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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이어 말한다 - 잃어버린 말을 되찾고 새로운 물결을 만드는 글쓰기, 말하기, 연대하기
이길보라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5월
평점 :
이길보라 작가의 <당신을 이어 말한다>를 읽었다.
그리고 그를 이어 말하고자 한다.
다음은, 책을 읽는 내내 내 마음속에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던 나의 지난 5월의 이야기다.
나에게는 소중한 리츄얼이 있다. 그것은, 몹시 바쁜 6-8월을 잘 보내기 위해 에너지를 얻기 위해 5월 즈음에 고향에 대전에 다녀오는 것이다. 나의 친가 쪽 가족들이 계시는 곳. 내가 사랑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곳. 대전에 가면 마음이 편해진다. 마치 서울에 두고 온 나의 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이랄까. 아마 대전에 가는 시간은 1년 365일 중 362일은 일로부터 잠시 분리되어 살아보라는 신의 계시일 것이다. 일이 없는 나의 삶이 어떤지 느껴보는 것도 <나>라는 사람을 알아가는 데에 있어 아주 소중한 순간이 될 테니.
때문에 대전에 간다는 것은 1년 중 나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닐 수가 없는데, 2021년의 5월에 대전에 갔을 때 나의 미간이 몹시 찌푸려지는 상황이 있었다. 작은 고모, 작은 고모부, 나, 그리고 사촌언니 이렇게 4명이서 삼계탕을 먹으러 갔을 때였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던 날로 기억한다. 삼계탕을 먹으려고 들어가려는데 우리 보고 빨리 지나가며 빵빵거리는 운전자를 마주했다. 참으로 불쾌한 소리가 아닐 리 없었다.
분에 풀리지 않은 나의 씩씩거림은 삼계탕이 나오기 전까지 계속되었고, 대전에서의 힐링이 마무리되고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오는 길에도 그 클랙션의 기분 나쁜 울림이 떠올라 이따금씩 몸서리쳤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운전자들이 클랙션을 울리는 게 한두 번이냐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의 <작은 고모부>라는 사람을 소개하는 데 있어 절대적으로 불필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보는 그의 모습을 설명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까?
"나의 작은 고모부는 몸의 반쪽이 마비가 되어 걸음이 불편하시기 때문에 누군가의 부축과 지팡이 없이는 혼자 걸으시기 힘드시다. 그래서 걸음이 남들보다 느릴 수밖에 없다."
차에서 내려 삼계탕집까지 걸어가는데 걸린 시간은 단 20초.
긴 횡단보도를 건너간 것도 아니었고, 작은 골목을 걸어가신 것뿐이었다.
비가 내렸다. 우산을 펴는데 조금 지체가 되었을 뿐이다.
나는 나의 고모부께서 몸이 불편하다는 사실이 당신에게 밝혀졌다는 이유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도 된다>고 여겨졌던 운전자의 행동이 <몸이 불편한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 나쁜 인간>의 행동으로 뒤바뀌지 않길 간절히 바란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장애인이 지나갔든, 비장애인이 지나갔든 간에, 그 잠깐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클랙션을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눌러댄 운전자를 그저 마주해야만 하는 게 현실이라면 나는 그 현실이 진심으로, 내 온 마음 다해 <끔찍하다>고 표현하고자 함이니.
나는 사회가 좀 더 서로를 포용할 줄 아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차별 없는 사회, 서로를 기다려 줄 줄 아는 사회, 누구나 마음 놓고 길을 건널 수 있는 그런 사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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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당시에는 너무 놀라고 어이가 없어 경황이 없었음에 운전자에게 물어보지 못한 질문이 있다. 이 자리를 빌려 그에게 묻는다.
우리 고모부께서 나의 부축 없이, 지팡이 없이, 홀로 우산을 쓰고 걸어가셨어도 그 클랙션을 감히 누르셨을 테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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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순간과 시도를 마주할 때마다 희망이 생긴다.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각자가 가진 고유성을 인정하기에 '장애'라는 단어를 굳이 가져다 쓰지 않아도 될 때. 사회의 '소수자'. '마이너리티', '장애인'이라는 말을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그런 분류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사회, '다수'가 '소수'에게 매번 자신의 소수성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믿게 된다." P. 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