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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상 - Mr. Know 세계문학 15 ㅣ Mr. Know 세계문학 15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소설이라는 것은 수많은 해석을 발생시키는 기계’라는 소설에 대한 저자 자신의 정의에 충실하게 그의 역작 『장미의 이름』은 다양한 맥락에 접속되어 여러 가지 의미를 생산해낼 수 있는 ‘넘치도록 풍요로운’ 텍스트이다.
나는 이 글에서 ‘이 이야기가 우리 시대와 너무나 동떨어져 있고, 우리 시대와 아무 관련이 없으며, 우리의 희망과 우리의 확신과는 시간적으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에코의 기만적 요설을 넘어서서 『장미의 이름』을 중세의 다른 이름인 전(前)근대와 근대, 그리고 탈근대의 상황이 공존하는, 그야말로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적 혼재’의 상황 속에 처해 있는 우리의 신앙에 관한 성찰적 텍스트로 읽어나가고자 한다.
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 의식의 표면에 부유하던 단상들의 비유기적인 봉합에 그치고 말 이 글이 흡사 제멋대로 뒤섞인 살바토레의 '바벨 언어'처럼 들리진 않을는지 염려스럽다.
1
플롯은 14세기 수도원에서의 연쇄적인 살인사건을 따라 전개된다. 그리고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서, 묵시록적인 재앙으로 위장한 이 수도원의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은 노수도사 호르헤로 인격화된, 진리 수호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 아니 바로 그와 같은 광적인 집착으로 인해 진리가 되는 ‘진리’ 그 자체로 드러난다.
이러한 진리의 담지자, 아니 수호자들에게 진리(지식)는 ‘탐구’해야 할 것이 아니라 ‘보존’해야 할 대상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속하는, 지식이라는 재산은 완전한 것이고, 태초부터 완전한 것으로 정제된 것이고, 말씀의 완전함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혹의 여지가 없는’ 진리를 위협하는 다른 ‘진리’들―소설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제2권으로 상징된다―은 은폐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은폐’ 자체가 곧 진리가 되며 그것을 탈은폐하려는 자들에 대한 폭력은 정당화되고 성화(聖化)된다.
이러한 진리관은 ‘장서관’으로 표상된다. 그곳은 진리를 공개하기 위한 곳이 아니라 은밀하게 보관하기 위한 곳, 즉 ‘진실을 교란시키지 못하도록, 다른 진실을 가두어 놓고 있는 곳’이다.
「(장서관에는) 아무도 들어가서는 안 되고, 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장서관은, 그 안에 소장되어 있는 진리 그 자체처럼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그 안에 소장되어 있는 허위처럼 교묘하게 스스로를 지켜 냅니다. 장서관은 정신의 미궁이며 지상의 미궁인 것입니다.」― 수도원장
이러한 진리는 그 진리의 경계 외부에 위치한 자들에게 폭력적인 양태로 다가간다. 완전하고 자족적인 진리를 수호한다는 신념은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은 마땅히 파기되어야’ 하며, 진리에 위배되는 것이라면 서책뿐 아니라 사람도 얼마든지 ‘박멸’될 수 있다는 끔찍한 멘탈리티를 형성하고, 그렇기에 그 진리의 수호자들은 ‘<우리는 한 분뿐이신 하느님을 믿는다>라는 주장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수도 있’고, 이단 혐의를 받는 도시에서 대살육을 감행하면서 ‘죽여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알아보신다’라고 외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그들로부터 ‘성전(聖戰)’이란 괴상망측한 개념이 탄생하고 급기야 ‘성전은 결코 전쟁이 아닌’ 것으로까지 여겨진다. 이러한 진리 수호자들이 기다려 마지않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내쫓는’ 재림 예수의 달콤한 음성:
「내게서 떠나라, 저주받은 것들아! 어서 악마와 그 사제가 너희를 위해 예비한 영원한 불길 속으로 들어가거라! ... 내게서 떠나 영원의 어둠으로, 꺼지지 않는 불길로 들어가라! ... 너희는 다른 주인의 종이 되었으니, 가서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이를 가는 그 배암과 함께 하라.」
2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단자 중에서 성자가 나오고 선견자 중에서 신들린 무당이 나오듯이….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호르헤가, 능히 악마의 대리자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 나름의 진리를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허위로 여겨지는 것과 몸을 바쳐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윌리엄 수사
중세 최대의 장서관을 거칠게 집어삼키는 화염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면서 아드소에게 건넨 위의 말에서 윌리엄 수사는 통념적인 진리관을 전복시킨다. 그것은 흡사 니체의 음성과도 같다. 진리란 그 자체로 자명하고 확고부동하며 영원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들에 의해, ‘진리를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허위로 여겨지는 것과 몸을 바쳐 싸울 각오가 되어 있’는 자들에 의해 ‘진리’가 되고 지탱되는 것이다. 즉 진리란 진리를 욕망하게 하고, 진리를 추구하게 하는 ‘진리의지’의 소산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러한 진리의지는 내가 찾고 있는 것이 진리라는 환상으로, 그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서 다른 ‘거짓’들과 결연히 싸워야 한다는 신념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호르헤의 진리에 대한 신념과 의지가 빚어낸 살인사건들을 보라.
이에 대한 윌리엄 수사의 일갈:
「이 영감아, 악마는 바로 당신이야! ... 악마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진리… 이런 게 바로 악마야!」
윌리엄 수사는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이라고,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좇아야 할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겠느냐’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다시, 진리란 무엇인가? 아니, 어떤 것인가?
3
「역시 값은 항상 약자들이 무는 것이군요.」― 아드소
나는 이 지점에서 거대한 진리들 간의 쟁투 사이에서 희생된 가난한 사하촌(寺下村) 여인을 떠올려본다. 진리에 대한 광신적 애착에 의해 살육된 사람들과, 화형주에서 산화된 숱한 ‘마녀’와 ‘이단자’들과, 진리들, 아니 진리 수호자들 사이의 짝패갈등으로 인해 박해당하고 그 신음소리마저 억압되고 은폐된 무수한 희생양들을 떠올려본다.
그 ‘이름’ 없는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어떻게 불러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