 논의될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존재의 기술’로 활용되거나 자기에 대한 관심을 요구하는 ‘자아의 기술’로 활용되는 개인적 윤리 문제가 된다. 지식과 권력, 또는 그 둘 사이의 공모관계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날카로운 분석을 진척시켜 왔던 그는 이제 권력의 문제로부터 ‘다스림’의 문제로 건너간다. 담론장치와 권력 작용의 산물이자 효과로서 ‘구성된 주체’라는 문제설정은 이제 신체를 장(場)으로 하는 자기와 자기와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윤리적 행위의 주체로서 ‘구성하는 주체’라는 문제설정으로 대체된다. 그의 비판적 작업에 열광해온 독자들에게 당혹과 의혹을 안겨주는 이러한 변환을, 그 자신의 전복적 사유를 전복하는 이러한 전환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더욱이 이러한 전환이 불편한 긴장을 포기하고 안이한 대체물로 옮겨가는 손쉬운 ‘전향’이 아니라, 그 진지함을 지속하면서 그 긴장과 위기 속에서 야기된 전환이라고 한다면?

푸코는 권력관계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주체란 권력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권력은 생산적이라는 명제를 제시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권력이 없다면 주체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곧 개인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주체가 되는 데 권력의 작동이 필수적이라면, 이제 권력 없는 주체란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든 주체로 생산되고 살아가려면 권력은 불가피하다. 따라서 권력은 영원하다. 그렇다면 저항은 대체 무엇을 전복할 수 있는 것일까? 저항은 이제 불가능해지는 것일까?
들뢰즈는 푸코가 ‘권력 너머로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부딪쳤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마치 궁지에 빠지듯 그는 권력의 관계 속에 갇혀 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결국 그는 저항의 가능성, 그 가능성의 지점을 찾기 위해 권력에 대한 미시물리학적 탐사로 나아갔지만, 그 연구의 결과는 권력은 불가피하며 권력의 외부는 없다는 결론이었다. ‘모든 것을 가두는 권력의 벽, 저항 자체를 곤란하게 만드는 권력의 궁지.’ 그런 만큼 그것은 전복의 사상가에게 ‘내적이며 의기소침하게 하는 위기’를 야기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윤리학적 문제설정으로의 전환은 이런 궁지와 위기에서 발생한다. 푸코는 이제 새로이 질문한다: 권력이 불가피하다면, 권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권력 (관계) 안에서 ‘저항’을 사고할 수는 없는 것일까? 저항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주체화(subjectivation)’라는 개념으로, 즉 지식의 체계화된 규범이나 권력의 구속적 규범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스스로 부과하는 자신의 임의적인 규범을 통해 스스로를 주체로 만들어내는 것으로 발전한다. 즉 권력이 불가피한 것이고 벗어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권력 없는 주체가 있을 수 없다면, 이제 그 권력을 통해서 각자가 어떻게 자아를 구성해 가는가가 중요한 문제가 되고, 권력을 통한 자기와의 관계가 중심에 놓이게 된다. 여기서 그는 권력을 통해 자아를 구성하는 ‘기술'에 관심을 돌리게 되고, 이러한 그의 작업은 ‘윤리학’이란 이름을 얻는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에서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자만이 다른 사람을 다스릴 수 있다'는 고대 그리스의 사례가, ‘자기 자신을 배려하고 돌보는', 근대와는 다른 윤리학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떠오른다.

