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소녀들의 숲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창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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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6년 조선, 열세 명의 소녀가 사라졌다. 

제주의 숲속에 숨겨진 슬픈 진실. 

이제는 알아야 할 우리의 이야기


시대물, 범죄 스릴러, 수사물에 환장하는 사람에게 이 책은 시작할 때의 탄탄한 이야기 구성과 수려하면서 절도 있는 끝맺음으로 거기다 한국적 서사까지 한 점의 빈틈이 없는 소설이다. 감상을 부풀려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의 탄생은 14세기 고려와 원을 오가며 정치 활동을 펼쳤던 ‘이곡’이라는 학자의 편지에서 발취한 역사적 배경에서 태어났다.

‘듣자 하오니 고려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당장 딸의 존재를 들키지 않도록 숨겨서 지키므로 가까운 이웃조차 딸을 볼 수 없다고 합니다. (…) 군인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숨겨진 딸을 찾는데 (…) 붙잡혀 온 처녀들을 선발하려고 모으면 아름다운 이와 아름답지 못한 이가 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뇌물을 바쳐 사절의 탐욕을 채우면 아무리 아름다운 처녀라 해도 풀어준다고 합니다.’ 

13세기 몽골의 지배를 받던 고려는 모피 같은 물품과 함께 여인들을 공물로 바쳤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명나라에 간 조선 여인의 수는 114명이다. 하지만 기록의 사각지대에 개인적으로 끌려가 사라진 숫자는 그보다 훨씬 많을 터. 대개 11~18세 미혼 여성들이었다. 행주 기씨 집안 8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나 고려에서 차출된 공녀, 원 순제의 총애를 받아 몽골의 황후가 된 기황후 이야기가 이 속에 있다. 

<사라진 소녀들의 숲>이 책의 시작은 두 자매의 아버지이자 뛰어난 수사관이었던 ‘민제우 종사관’의 일지에서 시작된다. 제주에서 열세 명의 소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건, 그 사건을 밝히려던 종사관마저 실종되고 마는데, 아버지의 흔적을 쫓아 천리나 되는 바다를 건넌 열여덟 소녀 민환이. 독자는 ‘민환’이라는 인물의 시각으로 사건을 다시 보고 재구성하면서 역사적 이데올로기와 복잡한 이해관계로 어지러움 가운데 그 속의 핵심 사건만 순수하게 파고든다. 그리고 세상 전부인 아버지를 찾는 필사적인 사투 속에 어쩌면 이미 결말을 예고한 슬픔이 너울지지만, 그로 인해 무너지지 않고 아스라이 퍼지는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소설 속 인물 중 ‘가희’라는 소녀가 막바지에 가서 말한다. “어멍 아방은 자식 위한거랜 생각허지만 정작 자식 입장에선 원허지 않는 일을 할 때가 하영*(많이) 있주마씀.” 통상 부모는 자식에게 말한다. ‘너를 위한 일’이라고. 하지만 이건 몹시도 그 의도를 충실히 담은 협박이다. 오직 부모만이 자식에게 쓸 수 있는. 나는 어쩌면 ‘가희’라는 인물이 부모를 그리는 통찰 속에 사건의 비극은 어디 비할 데 없이 슬프고 그러한 협박은 결코 자식에게 정당화될 수 없음을, ‘옳지 않음’을 못 박는 평 같다고 느꼈다. 

소설에는 다섯의 딸이 나오는데 각기 인물이 가진 개성이 요즘 말로 ‘하드 캐리’하다. 다시 말해 다섯 아이의 각기 다른 그림체로 다채로운 긴장감을 구사했다. 강제로 집을 떠나 인간 공물로서 바쳐져야 했던 고려의 소녀들, 역사의 범죄에서 살아남은 소녀들이 서로 연대하며 지지하며 누군가 위험에 처하면 한달음에 달려가 도우며 사건을 해결한다. 아버지와 남자들을 대신해. 세상과 싸우는 ‘나’만의 힘을 가진 여성들이 굴복되지 않을 때 터지는 감동과 환희가 넘치는 소설이다. 그리고 작가의 말대로 그 끝엔(소설) 온기와 희망으로 회복되는 지점이 늘 그랬듯 끝이 아닌 ‘시작’으로 장식되는 여운을 남긴다.

<사라진 소녀들의 숲>은 누구보다 청소년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무엇보다 역사는 글에 갇혀있지 않는다. 늘 새로운 세대들이 잊지 않고 그날들의 사건을 오감으로 기억하며 다시 배운다. 마치 구전 동화처럼, 평범하게 그러나 생생하게 반드시 잊히지 않을 각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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