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쪼가리 자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1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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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로 칼비노의 작품은 처음인데 문체가 너무 리드미컬하고 담백해서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을 비롯하여 두 개의 작품이 삼부작을 이룬다는데 곧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든다.

 

 

삶을 이루는 모든 것에 궁금증을 던지면서도 자신이 아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 생각하는 세상물정 모르는 젊은이였던 메다르도는 종교 전쟁에 참여했다가 몸이 반쪽이 되어버리고 만다. 반쪽이 되어 고향에 돌아온 건 '악한' 메다르도였는데, 그는 성 내에서 보이는 모든 것을 반쪽 내고 사소한 죄목에도 엄격한 벌을 내리며 자신의 악을 과시한다. 이후 '선한' 메다르도가 마을로 돌아오며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기적인 선과 이상을 마을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둘은 동시에 파멜라라는 한 여성을 사랑하게 되는데, 파멜라를 독차지하기 위해 서로에게 칼날을 겨누게 된다. 악한 메다르도는 선의 끝단을, 선한 메다르도는 악의 끝단을 칼질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피의 결투 끝에 두 사람은 다시 재결합된 온전한 메다르도가 된다.

 

작중 악한 메다르도는 반쪽으로 나뉜 뒤에야 '완전성' 에서 벗어났다 고백한다. 그 완전성이란 순진한 그를 종교 전쟁으로 이끌고 갔던 사회가 주입한 신앙심으로 대표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표면적은 반쪼가리가 되었으나 각 반쪼가리에 해당하는 선악의 깊이는 두 배가 되었으니 반쪼가리가 되기 전의 '온전한' 메다르도와 반쪼가리 삶을 겪은 후 재결합된 '온전한' 메다르도의 삶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중 여러 인물군상들이 나온다. 욕망과 쾌락에 사로 잡힌 이들, 의무와 규율에 사로 잡힌 이들, 자신의 무기가 살상을 위한 도구로 쓰인다 해도 개의치 않는 이, 자신의 딸을 물건 취급하며 이쪽저쪽 반쪼가리 자작들에게 넘기려 드는 부모, 생명을 구하는 것에는 무관심하고 자신의 지적 탐구에만 골몰하는 자 등. 반쪼가리가 된 경험이 없는데도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는 인물들을 통해 작가가 진정한 인간성이란 무엇인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파멜라라는 인물의 순수하면서도 주체적이며 결단력 있는 모습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작품의 화자는 아직 사춘기에 접어들지 않은 메다르도의 조카인데, 작품 전체가 이 아이의 회고록 같기도 하다. 절대선과 절대악으로 대표되는 반쪼가리 자작'들'이 활개 치는 과정은 무구한 아이의 눈으로 묘사되고 설명된다. 이렇듯 순진했던 아이는 사춘기에 접어들며 자신 또한 스스로의 반쪽'들'과 내면을 탐구하는 듯 보이나, 관습과 질서의 상징으로 점철된 어른의 세계에 접어들며 "이런 환상이 부끄러워 참을 수 없었다" 는 말과 함께 그 순수함을 잃어버리는 듯 보인다. 작품의 말미에서 아이는 새로운 세계인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는 여정에 합류하는 것에 실패한 것을 슬퍼한다. 그리고 "나는 여기 이곳, 의무와 도깨비불만이 가득 찬 우리들의 세계에 남아 있다." 라고 이야기한다. 선한 메다르도의 비인간적인 덕성이 심어 놓은 의무, 악한 메다르도의 비인간적인 사악함이 만든 죽음의 도깨비불<만>이 가득 찬 <우리들>의 세계에 대한 회의는 더 복잡해진 세상 속에서 그러한 이분법적 관점만으로는 더 이상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없을 거라는 작가의 탄식일지도 모른다.

