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줄 알았으면 말이나 타고 다닐걸 - 난감하고 화나도 멈출 수 없는 운전의 맛
손화신 지음 / arte(아르테)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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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럴 줄 알았으면 말이나 타고 다닐걸> 은 초보 운전자가 숙련된 운전자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담백한 문체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이 책은 일상적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운전이라는 행위, 차, 도로, 네비게이션, 도로와 관련된 사회 · 문화적인 담론으로 뻗쳐 나간다. 단순히 무서워서 운전 배우는 것을 피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읽어보길 권하고 싶은 책. 부담 없고 가벼워서 호로록 읽을 수 있다.

 

첫 면허를 따던 때가 떠오른다. 남들 다 있는데 나만 없다는 생각에 속상해서 충동적으로 등록했던 면허 수업이었다. 연수 시간 12시간. 새벽 5시 50분에 시작하는 2주간의 수업. 내게 "합격입니다" 라는 소리는 '운전 가능자' 라는 또 하나의 삶의 문을 열 수 있게 되었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면허를 따는 것만으로 새로운 세상은 호락호락하게 열리지 않았다. 본가는 초보자가 운전하기에 악명 높은 도시인데, 열두 시간 외에 추가로 열 시간을 더 받았음에도 실제로 운전을 해보니 몸으로 체감이 됐다. 네비게이션에 없는 길이 있는가 하면 잘 가다가 길이 갑자기 사라지거나 갈라지기도 했다. "거기서 거기로 가면 어떡하냐" 라는 옆자리 언성 높인 핀잔에 주눅이 들기도 하고 미숙한 운전 탓에 결국 사고가 났을 땐 자괴감에 눈물이 흐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운전을 놓지 않았다. 1년간 거짓말하지 않고 정말 365일 내내 운전을 했다. 억지로 꾸역꾸역 각종 난코스로 악명 높은 교차로를 거쳐 다녔다. 고가도로 때문에 네비도 읽어내지 못하는 길을 지나며 혼자라는 두려움에 많이도 울었지만, 포기하면 그때부터 정체도 아닌 도태될 거란 두려움 때문이었고, 이 두려움을 견뎌야 했던 지난날의 내가 안타깝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면 전에는 늘 모든 일정이 대중교통의 막차 시간이 기준이었다.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몇 분이 걸리는지, 사람이 붐비는 시간대는 아닌지 등의 자잘한 고민이 내 삶을 지배했다. 낯선 타인과 부딪힐 수밖에 없고 냄새와 코로나 이전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던 전염성 질병 등의 요소가 거슬렸다. 그러나 운전은 그것들 중 많은 것을 해소해 주었다. 내가 원하는 만큼 창문을 열어 환기하며 운전을 할 수 있었고, 피곤한데 앉을 자리가 없진 않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되며 이어폰이 고장 나면 차량 블루투스를 통해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많은 짐을 싣고도 육체적 피로 없이 이동이 가능해졌고, 휴일에 어딘가로 가고 싶으면 망설이지 않고 바로 운전해서 가곤 했다. 어린 시절 충분히 누리지 못했던 직접 경험의 반경을 스스로에게 선사한 셈이었다.

 

책에서 특히 공감이 갔던 부분은 운전해서 갈 수 있는 도로만큼 내 삶의 주체성도 확장된다는 것이었다. 분명 세상 어딘가에는 여전히 그 어떤 결격 사유가 없는데도 운전이라는 행위를 '금지' 당하는 이들이 있다. <내가 나를 위해 선물한 이동하는 나만의 공간> 은 나 자신과 내 삶에 관한 여러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영화 <타이타닉> 을 보고 로즈가 다이아몬드를 수장시키는 장면과 잭과의 꿈속 재회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만, 액자 속 로즈의 삶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새장 속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부여받은 로즈의 '배에서 내린 후의 삶' 은 말로, 자동차로, 경비행기로 확장된다. 분명 차를 가지느냐 마느냐는 개인의 선택의 문제다. 그러나 내게 면허를 따느냐 마느냐는 스스로의 한계와 직접 경험의 반경을 결정짓는 문제였다. 어린 시절 집에 차가 없어서 부모를 통해 어깨너머로도 배울 수 없었던, 그렇지만 남들 다 아는 세계. 시작부터 오롯이 내 선택과 내 의지만으로 확장될 수밖에 없었던 세계는 정말로 내 삶과 마인드 자체를 바꾸었다고 생각한다.

