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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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독특한 상황에 놓인 주인공의 심리의 점진적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읽어도
좋고, 인간의 실존적 조건에 대해 고민하며 읽어도 좋고,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풍자로 보아도 좋다. 분량은 그리 길지 않지만 꽤나 농밀하여 풀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SF, 액션, 에로적 요소가 다 들어가 있다. 그래서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이런 작품은 첫 느낌이 잊혀질 때쯤 다시 한번 봐야 한다.

어렸을땐 독후감 쓸 때 줄거리로 때우는건 바보같은 일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었지만,
독후감에 줄거리가 웬만하면 등장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 물론 누구나 아는 작품은
예외겠지만. 어떻게 보면 어떻게 요약하느냐도 하나의 관점을 분명히 드러내는 일이다.

줄거리는 이러하다.

곤충채집이 취미인 교사가 모래속에서 사는 곤충을 찾아 해변가의 외딴 마을로
찾아간다. 그는 길을 잃어버리고 한 노인의 도움을 받아 모래 구덩이 안의 집으로
안내를 받고 그 마을에서 하루를 묵게 된다. 그가 묵게 된 집에는 여인이 있었다.
그는 여인으로부터 이 마을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이 마을에서는 모래를 끊임없이
퍼내야한다. 이 모래는 끊임없이 마을로 흘러내리고 바람을 통해 쌓이게 되어서,
잠시라도 쉬게 되면 모래가 집을 삼켜버리고 그렇게 되면 제방에 구멍이 뚫린것 처럼
전 마을이 조만간 모래에 잠기게 된다. 이 모래는 매우 특별해서 모래 속에 잠긴
물체는 곧 썩고 만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은 밤만 되면 모래를 퍼 나른다.

다음날 그는 모래 구덩이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타고 내려왔던 사다리가 없었다.
사다리를  내려달라고 해도 내려주지 않았다. 이곳은 일손이 귀해서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여러가지로 항거해보았지만 사다리는 내려오지 않았다. 그 집에 있던
여인에 대해서 그는 마을 사람들이 그를 유혹하기 위해 보낸 것으로 생각하고 여자를
인질로 붙잡아 빠져나가려 해보았지만 인질이 죽건 말건 상관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물을 주지 않자 그는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정부에 이야기하면 되지 않겠느냐, 천천히 모래를 개량하면 되지
않겠느냐 이런 저런 방안을 이야기하며 강제노역이 아닌 다른 방식을 선택할 것을
설득해보지만 마을사람들은 정부를 믿을 수 없고, 그냥 퍼내는게 싸게 먹힌다며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며칠동안 순응하는 척하며 탈출의 기회를 잡게 된다. 탈출에
성공하는 듯했으나 마을밖으로 나가던 중 모래늪에 빠지게되고 마을 사람들에게
구조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그가 초기에 원하던 것(바깥의 소식, 시원한 바람)들에
대해 부질없다고 생각하게 되고 여인과의 사이에 아이를 갖게 되어 행복하게 산다.

보르헤스,마르케스,칼비노 등을 좋아한다면 이 작품 역시 맘에 들 가능성이 높다.
코엘료가 위의 세 사람과 나란히 이야기 될때가 많은 걸 보면 코엘료 작품이 마음에
들었던 사람도 마음에 들지 않을까. 코엘료에 대해서는 직접 읽어본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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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스케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2
도리스 레싱 지음, 서숙 옮김 / 민음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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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이름이 들어간 영화나 소설들은 항상 우선적으로 관심을 끈다.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라든가, 오쇼 야스지로의 '동경이야기', 디킨즈의 '두 도시
이야기', 고골의 '뻬쩨르부르크 이야기'의 공통점은 그 매력에 끌려 샀지만 아직 안
본 작품들이라는 것이다. 다행히 도리스 레싱의 런던 스케치(London Observed:
Stories and Sketches)는 이번 주말과 어제밤에서 새벽 사이에 읽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중 한권이다.