 

발췌

 

[...] 온전한 것들은 모두 이렇게 반쪽을 내 버릴 수 있지. 그렇게 해서 모든 사람들이 둔감해서 모르고 있는 자신들의 완전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야. 나는 완전해. 그리고 내게는 모든 것들이 공기처럼 자연스럽고 막연하고 어리석어 보여. 나는 모든 것들을 볼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건 껍질에 지나지 않았어. 우연히 네가 반쪽이 된다면 난 너를 축하하겠다. 얘야, 넌 온전한 두뇌들이 아는 일반적인 지식 외의 사실들을 알게 될 거야. 너는 너 자신과 세계의 반쪽을 잃어버리겠지만 나머지 반쪽은 더욱 깊고 값어치 있는 수천 가지 모습이 될 수 있지. 그리고 너는 모든 것을 반쪽으로 만들고 너의 이미지에 맞춰 파괴해 버리고 싶을 거야. 아름다움과 지혜와 정당성은 바로 조각난 것들 속에만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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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가의 독서법 - 분열과 고립의 시대의 책읽기
미치코 가쿠타니 지음, 김영선 옮김 / 돌베개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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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위 말하는 독서광이나 책벌레가 아니기 때문에 "책을 왜 읽나요?" 라는 말에 자동반사적인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단지 표현하자면, "집에서도 다른 세상과 삶을 경험할 수 있으니까요," "전에 생각해보지 못했던 어떠한 생각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와 같으니까요." 와 같은 판에 박힌 말을 내뱉을 뿐. 그래서 이 책을 읽었다. 사실 책 추천을 위한 책은 사보지 않는 편인데, '퓰리처상을 수상한 《 뉴욕타임스 》 서평가' 의 서재, 그의 생각의 지도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라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선택이었다. (여담인데, 최근 들어 누군가의 SNS 나 유튜브 피드를 보면 그 사람의 무의식적 기호를 알 수 있지 않나라는 의심이 드는 참이다)

 

이민자의 자녀로서 어릴 때부터 독서를 사랑했던 저자는 비평가가 아닌 한 명의 독자로서 아흔아홉 권의 책을 골라 소개했다고 한다. 전자책으로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각 챕터가 단숨에 끝날만큼 호흡이 짧고 빠르게 읽힌다. 번역본을 읽었기 때문에 번역한 분의 한국어 능력인 것도 있겠지만, 짧은 문장들인데도 읽기 좋은 호흡으로 문장이 간결하게 쓰인 게 참 부러웠다. 그러나 짧다고 해서 깊이가 없는 건 아니다. 저자가 꾹꾹 눌러쓴 단어 하나하나에는 그가 살아오면서 읽어온 동서고금의 무한한 레퍼런스들이 현실정치와 판타지를 막론하고 종과 횡을 가로지르며 얽혀 있다.

 

발췌

 

[...] 문학은 “자기 두개골 속에 고립된” 독자가 상상으로 “다른 자아에 접근”하게 해 준다. 정치와 사회의 분열로 쪼개진 세계에서, 문학은 시간과 장소를 가로질러, 문화와 종교 그리고 국경과 역사 시대를 가로질러 사람들을 연결할 수 있다. 우리의 것과 아주 다른 삶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인간 경험이 주는 기쁨과 상실감을 함께 나눠 갖는 느낌을 가져다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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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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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에 관한 책이라고 일컫어지는 <하얀 성>. 상반된 문화에서 자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놀랄 만큼 외양이 같다는 흥미로운 지점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질문은 "나는 왜 나인가" 인데, 작품을 읽으며 스스로 답을 내려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다 질문의 방식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왜 나인가" 가 아닌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혹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나를 나라고 지칭할 수 있는 건 무엇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바꾸면 더 명확해지지 않을까. 그리고 질문을 바꾸니 작품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 말하는 것으로부터 내 나름의 답을 내릴 수 있었다.

 

나라는 존재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나는 이 질문에 '기억' 이라고 답하고 싶다.

 

작품 속 호자라는 인물은 끊임없이 '나' 의 기억을 갈구한다. 처음에는 다른 세상에서 내가 배우고 접해 온 학문과 생활양식에 관해 궁금해하는 걸 보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자신이 아는 바를 누군가에게 가르치는 지위에 있는 자가 가진 습성이겠거니 했다. 그러나 장이 넘어갈수록 보이는 그의 집착과 갈구는 결국 나라는 인물의 <기억>, 그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신이 갈망하는 세계에서 온 '또 다른 나' 의 <정체성> 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실존, 즉 현실 경험을 토대로 구성된다. 자신의 기억을 호자에게 '가르치며' 내심 호자와 호자의 세계에 대해 차별성 및 우월성을 느끼던 나는 호자가 사는 세계에 동화되게 된다. 끈질기게, 집착적으로 나의 기억을 '뽑아낸' 호자는 그 기억을 토대로 내가 되고, 호자의 삶을 살던 나는 호자가 된다.

