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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5 - 2 - 오만한 탄식에 숲이 깨어난다, 개정판, 완결
신아인 지음 / 도서출판 오후 / 2013년 6월
평점 :
1535
1535도. 쇠가 녹는 온도.
溢嗚森悟 (일오삼오)
오만한 탄식에 숲이 깨어난다.
정민석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에게 맞는 옷이 있는 거야.
어차피 나는 대일본제국을 위해 존재하는 조선 귀족이 아니었나? 악역을 맡았으면 그에 걸맞게 행동해야지.
매국노의 아들도 어쩔 수 없이 매국노가 되는 세상.
일본의 자작 작위를 받은 중추원 부의장.
내선일체를 주장하며 일본의 신임을 얻고 있는, 조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조선인이자 친일파.
그리고 정민석이 사랑하는 여자. 서혜림.
나도 원해요! 내가 선 무대의 가치를 알아줄 그런 관객을! 그런 조국을, 원해요!
조선 최고의 무용가.
민석을 사랑하고 민석과 결혼하지만, 그의 아내는 될 수 없었던 여자.
자신을 위해 민석이 한 일들을 알고난 후, 이제는 민석을 위해 자신이 행동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사랑하는 두 사람을 바라봐야만 하는 여자. 요코야마 미유키.
후회라는 건 더 이상 나빠질 게 있을 때 하는 거에요.
황태자비로 길러졌지만, 그녀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계략 덕에 황태자비도 되지 못하고,
가문의 뜻에 따라 민석과의 국혼을 통해 정략적으로 이용당하는 여자.
민석의 아이를 낳고, 그를 흠모하지만, 일본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민석의 무시와 증오를 온몸으로 받아야만 했던 그녀는,
이제 눈빛부터 달라져 가고 있었다.
복수만을 위해 살아가는 남자 이무영.
살아. 꼭 살아서 나라는 놈 사라지지 않게, 당신 기억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그렇게 해 줘.
표면적으로는 독립군에 가담 하지만, 그의 목적은 살인. 약혼녀의 처참한 죽음 이후, 그의 칼은 단 한 사람만을 겨냥한다.
하지만 그의 목적을 이루던 순간, 알지 못했던 진실이 밝혀지며 그는 또다른 운명과 사랑의 소용돌이로 성큼 들어가게 된다.
1535. 쇠가 녹는 온도.
사건의 중심이 되는 한일단의 거점인 경성대장간을 의미하는 동시에 한일단을 상징하는 그들만의 확인 암호.
친일파인 민석과 그가 사랑하는 여자 혜림.
정략결혼의 희생자 미유키와 복수와 조국의 독립,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남자 무영. 무영의 약혼녀 수진.
민석의 친우 수찬. 경성 대장간의 종호와 영수. 대장간의 일꾼 인호와 명철. 한일단의 행동대원 길주와 승민.
기생에서 예인으로 변모하는 홍연과 애종. 경성병원의 혜상과 지은. 미유키의 수족 하야토. 호시탐탐 민석을 노리는 마모루, 스즈키.
소설 안에는 여러 허구의 인물이 등장한다.
친일을 하건, 독립군에 몸 담고 있건, 어쩔 수 없이 조선까지 오게 된 일본인이건, 모두 각자의 사정과 자신의 이익으로 행동할 뿐이다.
일제 강점기라는 어쩔 수 없는 역사의 소용돌이 안에서 대의 명분을 이용해서, 아니면 눈앞의 권력이라도 붙잡고 모두 하나의 마지막 목표인 독립을 향해 달려드는 여러 인물의 면면을 볼 수 있었다. 그러한 인물들의 조합은 한일단이라는 단체를 중심으로, 상해와 경성, 평양과 나진을 넘나드는 공간의 이동안에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일제 강점기의 마지막 순간인 1940년대를 그려낸다.
등장 인물들은 많지만, 독립운동 이라는 큰 줄기를 중심으로 여러 인물들이 가진 그들만의 이야기를 잘 버무려 놓은 까닭에, 사건 보다는 인물 중심으로 집중하며 읽어내려 가면 좀 더 쉽게 다가설 수 있을 것 같다. 그 시대 젊은이들도 지금과 다르지 않게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하고, 때로는 삶을 고민하고, 조국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들이 시대와 맞물려 심도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우리가 알고 있듯 독립은 우리의 자의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어디까지의 가설과 어디까지의 현실을 접목시킬 수 있을 것인지 궁금했었다. 허구의 단체인 한일단과 실존의 상해 임시정부로 이어지는 광복군들의 활약을 좀 더 허구적으로 그려낼지, 아니면 일제 강점기 말,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었지만, 제대로 풀지 못했던 독립의 도화선을 그대로 그릴지 말이다. 이야기는 처음에 의도했던 허구의 인물들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실제의 역사 안으로 녹아든다. 히로시마의 원자폭탄과 함께 전쟁이 끝나며 그들의 긴 여정도 함께 끝나지만, 그 이후 그들이 살아온 삶들도 끝까지 전달해 준다.
이 책은 아무런 스포일러를 모른 채 읽어야만 한다.
일제 강점기가 원래,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도 아무렇지 않았을 시대이고, 단조로운 인물이 입체적으로 변한다 해도 전혀 이상할게 없는 시대였으니, 인물들의 변화가 나타나고, 숨겨진 진실들이 하나씩 드러날 때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다만 참담하고 슬플 뿐이었다.
큰 흐름을 나누는 1부의 엔딩과 2부의 시작은 적절하게 이야기의 긴장감을 이끌어 내고, 극중 인물이 그래야만 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해 준다. 마지막 신의 구성 또한 이야기의 대한 감동과 이해의 극대화를 위해 너무나도 적절한 장치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봤다. 마치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간 후 조용히 숨어있던 시퀀스들의 깜짝 등장처럼 말이다.
시대는 암울하고, 사람들은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었고, 행복해지는 것도 힘든 시절이었다.
하지만 작가의 견고한 스토리텔링은 등장인물을 시대적 배경에 적절하게 배치하여 어렵지 않게 쉼없이 문장을 읽어 내려가게 만들어 준다.
그랬다 해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어버린 역사의 단면이었지만,
그래도 조국을 위해 피흘린 그분들을 조금이라도 느끼게 해주고 기억하게 해 주는 이런 글에 감사할 뿐이다.
일오삼오.
제목에 숨어있는 뜻을 생각해 봤다.
본문에는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지만, 민석을 빗대어 이야기 한건 아니었을까 싶다.
민석은 자신의 오만한 탄식에, 조선이라는 숲이 깨어나리라 믿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결과는 실패였을까, 성공이었을까...
마지막으로, 지난번 <나미브:아무것도 없다> 때도 느꼈지만, 도서출판 오후, 정말 괜찮은 출판사라고 밖에는 더 할말이 없는 듯 싶다.
오타도 거의 없고, 책 편집도 깔끔하고, 표지와 책날개 안 쪽까지 흠 잡을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1535>가 두번째 출간작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앞으로도 초심을 잃지 말고 언제까지고 애정할 수 있는 출판사가 되길 응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