 

죽어가는 강아지가 사경을 헤매며 생사의 기로에 서 있을 때 택시를 잡고자 발만 동동 구르기보다 재빨리 아기를 데리고 대형병원으로 갔던 때를 기억한다. 보험료 및 유지비 때문에 돈은 많이 깨졌지만 그럼에도 누군가 운전할 수 있기 전의 삶으로 돌아가겠느냐라고 묻는다면 단연코 아니, 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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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52
오스카 와일드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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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는 교양 있고 부유하며 아름다운 젊은 청년이다. 그는 예술가 바질 홀워드를 매료시키며 순식간에 그의 예술적 뮤즈muse 가 된다. 바질은 도리언을 신화에나 나올 법한 고대 그리스 영웅처럼 묘사할 만큼 그의 <젊음> 과 <아름다움> 을 숭배하게 된다. 이는 그의 친구 헨리 워튼 경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영원한 젊음과 아름다움을 예찬하며, 현란한 말솜씨로 도리언을 홀린다. 도리언의 존재로 인해 예술적 기질이 정점에 오른 바질 홀워드는 인생의 걸작인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화' 를 그린다. 도리언은 바질의 우상숭배적 애정이 깃든 이 초상화를 혐오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자신은 젊음과 아름다움을 잃을 것인 반면, 초상화는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으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한창 헨리 워튼 경의 젊음과 아름다움에 관한 찬사에 영향을 받고 있던 도리언은 영혼을 걸고서라도 초상화 속 젊음과 아름다움이 자신에게 영원히 귀속되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이후, 그는 헨리 워튼 경이 미치는 영향에 따라, 점점 쾌락주의에 빠지게 된다. 그런 와중에 그는 런던 슬럼가의 허름한 어느 극장에서 시빌 베인이라는 아름다운 배우를 만나게 된다. 시빌 베인은 도리언 그레이의 본명조차 알지 못했지만, 둘은 급속도로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혼을 약속하게 된다. 시빌 베인은 도리언을 사랑하게 되면서 연기자로서 재현하는 사랑과 '진짜' 사랑 간의 차이를 알게 되고, 이후 연기에 몰입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도리언은 인간 시빌 베인이 아닌, 연기하는 '예술 작품' 으로서의 시빌 베인을 사랑했다. 그래서 연기력이 형편없어진 시빌 베인에게 흥미가 떨어진다. 둘은 이별하게 되고, 이로 인해 시빌 베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시빌 베인의 죽음 이후 도리언은 초상화의 변화를 감지한다. 자신이 어두운 마음에 물들어 양심을 저버릴 때마다 자신의 실체가 아닌 초상화가 그 대가를 감당하게 됨을 알게 된다.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품은 초상화를 누가 볼까 두려웠던 도리언은 초상화를 집안 깊숙한 곳에 숨겨 둔다. 시빌의 죽음 이후 근 이십여 년간 도리언은 점점 더 쾌락에 빠져든다. 초상화는 점점 더 흉측해진다. 시빌 베인의 동생인 제임스 베인이 도리언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한다. 바질 홀워드는 도리언을 교화시키려 했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도리언에게 살해까지 당한다. 그는 결국 아편에까지 손을 대게 된다. 쾌락을 탐미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에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는 흉측한 초상화를 없애버리겠다 다짐하고 초상화에 칼을 꽂지만,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 건 도리언 그 자신이었다.

 

 

참, 눈앞에 있는 상대를 존재로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바질이 도리언에게 보여준 우상숭배적 사랑, 헨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도리언에게 자기중심적으로 끼친 영향, 도리언이 시빌에게 보여준 존재 아닌 재현물에 대한 사랑, 시빌이 도리언에게 보여준 꿈속 "아름다운 왕자님" 에 대한 비현실적 사랑, 자신의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정부로 남은 시빌 베인 어머니의 사랑. 이런 말도 안 되는 사랑의 양상들 가운데 제임스 베인이 엄마와 누나에게 보여준 진심 어린 걱정만이 진짜 사랑으로 여겨진다.

