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법서설 - 성찰.세계론 홍신사상신서 33
르네 데카르트 지음 / 홍신문화사 / 1997년 11월
평점 :
절판


상식적으로 대개의 사람들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대로 사물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학에 와서 가장 황당했던 것은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사실들이 전부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 때였다. 수 십 년 동안 지침서(?)처럼 여겼던 교과서는 어떠한 수단을 사용했는가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승리한 자의 머리 속 생각들이 담겨있었고, 매일 접하던 신문과 방송까지도 이해관계에 따라 온갖 조작이 난무했다. 그리고 세계라는 공간은 어느 자본이라는 이데올로기 아닌 이데올로기에 빠져 가난하고 힘없는 자의 눈을 가리고 입을 막아대고 손, 발까지 묶어 아무도 모르게 전자오락처럼 미사일을 퍼붓는 그런 공간이었다.

더 이상 내가 보고 느끼고 인식하는 것이 더 이상 '나' 스스로에 의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대체 난 무얼하고 있는가? 대체 난 왜 이렇게 살고 있지?' 라는 회의감이 드는건 어쩜 당연한 귀결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생각의 얽힌 실타래 앞에서 우리가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읽는 이유 역시 어쩜 당연한 귀결일지 모른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 어떤 굳건한 토대나 진실한 판단의 근거도 없이 자꾸 비대해 진다고 느껴지는 현대의 불안감을 우리와 동떨어진 시대를 살다간 데카르트 역시 느꼈고, 이에 대한 분명하고도 의심할 수 없는 판단의 근거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그 노력의 부산물이 바로 <방법서설> 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사물을 사실 그대로 볼 수 있는가?' 이에대해 데카르트는 지금까지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한 것이라고 여겨온 것의 토대를 의심해 보자마자 모든 것이 흔들거리기 시작함을 느꼈다. 우선 내가 보고 있는 많은 사물이 정말 내가 보고 있는 대로 내 밖에 존재하는지 의심스러워진다. 우리 눈은 우리를 속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데카르트는 앎의 모든 확실성이 무너져 버린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의 새로운 확실성이 생겨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 내가 알고 있다고 믿는 모든 것을 전부 의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고, 내가 의심하는 한 의심하고 있는 나는 존재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에 이르게 된다.

이 명제는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하고 대단한 것도 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은 이렇게 너무나 당연한 것 같은, 그래서 대단해 보이지도 않는 '이성'에 대한 생각의 토대조차도 현재 우리 내 삶 속엔 없다는 것이다.

즉, 글 서두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세상이라는 공간이 겉으로는 풍요로워지고 진실한 것들이 살아 숨쉬는 것 같지만 그 토대가 썩었고 그 썩은 토대마저 등한시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가장 상식적인 것처럼 느껴지는 삶의 진리들이 자리잡고 있지 않기 때문 아닐까?
너무나 상식적인 것이 가장 이성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세상은 너무나 간과한 것이다. 그 세상 속 우리들까지도 말이다.

책 첫머리에서 사람이면 누구나 날 때부터 양식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곧 이성임을 강조하면서 이성의 빛에 의지하여 이런 규칙에 따를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외침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생각하는 세상이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세상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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