이런 점에서 말년의 푸코가 제시한 윤리학적 문제설정은, 권력이 불가피한 만큼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허무주의가 아니라, 권력의 궁지에서 사유한 (근대) 권력에 대한 비판의 한 형식임은 분명하다. 비록 그것이 그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전복적 사유와 강력한 비판적 문제화 방식을 일정 부분 손상시키고 약화시킨다 하더라도, 그것을 권력의 그물망으로 점철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처세술’ 정도로 폄하하는 것은, 그의 고민과 성찰의 궤적을 읽어내지 못한 부당한 비난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그가 직면했던 권력과 저항의 아포리아를 치열하게 고민함으로써, 권력의 작용을 면밀히 분석하고 간파하는 작업과 그것을 비판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작업을 동시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술’을 익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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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은 인간학이다 - 철학 읽기와 신학하기
정재현 지음 / 분도출판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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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출간되던 즈음 나는 기독교의 테두리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고, 서울 어느 한편에선 목사와 사제들이 SOFA 개정을 위한 단식투쟁에 참여하여 ‘하나님/하느님’에게 기도하며 예배하고 있었다. 그해 같은 계절, 서울의 다른 한편에서는 일단의 목사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기도회’라는 대규모 군중집회를 열어 미국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며 철지난 냉전의식을 부추겼다. 물론 그곳에도 ‘하나님’은 빠지지 않았다. 어떤 것이 기독교이고 나는 대체 어떤 기독교의 테두리에 걸쳐 있다는 것인가? 대체 그 ‘기독교’라는 것에 중심이 있고 테두리가 있기나 한 것인가? ‘신실한 기독교인’인 부시와 미국의 호전주의자들이 그들의 전쟁에 신을 동원하고 있을 때, 어떤 ‘신실한 기독교인’은 몸으로 폭탄을 막겠다고 그 전쟁의 한가운데로 달려가 서있던, 그런 계절이었다.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이 책의 표제는 얼마나 적실한 명제인가. 일단 타종교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동일한 기호와 상징을 가지고도 다종다양한 신앙과 신념의 스펙트럼이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그리고 그것을 구성하고 또한 그것으로 인해 구성되는 신학이 ‘언제/어디서’를 살아가는 ‘누가’의 ‘왜’ 물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고래로부터 지금까지 교회는, 그리고 그것에 의해 구성되고 또한 그것을 구성하는 신도들은 ‘무엇’ 물음에 천착해왔고 여전히 천착하고 있다. 죽음과 얽혀 있는, 예측 불가능한, 그래서 불안하기만 한 이 세상 속의 삶에서 안정을 희구하는 인간의 욕망은 ‘같음’을 향한 주체할 수 없는 귀속본능을 일으키고 그리하여 급기야는 영원불변하는 ‘같음’이라는 신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같음에 대한 집착은 단일한 진리에 대한 편집증적인 집착을 낳고, 그러한 자기 확신에 찬 집착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 얼마나 잔인하고 폭력적인 양태를 띠고 나타났는지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다.

진중히 살펴보면 우리는 그 ‘무엇’ 물음에도 왜 그 무엇을 물었는가 하는 ‘왜’ 물음이 이미 깔려 있었던 것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무엇’ 물음의 그 육중한 스케일과 다름을 용납하지 못하는 같음에의 편집증적 집착 때문에 ‘왜’ 물음이 철두철미 은폐되고 억압되어 왔을 뿐이다. 배타적인 여러 종교, 교단들의 저마다의 ‘진리 수호’를 향한 광적인 집념에도 불구하고 종교와 교단들이 이토록 다종다양한 갈래들로 분열되어 있다는 사실은 ‘무엇’ 물음 안에 이미 ‘누가-언제/어디서’의 ‘왜’ 물음이 깔려 있다는 것의 또 다른 반증이다.
결국 신관이란 인간관의 반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신학은 인간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학하기'는 이를 겸허하게 인정하고 우리 인간에 대한 진지한 성찰에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신학을 신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불가능한 망상을 떨쳐버리고, 신학하기의 출발점을 응당 ‘신학하기’를 행위하는 우리 인간 자신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저자가 즐겨 쓰는 표현을 따르자면, ‘神과 學의 결합’으로서의 신학에서 그 출발점은 ‘學’이어야 한다.

신학은 인간학이다. 신학은 인간학일 수밖에 없을 뿐더러 인간의 해방을 위해 신학은 기꺼이 인간학이어야 한다. 신학하기는 ‘무엇’ 물음에 의해 가려지고 잊혀져온 서로 다른 ‘몸’을 지닌 ‘누가-언제/어디서’의 ‘왜’ 물음을 복원하고 그럼으로써 진정한 인간해방에 기여하는 작업에 그 존재 목적을 정초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복원작업이 저마다의 ‘자기절대화에 뿌리를 둔 대책 없는 무정부적 상대주의’로 귀결되지 않도록 ‘왜’를 중심으로 ‘누가-언제/어디서’와 ‘무엇-어떻게’가 균형적으로 상호관계를 이루게 하는 작업 또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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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상 - Mr. Know 세계문학 15 Mr. Know 세계문학 15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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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라는 것은 수많은 해석을 발생시키는 기계’라는 소설에 대한 저자 자신의 정의에 충실하게 그의 역작 『장미의 이름』은 다양한 맥락에 접속되어 여러 가지 의미를 생산해낼 수 있는 ‘넘치도록 풍요로운’ 텍스트이다.
나는 이 글에서 ‘이 이야기가 우리 시대와 너무나 동떨어져 있고, 우리 시대와 아무 관련이 없으며, 우리의 희망과 우리의 확신과는 시간적으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에코의 기만적 요설을 넘어서서 『장미의 이름』을 중세의 다른 이름인 전(前)근대와 근대, 그리고 탈근대의 상황이 공존하는, 그야말로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적 혼재’의 상황 속에 처해 있는 우리의 신앙에 관한 성찰적 텍스트로 읽어나가고자 한다.
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 의식의 표면에 부유하던 단상들의 비유기적인 봉합에 그치고 말 이 글이 흡사 제멋대로 뒤섞인 살바토레의 '바벨 언어'처럼 들리진 않을는지 염려스럽다.

