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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평점 :
이번 주말에 두 권의 소설을 읽었다. 마누엘 푸익의 '조그만 입술'과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조그만 입술'은 일요일 새벽에 시작해 자다 일어나
마무리지었고 '인간 실격'은 영천 행 버스 안에서 읽었다.
'인간 실격'은 일인칭 시점이며 화자의 내면 심리에 대한 설명이 전체 이야기를
끌어간다. 첫 몇 장을 읽으면서 나는 주인공이 나와 매우 흡사하다고 느꼈다. 좀더
읽으면서는 주인공이 나와 '반대'라고 느끼게 되었다.
'반대'가 뭘까. 서로 반대의 위치에 있다는 것은 서로로부터 가장 먼 위치에 있다는
것이 아니다. '배웅'과 '마중'이라는 반대말 쌍을 생각해보자. 배웅과 마중이라는 두
단어는 다른 모든 것은 같고 하나만 다른 상황이다. 즉, 출발과 도착이라는 -- 이
반대말 쌍도 방향만 다를뿐이다 -- 상황만 다르지, 여정의 일부를 덜어주는 행위라는
점, 그리고 행위자의 이동을 이야기한다는 점은 같은 것이다. 유효한 반대말 쌍이
되기 위해서는 두 단어는 같은 선상에 있어야 하며 가까워야 한다. 이러한 고려 없이
가장 거리가 먼 단어를 고르려 한다면 배웅의 반대말로는 버섯 정도가
선택되어야할지도 모른다. (반대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줄이자)
즉, 나는 주인공과 같은 선상에 있다고 느꼈고, 그 선 위에서 하나의 결정적인
차이를 느꼈기 때문에 반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읽어나가면서 나와
반대라는 느낌은 지속되었는데, 그 선과 그 차이는 계속 달라져갔다. 그러다 재밌는
부분을 만났다. 주인공은 그의 친구와 반의어 놀이를 한다. 내가 반대말에 대해
생각한 것은 이 부분을 읽기 전이었다!
"꽃의 반의어는?"
내가 물으면 호리키는 입을 일그러뜨리고서 생각하다가 대답합니다.
"에에, 화월이라는 요릿집이 있으니까, 달."
"아니야. 그건 반의어가 아니야. 오히려 유의어지. 별과 제비꽃도 유의어잖나?
반의어가 아니라고."
"알았어. 그러면 꿀벌이다."
"꿀벌?"
"모란에....개미던가?"
"뭐야? 그건 그림의 모티프라고. 얼버무리려 들면 안되네."
...
"더. 졸렬해. 꽃의 반의어는 말이야....이 세상에서 가장 꽃 같지 않은 것, 그것을
들어야지."
"그러니까, 그....잠깐. 뭐야. 여자군."
"내친 김에 여자의 유의어는?"
"창자."
"자네는 참 시를 모르는군. 그럼 창자의 반의어는?"
"우유."
"야. 그건 좀 괜찮은데. 자, 그런 식으로 또 하나. 부끄러움의 반의어."
나는 이 소설을 주인공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의 변화,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에
대응하는 방식의 변화로 읽었다. 이 소설에서 세상은 고정되어 있고, 세상과 '나'의
관계는 내가 세상을 읽는 방법에 의해 변한다. 한 사내의 유년시절부터 지금의 내
나이 정도까지 실격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이 바로 이 소설이 그리고 있는 부분이다.
이 소설은 아직 세상과의 관계가 정해지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소설이며, 세상과의
관계가 불안정한 사람들을 위한 소설이며, 현재 자신과 세상이 맺고 있는 관계가
불만스러운 사람들을 위한 소설이다. 또는 그랬던 사람들.
#1
그러나 이런 것은 정말이지 하찮은 예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이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2
"그나저나 네 난봉도 이쯤에서 끝내야지. 더 이상은 세상이 용납하지 않을테니까."
세상이란 게 도대체 뭘까요. 인간의 복수일까요. 그 세상이란 것의 실체는 어디에
잇는 것일까요. 무조건 강하고 준엄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여태껏
살아왔습니다만, 호리키가 그렇게 말하자 불현듯 "세상이라는 게사실은 자네
아니야?"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지만 호리키를 화나게 하는 게 싫어서 도로 삼켰습니다.
#3
"아니. 이젠 필요없어."
정말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누가 무언가를 주었을 때 그것을 거절한 것은 제
생애에서 그때 단 한번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 불행은 거절할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이었습니다. 권하는데 거절하면 상대방 마음에도 제 마음에도 영원히
치유할 길 없는 생생한 금이 갈 것 같은 공포에 위협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읽어나가는데 어렵지 않고 지루하지 않은 편이다. 분량도 130페이지로 짧은 편이다.
민음사에서 나온 것을 읽었는데 단편이 하나 더 수록되어 있다. 예수를 사랑했던
유다의 이야기인데 이것은 인간실격과는 분위기는 꽤나 다르지만 재미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표지 그림은 에곤 쉴레의 자화상이다. 좋은 선택이다. 추천이라고 말한다면
건방질 것 같고 선물할 일이 있다면 -- 특히 20대 초중반에게 -- 선물하고 싶은
책이라고 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