 

초반부터 헨리 워튼의 궤변과 위선에 머리가 어질어질한 작품이다. 사실 그는 당대 런던의 도덕적 엄숙주의와 위선을 비꼬며 쾌락과 아름다움을 찬미했으나 그 정도가 지나쳤다. 더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도리언과 다르게 쾌락을 '실천' 하진 않았으니 이 얼마나 위선적인지. 시빌 베인의 죽음 이후 18년간 끊임없이 도리언 그레이가 그의 지인들에게 끼치는 악영향에 관해 이야기하면서도 "젊고 아름답기 때문에" 세간의 중심에서 도리언 그레이를 몰아내지 않은 런던 사교계의 위선 또한 주목할 만하다.

 

런던 귀족들이 내보이는 위선의 상징물이자 정점은 시빌 베인과 그 가족이다. 시빌 베인의 어머니는 어느 귀족의 정부情婦 이다. 아이 둘을 낳아도 끝내 정식으로 혼인할 수 없어서 생활고에 시달리며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빌 베인은 자신이 처한 가난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꿈속에 살며 연극으로 도피한다. 누나인 시빌 베인과 달리, 동생 제임스 베인은 극도로 현실적이다. 아버지를 비롯한 귀족들의 위선을 경멸한다. 제임스 베인은 입만 살아서 도덕이니 예술이니 떠들어대는 런던의 위선적인 귀족들과 달리 세상사를 몸으로 경험하며 돈을 버는 것에 집중한다. 연극적 몽상 속에 사는 엄마와 누나를 걱정한다. 자아가 없어서 이 배역 저 배역에 잘 몰입할 수 있었던 시빌 베인은 아이러니하게도 도리언으로 인해 현실 사랑을 깨닫고 사랑하는 주체로서의 자아를 내세우게 된다. 그러나 사실 그때부터 '예술 속에 살아야 하는' 배우로서의 삶도 도리언 그레이로부터 받을 사랑도 끝이나 마찬가지였다. 누나의 죽음 이후 복수를 위해 제임스 베인은 18년간 집요하게 누나의 "아름다운 왕자님" 의 뒤를 쫓으나, 도리어 그가 먼저 죽게 된다. 그의 죽음은 허무하기 짝이 없다. 상류층의 아무것도 아닌 사냥놀이에 불과한 과정 속에서 잘못 맞아 죽게 되는데 '실수로' 그를 죽인 귀족은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는다.

 

작품은 '예술을 위한 예술' 에 관한 찬미주의적 서문으로 시작한다. 시기가 완전히 일치하진 않지만 그가 살았던 당시의 런던은 디킨스의 소설이 풍미하던 시대였다. 즉 이성과 도덕을 계몽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예술이 사용되던 시기에 그 어떤 것의 수단으로서의 예술이 아닌, '예술을 위한 예술' 을 하자는 와일드의 입장은 주목할 만하다. 더욱이, 예술을 위한 예술을 예찬하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고, 그 속에서 발현되는 귀족들의 위선과 악영향 또한 작품 속에서 이중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순백의 때 묻지 않은 소년이 영원한 젊음과 아름다움이란 환상 속에서 핏빛 쾌락의 나르시시즘에 젖어 파멸하는 이야기. 도리언 그레이가 초상화를 숨긴 곳은 자신의 어린 시절 생애가 보물처럼 숨겨져 있던 곳이었다. 성장하면서 묻어둘 수밖에 없었던 순수함과 (진짜) 젊음이 그 누구의 손길도 닿지 못한 채 먼지로 뒤덮여 있던 곳이었다. 그는 그곳에 자신의 내면 속 양면성을 숨긴다. 당신들이 숭배하는 나의 젊음과 아름다움의 피상성 아래에 내 진짜 내면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듯이. 물론 본인조차 몰랐겠지만.

