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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은 인간학이다 - 철학 읽기와 신학하기
정재현 지음 / 분도출판사 / 2003년 10월
평점 :
이 책이 출간되던 즈음 나는 기독교의 테두리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고, 서울 어느 한편에선 목사와 사제들이 SOFA 개정을 위한 단식투쟁에 참여하여 ‘하나님/하느님’에게 기도하며 예배하고 있었다. 그해 같은 계절, 서울의 다른 한편에서는 일단의 목사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기도회’라는 대규모 군중집회를 열어 미국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며 철지난 냉전의식을 부추겼다. 물론 그곳에도 ‘하나님’은 빠지지 않았다. 어떤 것이 기독교이고 나는 대체 어떤 기독교의 테두리에 걸쳐 있다는 것인가? 대체 그 ‘기독교’라는 것에 중심이 있고 테두리가 있기나 한 것인가? ‘신실한 기독교인’인 부시와 미국의 호전주의자들이 그들의 전쟁에 신을 동원하고 있을 때, 어떤 ‘신실한 기독교인’은 몸으로 폭탄을 막겠다고 그 전쟁의 한가운데로 달려가 서있던, 그런 계절이었다.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이 책의 표제는 얼마나 적실한 명제인가. 일단 타종교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동일한 기호와 상징을 가지고도 다종다양한 신앙과 신념의 스펙트럼이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그리고 그것을 구성하고 또한 그것으로 인해 구성되는 신학이 ‘언제/어디서’를 살아가는 ‘누가’의 ‘왜’ 물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고래로부터 지금까지 교회는, 그리고 그것에 의해 구성되고 또한 그것을 구성하는 신도들은 ‘무엇’ 물음에 천착해왔고 여전히 천착하고 있다. 죽음과 얽혀 있는, 예측 불가능한, 그래서 불안하기만 한 이 세상 속의 삶에서 안정을 희구하는 인간의 욕망은 ‘같음’을 향한 주체할 수 없는 귀속본능을 일으키고 그리하여 급기야는 영원불변하는 ‘같음’이라는 신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같음에 대한 집착은 단일한 진리에 대한 편집증적인 집착을 낳고, 그러한 자기 확신에 찬 집착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 얼마나 잔인하고 폭력적인 양태를 띠고 나타났는지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다.
진중히 살펴보면 우리는 그 ‘무엇’ 물음에도 왜 그 무엇을 물었는가 하는 ‘왜’ 물음이 이미 깔려 있었던 것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무엇’ 물음의 그 육중한 스케일과 다름을 용납하지 못하는 같음에의 편집증적 집착 때문에 ‘왜’ 물음이 철두철미 은폐되고 억압되어 왔을 뿐이다. 배타적인 여러 종교, 교단들의 저마다의 ‘진리 수호’를 향한 광적인 집념에도 불구하고 종교와 교단들이 이토록 다종다양한 갈래들로 분열되어 있다는 사실은 ‘무엇’ 물음 안에 이미 ‘누가-언제/어디서’의 ‘왜’ 물음이 깔려 있다는 것의 또 다른 반증이다.
결국 신관이란 인간관의 반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신학은 인간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학하기'는 이를 겸허하게 인정하고 우리 인간에 대한 진지한 성찰에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신학을 신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불가능한 망상을 떨쳐버리고, 신학하기의 출발점을 응당 ‘신학하기’를 행위하는 우리 인간 자신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저자가 즐겨 쓰는 표현을 따르자면, ‘神과 學의 결합’으로서의 신학에서 그 출발점은 ‘學’이어야 한다.
신학은 인간학이다. 신학은 인간학일 수밖에 없을 뿐더러 인간의 해방을 위해 신학은 기꺼이 인간학이어야 한다. 신학하기는 ‘무엇’ 물음에 의해 가려지고 잊혀져온 서로 다른 ‘몸’을 지닌 ‘누가-언제/어디서’의 ‘왜’ 물음을 복원하고 그럼으로써 진정한 인간해방에 기여하는 작업에 그 존재 목적을 정초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복원작업이 저마다의 ‘자기절대화에 뿌리를 둔 대책 없는 무정부적 상대주의’로 귀결되지 않도록 ‘왜’를 중심으로 ‘누가-언제/어디서’와 ‘무엇-어떻게’가 균형적으로 상호관계를 이루게 하는 작업 또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과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