1
플롯은 14세기 수도원에서의 연쇄적인 살인사건을 따라 전개된다. 그리고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서, 묵시록적인 재앙으로 위장한 이 수도원의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은 노수도사 호르헤로 인격화된, 진리 수호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 아니 바로 그와 같은 광적인 집착으로 인해 진리가 되는 ‘진리’ 그 자체로 드러난다.

이러한 진리의 담지자, 아니 수호자들에게 진리(지식)는 ‘탐구’해야 할 것이 아니라 ‘보존’해야 할 대상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속하는, 지식이라는 재산은 완전한 것이고, 태초부터 완전한 것으로 정제된 것이고, 말씀의 완전함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혹의 여지가 없는’ 진리를 위협하는 다른 ‘진리’들―소설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제2권으로 상징된다―은 은폐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은폐’ 자체가 곧 진리가 되며 그것을 탈은폐하려는 자들에 대한 폭력은 정당화되고 성화(聖化)된다.

이러한 진리관은 ‘장서관’으로 표상된다. 그곳은 진리를 공개하기 위한 곳이 아니라 은밀하게 보관하기 위한 곳, 즉 ‘진실을 교란시키지 못하도록, 다른 진실을 가두어 놓고 있는 곳’이다.

「(장서관에는) 아무도 들어가서는 안 되고, 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장서관은, 그 안에 소장되어 있는 진리 그 자체처럼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그 안에 소장되어 있는 허위처럼 교묘하게 스스로를 지켜 냅니다. 장서관은 정신의 미궁이며 지상의 미궁인 것입니다.」― 수도원장

이러한 진리는 그 진리의 경계 외부에 위치한 자들에게 폭력적인 양태로 다가간다. 완전하고 자족적인 진리를 수호한다는 신념은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은 마땅히 파기되어야’ 하며, 진리에 위배되는 것이라면 서책뿐 아니라 사람도 얼마든지 ‘박멸’될 수 있다는 끔찍한 멘탈리티를 형성하고, 그렇기에 그 진리의 수호자들은 ‘<우리는 한 분뿐이신 하느님을 믿는다>라는 주장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수도 있’고, 이단 혐의를 받는 도시에서 대살육을 감행하면서 ‘죽여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알아보신다’라고 외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그들로부터 ‘성전(聖戰)’이란 괴상망측한 개념이 탄생하고 급기야 ‘성전은 결코 전쟁이 아닌’ 것으로까지 여겨진다. 이러한 진리 수호자들이 기다려 마지않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내쫓는’ 재림 예수의 달콤한 음성:

「내게서 떠나라, 저주받은 것들아! 어서 악마와 그 사제가 너희를 위해 예비한 영원한 불길 속으로 들어가거라! ... 내게서 떠나 영원의 어둠으로, 꺼지지 않는 불길로 들어가라! ... 너희는 다른 주인의 종이 되었으니, 가서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이를 가는 그 배암과 함께 하라.」

2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단자 중에서 성자가 나오고 선견자 중에서 신들린 무당이 나오듯이….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호르헤가, 능히 악마의 대리자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 나름의 진리를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허위로 여겨지는 것과 몸을 바쳐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윌리엄 수사

중세 최대의 장서관을 거칠게 집어삼키는 화염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면서 아드소에게 건넨 위의 말에서 윌리엄 수사는 통념적인 진리관을 전복시킨다. 그것은 흡사 니체의 음성과도 같다. 진리란 그 자체로 자명하고 확고부동하며 영원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들에 의해, ‘진리를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허위로 여겨지는 것과 몸을 바쳐 싸울 각오가 되어 있’는 자들에 의해 ‘진리’가 되고 지탱되는 것이다. 즉 진리란 진리를 욕망하게 하고, 진리를 추구하게 하는 ‘진리의지’의 소산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러한 진리의지는 내가 찾고 있는 것이 진리라는 환상으로, 그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서 다른 ‘거짓’들과 결연히 싸워야 한다는 신념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호르헤의 진리에 대한 신념과 의지가 빚어낸 살인사건들을 보라.
이에 대한 윌리엄 수사의 일갈:

「이 영감아, 악마는 바로 당신이야! ... 악마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진리… 이런 게 바로 악마야!」

윌리엄 수사는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이라고,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좇아야 할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겠느냐’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다시, 진리란 무엇인가? 아니, 어떤 것인가?

3
「역시 값은 항상 약자들이 무는 것이군요.」― 아드소

나는 이 지점에서 거대한 진리들 간의 쟁투 사이에서 희생된 가난한 사하촌(寺下村) 여인을 떠올려본다. 진리에 대한 광신적 애착에 의해 살육된 사람들과, 화형주에서 산화된 숱한 ‘마녀’와 ‘이단자’들과, 진리들, 아니 진리 수호자들 사이의 짝패갈등으로 인해 박해당하고 그 신음소리마저 억압되고 은폐된 무수한 희생양들을 떠올려본다.
그 ‘이름’ 없는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어떻게 불러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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