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의 속도에 맞춰 바삐 발걸음을 옮기다보니 어느 순간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 걷고있는지,
또 이 길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불안감과 기대감으로 반복되는 날들이 늘어갔다.
사실은 기대감보다는 불안감이 더 크지만 걸음을 멈출 수 없기에 억지로 힘을 내어 기대를 조금 더 걸어보기도 한다.
지금 걷고있는 것이 앞으로 조금이라도 나아가고있는 거라는 자신없는 약간의 긍정의 소리로 되내이던 중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무조건 앞으로 가거나 잠시 멈추거나, 혹은 조금은 뒷걸음을 치기도 한다고만 생각해왔는데 <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는 이 책의 제목에서 강한 끌림이 있었다.
이 책의 제목은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엄마가 딸 이치코에게 보낸 편지에 적은 고백이었다.
세상이 선공한 사람들에 대해 하는 말처럼 인생은 일직선으로 뻗은 고속도로가 아니다. 그럴리가 없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걷는다.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어떤 모양인지도 모르면서 걷는다. 때로는 이치코의 엄마처럼 아무리 열심히 걸어도 원을 그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런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제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조금씩 처음에 그린 원에서 비껴 나고 있었다는 것을. 원이 아니라 나선을 그리며 걷고 있었다는 것을.
/p9, 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
원에는 출구가 없지만 나선에는 출구가 있다. 직선으로 걷는 것 보다는 확실히 느릴 것이지만 직선으로 걷지않기에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결국 제자리 걸음같이 느껴졌던 원이 아닌 나선으로 걷는다는 이 책의 이야기가 당장 눈 앞의 위로보다도 큰 힘이 되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을 때느 잠시 숨을 수 있는 공간도 있어야 한다.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을 때 우정은 족쇄가 된다.
시간이 지나 나에게도 소중한 사람들이 생겼다. 언제나 나를 사랑하고 지지해 주는 가족을 만든 것이다. 더 이상 친구들이 내 전부가 아니게 된 후부터는 오히려 그들과의 관계가 편해졌다
그들에게 내 모든 것을 걸지 않기에 그들이 내게 모든 것을 걸지 않은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p60, 친밀함의 거리
꽤 오래 전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내 마음의 크기와 친구들의 마음의 크기가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나름대로 충격을 받았던 때가 있었다. 그 때의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을 두려워했기때문에 친구들에게 더 많은 것을 걸었던 것이다.
나에게 친구들이 우선순위를 차지한 만큼 그들에게도 내가 우선순위이길 바랬다.
서운한 마음을 혼자 삼키고 지내며 내 마음도 조금 가라앉던 날의 친구의 마음을 크게 느낄 수 있었던 사건이 있었다.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마음의 크기나 관계의 거리는 눈에 드러나지 않아도 존재하며, 가장 크고 가장 가까워야만 좋은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부담이 되지않을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더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데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그러니 20대가 바랄 수 있는 행복이란 결국 '확실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는 불확실한 것들 투성이였기 때문에 계시와도 같은 운명적인 사건이 일어나서 내 인생이 조금이라도 확실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연애든, 우정이든, 인도에 가는 것이든,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것이든 뭐든 나를 블랙홀에서 건져올려주기만을 바랐다.
...
나이가 든다고 해서 특별히 확실해지는건 없다. 계속되는 불안함과 막막함에 맞서 싸워야한다.
하지만 경험을 통해 알게되는 것들이 있다. '해야한다'고 믿었던 것들을 하느라 급급한 대신에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에 집중할 줄 알게 되는 것이다.
/p120, 내 침대 밑 블랙홀
20대가 되었던 때부터 얼른 서른 살이 되길 바랐다. 그건 위의 문장처럼 20대의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것들이 서른이 되면 진짜 어른이 되어 정리가 될 것만 같았다. 적어도 운명을 믿지는 않았지만 '지나가는 세월만큼 성장이라는 것을 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정해놓은 답없이 천천히 나의 속도로 흘러가고 있다.
불안정하게 걷고있는 지금의 나에게 스치듯 툭 하고 위로를 건냈지만 이 책이야말로 가장 큰 위로가 되었다. 지금 이 불안은 나만 겪는 것이 아니며, 모두 불확실함 속에 자신의 속도로 걷는다는 것을 다양한 책과 영화를 통해 가르쳐 주었다. 이 책 속에 담긴 많은 작품들 중 내가 좋아했고 또 공감했던 작품이 많아 이 책도 고개를 한껏 끄덕이며 읽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