 

흥미로웠던 점은 호자가 기억을 캐묻는 중에도 타자가 감추고 싶었던 기억에 관해 혹독하리만치 집요하게 캐물었다는 것이다. 이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의 이유로 불행하다" 라는 '안나 카레니나' 속 구절처럼 불행을 겪거나 악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저마다의 순간과 배경이 다르니 그 순간의 기저에 깔린 얽힌 실타래와 같은 모호한 감정의 근원을 알고 싶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을 덮으며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라는 존재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어떤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기억은 어떤 실존 경험에서 비롯된 것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이 이어졌다. 그러나 결국 함께 해준 사람들이 기억 속 행복의 모자이크를 만들어 주었다는 생각이 미쳤고, 삶의 기억, 즉 나라는 존재를 이루는 곁에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소중하게 여기며 더 많은 것을 읽고 접하자는 결론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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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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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은 서구 르네상스 시기, 투시법이 (소설에서는 원근법이라 지칭되나 투시법이 더 적확한 표현이다) 터키 이슬람 세밀화가들 사이에서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것이 그들의 사상과 세계관에 어떤 영향을 (사실 영향이라 쓰고 위협이라 읽는) 끼치는가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며칠 전 병렬독서 하던 다른 책들이 좀처럼 손이 가지 않아서 오랜만에 소설을 읽고 싶단 생각에 책장을 째려보다 골라들었고, 이후 저자의 <하얀 성> 을 읽어볼 예정이다.

 

우선,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겠지만서도, 이 작품을 소개할 때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도 있다고 하는 건 정말 몰염치한 일이라 생각한다. 남자 주인공 카라와 여자 주인공 세큐레는 열두 살 차이가 나는 이종사촌 사이인데, 카라는 세큐레가 열두 살 때부터 좋아했고 (세큐레가 열두 살이면 카라는 스물네 살 ··· ) 그걸 들켜서 세큐레에게서 멀어졌다고 끊임없이 징징거린다. 작품 전반에 걸친 다른 인물의 시각을 통한 세큐레에 대한 묘사와 <나는, 세큐레> 로 이어지는 세큐레 본인의 생각을 종합해 보아도 세큐레는 남자 주인공이자 세밀화가인 카라, 시동생 하산,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또 다른 세밀화가 올리브의 욕망의 대상, 혹은 아버지 에니시테의 (혹은 죽은 남편의) 소유물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밖에 그려지지 않으며, 작품에서 여성이라고는 세큐레와 창녀들, 그리고 거기에 더해봤자 방물장수 에스테르를 포함하여 세큐레 하녀의 포지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여성들뿐이다. 여하튼, 중간중간 구역질 나는 부분이 일부 있긴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고 읽었다.

 

 

태초에 어둠이 있었다. 어둠은 그림 이전에도 이후에도 존재했으며, 세계의 근원이 되는 신은 인간에게 "보라" 라고 명했다. 그리하여 인간은 '신이 보라고 명한 것' 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신의 명을 안다는 것은 본다는 것이요, 세상을 본다는 것은 기억하지 않고도 아는 것이다. '기억' 하지 못한다는 것은 신의 존재도, 신이 주었던 어둠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생을 신의 말씀을 구현해내기 위해 세밀화를 그려왔던 위대한 장인들은 색채 안에서 시간 너머의 어둠을 보고자 한다.