작가가 여자인줄도 몰랐다. 도리스 레싱은 1919년 생이고, 영국인 부모를 둔
남아프리카의 영국 식민지 출생이며 서른 살때 런던으로 이주했다. 이 책이 Stories
and Sketches라고 되어있지만 그냥 단편소설 모음이고 그림은 없다. 여기 수록된
단편들중 제일 앞에 있는 "데비와 줄리" 이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값어치가 있었다.

자신의 아이를 낳자마자 버린 줄리라는 미혼모의 이야기이다. 여기까지 들으면
아이를 버렸는데, 죄책감이 어쩌네, 나중에 아이가 장성하여 어머니를 찾고 어쩌고
하는 걸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서른 네 페이지의 이 소설엔 그런 이야기는 없다.
양수가 터지기 시작해서 아이를 낳고 네 시간쯤 뒤까지의 이야기를 다룰 뿐이다.

임신한 뒤 가출한 줄리는 기차 플랫폼에서 우연히 만난 데비의 집에 얹혀 산다.
데비가 여행을 떠난 사이 (소설이 끝날때까지 여행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예정일보다
훨씬 빨리 양수가 터지고 줄리는 책에서 읽은 지식에 의해 아이가 나올 것이라는
것을 느낀다. 이런 저런 물건들을 챙겨서 물이 질질 흐르는채 버스를 타고 미리
봐두었던 어두컴컴한 빈 창고로 간다. 빈 창고에는 커다란 검은 개가 있었고, 그
검은개가 깔고 있던 담요를 뒤집고 그 위에서 아이를 낳는다. 탯줄을 자르고 아이를
새틴 블라우스로 잘 감싼다. 해산 뒤의 후산물들이 다리에서 쏟아지자 검은 개가
빠르게 삼키고는 피묻은 담요를 깨끗이 핥는다. 줄리는 아이를 안고 그 근처의
공중전화 부스에 내려놓고는 후들거리며 건너편 술집 화장실로 가서 몸을 씻는다.
그리고는 맥주와 레모네이드를 섞은 섄디를 마시며 부스를 지켜본다. 잠시후
구급차가 아이를 실어간다. 줄리는 안도하며 지하철을 타고 가출했던 서먹한 집으로
돌아간다. 늘어진 배를 가리고 집에 들어가서 몸을 깨끗이 씻고 샌드위치를 먹고,
TV를 보자 뉴스에서 자신의 아이 얘기가 흘러나왔고, 로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걸
알게 된다. 줄리는 다시 학교에 다니기로 한다.

아주 강렬한 이야기다. 잘 그러지 않는 편인데, 일요일 저녁에 읽고 월요일에 다시
찾아읽었다. 단편집이라 그런지 '데비와 줄리'이외의 다른 이야기들은 전반적으로
차분하다. 그리고 제목과 어울리는 편이다. '공원의 즐거움', '사회복지부',
'응급실','지하철을 변호하며','새 카페' 제목만으로는 부드러운 수필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차분하면서 날카롭다. 주인공은 대부분 여성인데, 도시 속에서의
일상적인 내용들을 담담하게 포착하면서도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뛰어난 도시
관찰자다. 제목을 그렇게 붙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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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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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에 두 권의 소설을 읽었다. 마누엘 푸익의 '조그만 입술'과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조그만 입술'은 일요일 새벽에 시작해 자다 일어나
마무리지었고 '인간 실격'은 영천 행 버스 안에서 읽었다.

'인간 실격'은 일인칭 시점이며 화자의 내면 심리에 대한 설명이 전체 이야기를
끌어간다. 첫 몇 장을 읽으면서 나는 주인공이 나와 매우 흡사하다고 느꼈다. 좀더
읽으면서는 주인공이 나와 '반대'라고 느끼게 되었다.

