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잘 웃지 않는 소년이었다
김도언 지음 / 이른아침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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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권의 책을 읽으며 이리도 많이 사전을 찾아본 적이 있었던가 싶다.

김도언 작가의 깊고 심오한 어휘력에 매 장마다 감탄을 하며 읽어내려갔다. (어휘력이 방대하다기보다는 깊고 심오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릴 듯하여)

 

 저자는 웃음기라고는 묻어나지 않는 매번 진지한 어투로 사색의 기록을 남긴다.

그래서 이 책은 읽는 속도가 다른 책에 비해 느렸고, 내게 또 다른 사색의 시간을 주었으며, 명문장들을 오래도록 잊지 않고 싶어 접은 페이지가 수두룩했다. 가볍게 써 내려간 문장이 아닌 문장 하나하나가 오랜 고민 끝에 짜낸 정수들이었다.

나도 이런 문장들을 갖고 싶다. 내가 만들어낼 순 있을까...

 

 저자는 선택적 고립자며 염세주의자의 면모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염세주의 속에 인간애를 끌어안고 놓지않고 있다. 문학가들의 정신과 고뇌를 진정 아낄 줄 알며, 가식을 걷어낸 도리를 지킬 줄 안다. 명예와 부를 놓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주위 작가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올곧은 베짱도 있다.

 

그는 작가들 사이에서 과연 어떤 작가로 불리고 있을까.

새삼 작가들의 세계에 비치는 그의 '상'이 궁금해진다.

 


 

소설가는 결코 신분증으로 증명되는 신분적 존재가 아니라, 소설을 쓸 때만 그 신분이 인정되는 행위적 존재라는 말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소설가들은 각자가 고유한 고요를 키우는 존재들이다. 그 고요 안에 울음을 다스린 침묵이 들어 있다. 이와는 달리 시인들은 고요보다 먼저 울음을 키우는 이들이다. 이 울음으로 고요의 등을 툭 밀어내는 일.

삶의 방향을 선회했을 떄, 일반적으로 감수해야 하는 불편과 당혹으로부터 오는 영감은, 어떤 낯익은 환경에 오래 붙잡혀 있으면서 누리는 편의나 안정보다 결코 누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늘에 그어진 전선들은 누군가가 누군가에 보내는 마음의 끈이다. 사랑의 음악을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현이다. 사랑의 시를 쓰는 모음의 획이다. 당신의 마음속으로 직진하는 돌파구다. 우리를 묶는 밧줄이다. 새들이 잠시 앉아 쉬는 벤치이며 공중에 매달린 공원이다.

문장의 온도는 문장이 갖는 의미 내용에 대한 작가의 심리적 태도가 만들어낸다. 그 태도는 필연적으로 `거리`를 상정한다. 거리두기에 실패할 경우 작가는 문장의 온도를 통제할 수 없다. 그것은, 가마에 불을 넣는 도공의 운명과도 같다. 가마에 바짝 다가갈 경우 도공은 화마를 입을 수 있고, 너무 멀리 떨어질 경우엔 불을 제대로 조절할 수 없다. 의미 내용에 조건적으로 반응하는 자신의 심리적 태도가 뜨겁다고 느낄 때,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작가는 문장의 온도를 떨어뜨리는 노력을 해야 한다. 반대로 문장이 묘사하는 대상에 대한 자신의 태도가 미적지근하다고 느낄 때, 문장을 가열시키는 감각이 필요하다. 문장은 대상에 대한 심리적 태도가 변개하는 동안 빚어지는 의식의 흐름 같은 것이다. 요컨대 한 문장의 머리와 꼬리의 온도마저 다를 때, 그것을 감각으로 다스리는 것이 가능할 때, 그것은 천상의 시가 된다.

너무 가까우면 읽지 못할 수 있으니까. 사랑하는 연인과 뜨겁게 키스할 때, 정작 연인의 표정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너무 밀착해 있다는 건, 상대를 읽을 수 없는 조건에 직면해 있음을 말하곤 한다. 따라서 거리를 갖는다는 건, 상대를 정확히 읽고 그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섬세하게 고려해야 할 중요한 미션이다. 고향을 찾으러 타향으로 갔던 현자들의 의지처럼.

일요일 오후는 뒤도 한 번 안 돌아보고 이렇게 지나가는데, 나는 서운하고 안타까운 것들을 저 빗소리에 섞어 보낼 요량이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 삶도 비오는 일요일 오후처럼 이렇게 왔다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대기의 흐름을 바꾸고 존재의 그림자를 지우는 비와 무념과 권태를 나무라지 않는 일요일 오후, 내가 이처럼 비오는 일요일 오후를 온전히 가질 수 있었다는 것, 그것만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욕심이 있다면 내가 쓰는 글도 비오는 일요일 오후처럼 당신들에게 다가갔다가 빠져나갔으면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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