 

작품의 묘사에 따르면, 세밀화가의 작품에 있어서 '화가가 누구인지' 는 중요하지 않다. 화가는 신이 "보라" 라고 한 것을 재현해내는 신의 도구일 뿐이며, 인간 마음속 삶의 풍요와 사랑, 신이 창조한 세계가 가진 다채로움과 그에 대한 존경심 및 신앙심을 드러내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존재일 뿐이다. 신정제로 대표되는 이슬람의 술탄 체제는 표면상으로는 위대한 알라(신)가 있고 그 알라의 뜻을 받들어 왕인 술탄이 통치하는 것으로 보이나, 실상 그 알라의 자리에 술탄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술탄은 세계의 근원이며, 술탄의 명이 곧 진리이다. 그리고 이 세계의 근원인 '그' 술탄이 (1) 베네치아 장인들의 그림처럼 (2) 자신의 세계 전체를 재현하길 원하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사실 술탄을 꾄 건 베네치아로 파견을 다녀온 후 새로운 문명에 감화받은 세큐레의 아버지 에니스테였는데, 그는 화풍에서 만큼은 작중 그 어떤 세밀화가보다도 진보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슬람교는 그 어떤 종교보다도 우상숭배를 배척하는 종교이다. 이에 따라 당시 그림은 이야기를 '장식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그림 자체' 를 위해 존재할 수는 없었다. 처음 베네치아에서 베네치아 화풍에 따라 그려진 그림을 본 에니스테는 자신이 살아온 세계가 주입한 세계관에 따라 "어떤 이야기를 장식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을까?" 라고 생각하지만, 이내 곧 그림이 이야기가 아닌 그림 그 자체를 위해 그려졌음을 깨닫고 충격에 휩싸인다. 그리고 점점 이세계異世界 의 화풍에 매료된 그는 술탄의 세계, 즉 신의 세계가 아닌 '자신' 을 그린 '초상화' 를 그리고 싶어 한다. 문제는 베네치아 화풍의 그림이 신성모독적이란 것이다. 술탄으로 상징되는 '신이 정한 중요성' 에 따라 크기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인간이 어디에 있느냐' 에 따라 크기가 정해진다. 즉, 세상의 중심이 화가 본인이 되는 셈이다.

 

작품 속에는 각 인물이 고뇌하는 몇 가지 중요한 질문들이 있다. 조사원을 자처하는 카라는 차치하고, 극 중 에니스테, 화원장, 나비, 황새, 올리브으로 대표되는 각각의 세밀화가들은 작 초 다음 질문에 마주한다. "세밀화가는 스타일style 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신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눈이 먼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스타일style 이란 무엇인가. 스타일은 '지금, 여기' 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내(화가)' 가 그 누구보다 뛰어나게 신의 세계를 재현해내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화가의 자의식 표출이자, 영원의 시간 속에 존재하고자 하는 바람이다. 작중 신실한 세밀화가들은 선대 거장들의 스타일을 모사하고, 그에 따라 신앙심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므로 스타일을 드러내는 건 죄악이자 신성모독이라고까지 일컫는다.

 

그러나 에니스테의 말에 따르면, 훌륭한 화가는 자신의 스타일을 통해 그린 그림을 통해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어쩌면 스타일은 사람들의 마음속 풍경까지 바꾸며, 그 예술풍이 사람들의 영혼 속에 자리 잡고 나면, 그것은 세상을 보는 하나의 창이자 잣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진정한 그림' 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 속에 숨겨져 있으며, 사람들이 보자마자 나쁘고 신성모독적이라고 여길 그림 안에 숨겨져 있다. 진정한 화가는 <그곳> 에 이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동시에 <그곳> 에 이르렀을 때의 외로움을 두려워한다.

 

이런 에니스테의 견해에 반反 하는 화원장 오스만을 위시한 보수적 세밀화가들은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자신들의 존재를 신(술탄)의 세계를 재현하는 도구로서만 국한한다. 그들에게 있어 말을 그리다가 장님이 되고, 장님이 된 자의 손이 '외워서' 말을 그린다는 건 하나의 축복이다. 그들은 그림에 대한 열정 때문에 신앙에서 멀어지는 것을 경계하며, 새로운 화풍을 받아들이고 그 화풍을 위한 다양한 테크닉을 익히는 것은 재앙이다. 변하지 않는 영원불멸의 신의 시간 속에 남고 싶은 그들은 (사실 변화를 받아들이기 두려운 것임에 틀림없다) 자기 손으로 직접 자기 눈을 찔러 '빨간' 피로 뒤덮은 눈으로 영원의 '검정' 속으로 잡아 먹히듯 침잠한다.