'반대'가 뭘까. 서로 반대의 위치에 있다는 것은 서로로부터 가장 먼 위치에 있다는
것이 아니다. '배웅'과 '마중'이라는 반대말 쌍을 생각해보자. 배웅과 마중이라는 두
단어는 다른 모든 것은 같고 하나만 다른 상황이다. 즉, 출발과 도착이라는 -- 이
반대말 쌍도 방향만 다를뿐이다 -- 상황만 다르지, 여정의 일부를 덜어주는 행위라는
점, 그리고 행위자의 이동을 이야기한다는 점은 같은 것이다. 유효한 반대말 쌍이
되기 위해서는 두 단어는 같은 선상에 있어야 하며 가까워야 한다. 이러한 고려 없이
가장 거리가 먼 단어를 고르려 한다면 배웅의 반대말로는 버섯 정도가
선택되어야할지도 모른다. (반대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줄이자)

즉, 나는 주인공과 같은 선상에 있다고 느꼈고, 그 선 위에서 하나의 결정적인
차이를 느꼈기 때문에 반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읽어나가면서 나와
반대라는 느낌은 지속되었는데, 그 선과 그 차이는 계속 달라져갔다. 그러다 재밌는
부분을 만났다. 주인공은 그의 친구와 반의어 놀이를 한다. 내가 반대말에 대해
생각한 것은 이 부분을 읽기 전이었다!

"꽃의 반의어는?" 내가 물으면 호리키는 입을 일그러뜨리고서 생각하다가 대답합니다. "에에, 화월이라는 요릿집이 있으니까, 달." "아니야. 그건 반의어가 아니야. 오히려 유의어지. 별과 제비꽃도 유의어잖나? 반의어가 아니라고." "알았어. 그러면 꿀벌이다." "꿀벌?" "모란에....개미던가?" "뭐야? 그건 그림의 모티프라고. 얼버무리려 들면 안되네." ... "더. 졸렬해. 꽃의 반의어는 말이야....이 세상에서 가장 꽃 같지 않은 것, 그것을 들어야지." "그러니까, 그....잠깐. 뭐야. 여자군." "내친 김에 여자의 유의어는?" "창자." "자네는 참 시를 모르는군. 그럼 창자의 반의어는?" "우유." "야. 그건 좀 괜찮은데. 자, 그런 식으로 또 하나. 부끄러움의 반의어."
나는 이 소설을 주인공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의 변화,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에 대응하는 방식의 변화로 읽었다. 이 소설에서 세상은 고정되어 있고, 세상과 '나'의 관계는 내가 세상을 읽는 방법에 의해 변한다. 한 사내의 유년시절부터 지금의 내 나이 정도까지 실격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이 바로 이 소설이 그리고 있는 부분이다. 이 소설은 아직 세상과의 관계가 정해지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소설이며, 세상과의 관계가 불안정한 사람들을 위한 소설이며, 현재 자신과 세상이 맺고 있는 관계가 불만스러운 사람들을 위한 소설이다. 또는 그랬던 사람들.
#1 그러나 이런 것은 정말이지 하찮은 예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이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2 "그나저나 네 난봉도 이쯤에서 끝내야지. 더 이상은 세상이 용납하지 않을테니까." 세상이란 게 도대체 뭘까요. 인간의 복수일까요. 그 세상이란 것의 실체는 어디에 잇는 것일까요. 무조건 강하고 준엄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여태껏 살아왔습니다만, 호리키가 그렇게 말하자 불현듯 "세상이라는 게사실은 자네 아니야?"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지만 호리키를 화나게 하는 게 싫어서 도로 삼켰습니다.
#3 "아니. 이젠 필요없어." 정말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누가 무언가를 주었을 때 그것을 거절한 것은 제 생애에서 그때 단 한번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 불행은 거절할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이었습니다. 권하는데 거절하면 상대방 마음에도 제 마음에도 영원히 치유할 길 없는 생생한 금이 갈 것 같은 공포에 위협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읽어나가는데 어렵지 않고 지루하지 않은 편이다. 분량도 130페이지로 짧은 편이다. 민음사에서 나온 것을 읽었는데 단편이 하나 더 수록되어 있다. 예수를 사랑했던 유다의 이야기인데 이것은 인간실격과는 분위기는 꽤나 다르지만 재미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표지 그림은 에곤 쉴레의 자화상이다. 좋은 선택이다. 추천이라고 말한다면 건방질 것 같고 선물할 일이 있다면 -- 특히 20대 초중반에게 -- 선물하고 싶은 책이라고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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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마의 수도원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8
스탕달 지음, 원윤수.임미경 옮김 / 민음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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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탕달의 대표작이라고 하면 '적과 흑' 그리고 파르마의 수도원을 꼽을 수 있겠다.
물론 스탕달의 연애론도 유명하다. 펭귄 문고에도 포함되어 있고 국내에도 여러번
번역되었다. 그런데 이 스탕달의 연애론은 지금 연애하는 사람들보다는 차인지 얼마
안되는 사람들이 읽을만한 책이다.

