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스케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2
도리스 레싱 지음, 서숙 옮김 / 민음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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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이름이 들어간 영화나 소설들은 항상 우선적으로 관심을 끈다.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라든가, 오쇼 야스지로의 '동경이야기', 디킨즈의 '두 도시
이야기', 고골의 '뻬쩨르부르크 이야기'의 공통점은 그 매력에 끌려 샀지만 아직 안
본 작품들이라는 것이다. 다행히 도리스 레싱의 런던 스케치(London Observed:
Stories and Sketches)는 이번 주말과 어제밤에서 새벽 사이에 읽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중 한권이다.

작가가 여자인줄도 몰랐다. 도리스 레싱은 1919년 생이고, 영국인 부모를 둔
남아프리카의 영국 식민지 출생이며 서른 살때 런던으로 이주했다. 이 책이 Stories
and Sketches라고 되어있지만 그냥 단편소설 모음이고 그림은 없다. 여기 수록된
단편들중 제일 앞에 있는 "데비와 줄리" 이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값어치가 있었다.

자신의 아이를 낳자마자 버린 줄리라는 미혼모의 이야기이다. 여기까지 들으면
아이를 버렸는데, 죄책감이 어쩌네, 나중에 아이가 장성하여 어머니를 찾고 어쩌고
하는 걸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서른 네 페이지의 이 소설엔 그런 이야기는 없다.
양수가 터지기 시작해서 아이를 낳고 네 시간쯤 뒤까지의 이야기를 다룰 뿐이다.

임신한 뒤 가출한 줄리는 기차 플랫폼에서 우연히 만난 데비의 집에 얹혀 산다.
데비가 여행을 떠난 사이 (소설이 끝날때까지 여행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예정일보다
훨씬 빨리 양수가 터지고 줄리는 책에서 읽은 지식에 의해 아이가 나올 것이라는
것을 느낀다. 이런 저런 물건들을 챙겨서 물이 질질 흐르는채 버스를 타고 미리
봐두었던 어두컴컴한 빈 창고로 간다. 빈 창고에는 커다란 검은 개가 있었고, 그
검은개가 깔고 있던 담요를 뒤집고 그 위에서 아이를 낳는다. 탯줄을 자르고 아이를
새틴 블라우스로 잘 감싼다. 해산 뒤의 후산물들이 다리에서 쏟아지자 검은 개가
빠르게 삼키고는 피묻은 담요를 깨끗이 핥는다. 줄리는 아이를 안고 그 근처의
공중전화 부스에 내려놓고는 후들거리며 건너편 술집 화장실로 가서 몸을 씻는다.
그리고는 맥주와 레모네이드를 섞은 섄디를 마시며 부스를 지켜본다. 잠시후
구급차가 아이를 실어간다. 줄리는 안도하며 지하철을 타고 가출했던 서먹한 집으로
돌아간다. 늘어진 배를 가리고 집에 들어가서 몸을 깨끗이 씻고 샌드위치를 먹고,
TV를 보자 뉴스에서 자신의 아이 얘기가 흘러나왔고, 로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걸
알게 된다. 줄리는 다시 학교에 다니기로 한다.

아주 강렬한 이야기다. 잘 그러지 않는 편인데, 일요일 저녁에 읽고 월요일에 다시
찾아읽었다. 단편집이라 그런지 '데비와 줄리'이외의 다른 이야기들은 전반적으로
차분하다. 그리고 제목과 어울리는 편이다. '공원의 즐거움', '사회복지부',
'응급실','지하철을 변호하며','새 카페' 제목만으로는 부드러운 수필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차분하면서 날카롭다. 주인공은 대부분 여성인데, 도시 속에서의
일상적인 내용들을 담담하게 포착하면서도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뛰어난 도시
관찰자다. 제목을 그렇게 붙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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