 

어떤 견해를 따르든 작품 속 모든 인물이 다음 말에 공감하리라 생각했다. (1) 얼마나 완벽한 인생을 살든, 얼마나 완벽한 그림을 그리든 간에 유한한 삶을 사는 화가(인간)는 자신의 시간이 언젠가는 끝날 것이란 걸 인지해야 하며 (2) 세밀화가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나든지 간에 그림 자체를 완벽하게 만드는 건 시간이나,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을 초월하는 유일한 방법은 뛰어난 기술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즉 아무리 자신의 예술성에 대해 자의식을 표출하고 싶어도 시간의 유한성 때문에 결국 어둠 속으로 가라앉을 것이며, 그 어둠 속에서 다시금 건져 올려져 색을 발하게끔 하는 것은 화가의 자의식에서 발로되는 예술적 탁월성을 향한 추구라는 것이다.

 

작중 세밀화가들은 실제로든 표면상으로든 술탄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 그러나 에니스테에 따르면, 술탄은 - 모든 술탄이 그러하듯 - 세밀화가가 재현해낸 신의 세계인 '그림' 이 아니라, 그림 속 '자신의 모습' 에 매료된다. 그 과정 속에서 술탄 자신이 표면적으로 중시했던 신이 창조한 세계를 재현해내는 것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세밀화가들의 존재 또한 지워진다.

 

 

작중 여러 화자가 있는데 책의 이름은 왜 <내 이름은 빨강> 인지를 고민하며 읽었고,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작품은 화려한 세밀화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으나, 나는 이 작품을 관통하는 두 가지 주요 색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빨강> 과 <검정> 이다. 앞서 말했듯, 그림 이전과 이후에도 존재하는 어둠의 세계, 신이 보라고 명한 것을 볼 수 있게 되기 이전의 '세계의 근원' 이 되는 세계, 위대한 장인들이 색채의 시공간을 초월하여 보고자 했던 어둠의 세계가 바로 검정의 세계이다. 즉 삶의 이전과 이후를 지배하는 색이 검정인 것이다. 그리고 웃기게도 작품의 남자 주인공 이름은 카라(Black, 검정)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술탄(신)의 명령을 받들어 조사하며 사건의 실체와 관련된 모든 것에 근접하게 되는 사람, 세큐레로 상징되는 사랑과 신의 도구인 세밀화가의 세계를 넘나드는 사람, 세밀화가였으면서 여러 해를 이스탄불 바깥의 세상을 떠돌아다녔기에 한 세계의 내부자이면서 외부자일 수 있는 사람. 작중 카라는 끊임없이 자신이 인간적인 고뇌를 하고 있노라 이야기하나, 읽는 내내 작가가 동서양을 모두 경험하고 신의 세계에 발을 디디기 전의 어떤 초월적 존재를 카라로 설정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다면 빨강이란 무엇인가. 핏덩이 인간이 세상을 처음 만나며 감싸이는 색. 이스탄불 '바깥' 세상에서 카라가 가지고 선물해온 물감통 속 에니스테가 넣어두었던 빨간 염료, 어쩌면 화가로서의 그의 영혼. 세큐레가 카라를 만나러 가기 위해 입었던 빨간 옷, 바늘을 가지고 자신의 눈을 찔러 스스로 눈 멈을 자처했던 이들이 마지막까지 처절하게 느꼈을 살아 있음의 상징, 그리고 죽음의 문턱에서 망자를 감쌌을 비린내 나는 피. 작중 '빨강' 이 자칭했듯 빨강은 삶의 "어디에나 존재" 하며, 삶의 면면을 함께 한다. 자각하지 못하는 자는 부인하나, (빨간) 색은 언제나 우리 앞에 있다. "되라!" 라는 명과 함께 어디에나 존재하는 빨강은 어쩌면 이 작품 속 세계관을 관통하는 세계의 의지, 혹은 세계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피와 함께 진행된 두 세계관의 충돌은 어쩌면 근본적으로는 신의 세상에 더 근접하고자 하는 열망과 그 속에서 현존재로서의 자신을 자각하고자 하는 개인의 필사적인 분투일지도 모른다. 작품 속 인물들은 '베네치아' 화가들도 소실점과 투시점의 중심에 예수를 비롯한 자신들이 중시하는 인물들을 놓는 것의 연속이었고, 그것으로부터 탈피하는 과정이 몇백 년에 걸쳐 이루어졌다는 것을 몰랐다. 다양한 기법을 활용해 화가 개인의 예술적 탁월성을 추구하다 보면 신이 "보라" 라고 명한 세계를 더 정확하게 재현해낼 수 있다는 것, 즉 신에 대한 믿음과 함께 갈 수 있음 또한 몰랐던 것 같다.