파르마의 수도원은 예전에는 '파르므의 승원'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가(일본에서
승원이라고 번역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승원보다는 수도원이 우리에겐 더
익숙하니 '파르므의 수도원'으로 번역되었고,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에는 '파르마의
수도원'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파마산 치즈, 파르마 왕립극장,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고향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파르마는 프랑스에서는 파르므라고 불린다. 그래서 원제는 La Cartreuse
de Parme인데, 북경의 오후"라는 소설을 한국 작가가 썼다고 했을 때 "Afternoon in
Bukgyeong"이라고 번역되는 것보다는 "Afternoon in Beijing"이 더 나은 번역이라고
생각된다면 '파르마의 수도원'이 더 나은 번역일 것이다.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는 젊은 귀족 청년 파브리스 델 동고가 성채로 압송되었을 때
그 곳에서 성채의 책임자 콘티장군의 딸 클렐리아를 보게 되는 순간부터다.
파브리스는 몇년전 클렐리아가 소녀일 때 잠시 마차를 같이 탄 적이 있었고 그가
감금될 탑으로 올라가는 도중 그녀를 다시 보게 되면서 사랑에 빠진다. 클렐리아의
가슴 역시 두근거렸다.

파브리스가 감금된 방의 창은 클렐리아의 새방(새를 기르는 방)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그 방의 창을 통해 클렐리아를 보기를 희망한다. 클렐리아 역시 어색한
모습으로 새방에 매일 나타난다. 파브리스는 그녀가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눈이 자신을 향해 인사를 보내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뜻하지 않은 곤경을 감당할 수 없었던 그녀는 재빨리 새들 쪽으로 몸을 돌려 모이를 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몸을 떨고 잇었으므로 나눠주던 물을 엎지르고 말았다. 파브리스는 그녀가 당황하고 있음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녀는 마침내 뛰듯이 달아나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은 파브리스의 일생에 있어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이때 만약 누군가가 감옥에서 나가게 해주겠다고 했어도 그는 그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 그것도 단호히!
파브리스는 그때까지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고, 자신의 마음에는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다 자신도 사랑이라는 걸 느끼게 되었다고 생각했던 여인, 아름답고 재기넘치는,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그의 젊은 고모에게 사랑을 고백할까를 망설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파브리스는 클렐리아를 보면서 그의 고모, 산세베리나 공작부인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의사전달수단, 즉 감방에서 우연히 찾아낸 숯덩이로 손바닥에 알파벳을 한자씩 쓰는 수단을 이용해서 클렐리아에게 말을 걸곤 했다. 클렐리아는 고민이 많았다.
파브리스는 행동이 신중한 편은 아니었다. 나폴리에서는 그가 애인을 너무 쉽게 바꾼다는 평판이 있었다. 클렐리아는...궁정사교모임에 참석하게 된 이후...자신에게 청혼해 오는 젊은이들에 대한 평판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아뿔싸! 파브리스는 그런 청년들 누구와 비교해 보아도 연애에 있어서는 가장 변덕스러운 사람 같았다. 지금 그는 감옥에 있고 쓸쓸하다. 그래서 그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단 한 사람의 여인에게 환심을 사려는 것이다. 이보다 더 명확한 문제가 있을까? 아니 이보다 더 '뻔한' 답이 있을까. 이런 생각으로 클렐리아는 상심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파브리스가 자신의 감정을 다 털어놓아서 자신이 이제 공작부인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밝혔다 해도, 그녀가 그 말을 얼마나 믿을 수 있었겠는가? 또 비록 그 말을 믿는다 해도 그의 감정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까지 믿을 수 있었을까?