 

 

보지 못하는 자와 보는 자가

같지 아니하며

<코란 제 35 장 「파티르」 19 쪽>

 

동방과 서방이

신의 것이니

<코란 제 2 장 「바까라」 115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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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인간 리터러시를 경험하라
조병영 지음 / 쌤앤파커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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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터러시란 텍스트를 매개로 하여 세상을 읽고 쓰는 사회문화적 실천이다.

 

조병영 교수님의 <읽는 인간 : 리터러시를 경험하라> 는 읽고 쓰는 능력인 리터러시literacy 에 관해 이론적+실천적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는 책이다.

 

<세 줄 요약> 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남이 대신 정제한 정보는 결코 <나의 읽기> 가 될 수 없다. 자신에게 가치 있는 텍스트를 발굴하여 그 내용과 의미를 곱씹어 소화시키는 것은 스스로 노력을 들여 직접 실천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글을 '잘' 읽는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현실 세계는 이해한 바를 정리해서 요약하는 차원을 넘어 그 이상의 다양한 문제해결력을 요구하고 있고, 이를 위해 우리는 더 정확하고 깊게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책에 따르면 단순히 글을 읽고 정보를 취합해내는 것과 글을 깊고 정확하게 이해해서 삶에 의미 있는 방식으로 적용하는 건 아예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한다. 읽고(보고 이해하고) 쓰는(표현하고 구성하는) 일이란 기호sign 로써 의미meaning 를 다루는 행위로, 기호를 선택, 연결, 조합, 분석하면서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는 일은 고도로 복잡하고 정교한 지적 사유의 과정을 요하는데, 이러한 리터러시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질문> 과 <대화> 가 필수적이며 대화자들 사이에 공유된 <책임감> 이 필수적이라고 한다. (질문 없는 사회, 대화 없는 사회, 책임 없는 사회는 문해력의 차원을 넘어 사회문화적 문제를 야기한다)

 

우리는 불확정성의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세상을 읽는 독자' 가 되어야 한다. 세상을 읽는다는 것은 비판정신criticality 을 요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를 깊이 이해할 열린 마음을 가지고 다양한 출처에서 비롯된 가치 있는 정보를 선별하여 꼼꼼하고 정확하게 읽어야 한다.

 

<읽는 인간> 은 비판적 읽기를 위한 일종의 툴tool 을 제공하는데 여러 툴을 조합해서 정리해봤다.

 

Q. 나는 무엇을 읽고 있는가

Q. 나는 무엇을 읽을 수 있는가

Q. 나는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

 

Q. 지금 읽고 있는 텍스트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Q. 어떤 근거를 가지고 주장이나 견해를 내세우고 있는가

Q.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어떤 논리적 관계로 연결되고 있는가

Q. 텍스트의 이면에 누가 있는가, 그들이 숨기고 있는 의도, 목적, 선입견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Q. 텍스트에서 지워진 존재들은 없는가

Q. 동일한 주제에 관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개인적으로도 아는 것과 알고 있는 것을 내 언어로 요약하고 정리하는 것, 그리고 그걸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은 각각이 다른 차원의 문제임을 인지하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읽지 않았지만 읽었다는 착각" 을 늘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혼자서만 끄적이는 나만의 방에서 벗어나 타인과 견해를 듣고 타인과 소통하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SNS를 열심히 하자 생각했다.

 

"우주를 탐험하려면 의심과 상상 모두 필요하다. 상상은 종종 우리를 말도 안 되는 세상으로 데려간다. 그러나 상상하지 않고는 아무 데도 갈 수 없다. 의심을 통해서 우리는 환상과 사실을 구별한다. 의심하면서 우리 자신의 사유를 검증한다."

《 코스모스 》, 칼 세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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