게다가 클렐리아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돈많고 잘생긴 크레센치 후작에게 시집갈 것을 강권하고 있었고, 파브리스에 대한 암살(독을 이용한)이 계획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날, 크레센치 후작은 악단을 보내어 그녀에게 세레나데를 연주하게 하고, 이 세레나데를 들은 파브리스는 그 음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채 감동하여 손바닥에 글씨를 써서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클렐리아는 단지 우울한 표정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이 결혼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당장 수녀원으로 보낼 것이고 그러면 파브리스는 독살되고 말 것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부친의 협박에 굴복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클렐리아는 처음으로 파브리스에게 의사를 전달한다. 피아노 앞에 앉아 한창 유행하고 있는 한 오페라의 레치타티보를 부르는 척하며 그에게 독살 위험이 있음을 말한고 속옷을 뜯어 끈을 만들어 창밖으로 늘어뜨릴 것을 이야기한다. 그 후 클렐리아는 파브리스에게 알파벳 카드를 만들어 보내고 이 둘은 알파벳 카드를 이용하여 대화를 나누고, 파브리스에게 음식을 매일 전달한다. 파브리스를 사랑하는 고모 산세베리나 공작부인은 파브리스의 구출계획을 세우지만 파브리스는 감옥에서 떠나지 않으려한다. 그에게 가장 행복한 곳이기 때문에. 클렐리아는 이러한 파브리스의 행동을 무마하려고 한다. 탈출하지 않으면 한평생 수녀원에 숨어지내겠다고 말하고 파브리스가 자신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파브리스는 낙담하며 탈출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탈출에 성공하지만... 그 뒤는 매우 빠르게 전개된다.
세상의 속인들이 나를 두고 불행하다 했을 때 나는 얼마나 행복하였던가! 그러나 지금 너무도 변해버린 내 운명이여! 마조레 호숫가에서 파브리스가 적어 보낸 페트라르카의 두 구절 아니에요, 내 마음 변하는 것을 보게 될 날은 없으리니,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준 아름다운 눈이여. 클렐리아가 속으로 답한 페트라르카의 두 구절
* 이런저런 얘기가 생각나는데 정리는 좀더 나중에. ** 행복하게 산다는게 뭘까. 이 소설을 스탕달은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소수의 행복한 사람들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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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베개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28
나쓰메 소세키 지음, 오석륜 옮김 / 책세상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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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리뷰라고 하긴 뭣하고 추가 정보.

일요일 낮에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게를 샀다. 아직 다 읽지 못했는데 그만 집에
놔두고 왔다. 첫부분이 인상적이었는데 인용하지 못함을 용서하길. 이 부분과
무관하게 수첩에 옮겨 적어놓은, 주인공이 인용한 시가 있어 옮긴다. 누구의 것인지
출처는 밝혀져 있지 않았다.

Sadder than is the moon's lost light
Lost ere the kindling of dawn
To travellers journeying on,
THe shutting of thy fair face from my sight

출처가 궁금하여 뒤져보니 조지 메레디쓰의 THE SHAVING OF SHAGPAT에 등장하는
누군가가 읊은 시다. 원래의 것은 아래와 같다.

    Sadder than is the moon's lost light,
    Lost ere the kindling of dawn,
    To travellers journeying on,

    The shutting of thy fair face from my sight.
    Might I look on thee in death,
    With bliss I would yield my breath.

    Oh! what warrior dies
    With heaven in his eyes?
    O Bhanavar! too rich a prize!
    The life of my nostrils art thou,
    The balm-dew on my brow;

    Thou art the perfume I meet as I speed o'er the plains,
    The strength of my arms, the blood of my ve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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