 

끊임없는 여성혐오적 묘사는 아쉬웠으나, 쾌락과 탐미주의적 선언 속에서 역설적으로 선과 양심의 중요성을 알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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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쓰는 법 - 독서의 완성 땅콩문고
이원석 지음 / 유유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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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가의 독서법> 을 살 때 함께 샀던 책이다. 제목은 <서평 쓰는 법> 이나 방법론에 관한 글이기보다는 독서라는 행위의 본질과 의의, 그리고 독서를 통해 세계와 소통하는 법을 이야기하는 글이라 오히려 부제인 '독서의 완성' 이 글의 취지에 더 적합하다. 개인적으로는 앞서 읽은 <서평가의 독서법> 이 실전서이자 모범 사례라면 이 책은 이론서이자 분석서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제목 및 목차에서부터 작품이 한 시대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평하는 것까지 서평의 다양한 방식을 소개하고, 독서를 한 후 바로 실천할 수 있는 행위까지 소개한다. 물론 원론적인 이야기는 해당 분야 비슷한 책들이 다 비슷한 얘기를 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누군가의 글을 읽고 내 사유를 기록으로 남기는 걸 체계적으로 배워보고 싶다고 하면 적극 추천할 만한 책이다.

 

한 작품이 세상에 나온 이상 그 작품은 더 이상 작가만의 소유물이 아니게 된다. 작품은 작가와 독자, 작가와 세계, 그리고 독자와 세계를 매개한다. 독자는 작가의 여과물을 통해 자신이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를 간접 체험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작가라는 존재를 탐험할 수도 있다.

 

나는 뭔가를 접할 때 내 언어로 요약하는 것을 굉장히 중시하는 편인데 책에서도 요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어서 믿을만한 선생님께 확언받은 기분이라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요약 속에 내가 여태 접하고 사유해 온 게 묻어나기 마련이라는 점에서는 계속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읽고 열심히 써야겠다. 그리고 정제된 언어를 구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겠다.

 

발췌

 

[...] 좋은 책은 그 책의 전문가를 포함한 독자의 해석을 매개로 하여 계속 성장합니다. 그러한 책의 경계는 가변적입니다. 그 경계에 독자가 서 있습니다. 독자의 독서가 곧 해석이며, 좋은 해석은 텍스트를 확장시킵니다.

 

[...] 텍스트에는 무엇보다 저자가 의도한 사유와 의도하지 않은 욕망이 혼재되고, 저자의 사유와 타인의 통찰이 뒤섞입니다. 그 이면에서는 그가 살아가는 시대와 세계가 함께하며, 이후에는 독자가 텍스트를 새롭게 읽어 가면서 새로운 의미를 덧칠합니다.

 

[...] 모든 독자는 선택한 책을 새롭게 읽는 가운데 자아를 쇄신하고 확장하는 여정에 나서게 됩니다.

 

[...] 독자는 책을 대할 때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문제의식에 따라 책을 대하며, 그 문제의식에 따라 특정한 방식으로 질문을 제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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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연인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9
D.H. 로렌스 지음, 정상준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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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반대의 삶을 살던 두 사람이 서로가 가진 전에 본 적 없는 '미지의 경이로움' 에 매료되어 결혼이라는 새로운 삶의 영역에 들어서게 된다. 서로가 가진 이질성 때문에 정신없이 빠져 들었으나, 살아온 삶이 너무 달라 대화로도 메꾸어지지 않는 그 차이는 곧 경멸의 감정을 낳게 된다.

 

아내에게 상처를 주어 미안하면서도 자신이 상처 주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아내가 미운 남편. 가난과 추함과 조악함과의 끝없는 싸움 속에서, 아내는 남편이 곁에 있어도 외롭다. 서로를 경멸하나 서로에게 묶여 있는 두 사람. 어느 한쪽이 죽어야만 끝날 수 있는 끔찍하고도 지독한 싸움은 서로의 영혼을 생매장시킨다. 서로를 서로의 인생에서 이방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영혼이 외롭고 황폐해져 삶에 대한 일말의 희망조차 사라졌을 때 그 쓰라린 환멸 속에서 아이가 태어난다. 아내는 아이를 소중히 여기기 시작하고, 남편은 그것을 질투한다.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비롯되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환멸을 아이들과 공유하고, 아버지라는 존재를 향한 경멸의 감정은 가족 내에서 대물림 된다. 엄마와 영혼이 묶인 아이들은 아빠를 혐오하게 된다. 끊임없는 가난과 가정불화는 가족 전체의 마음에 응어리와 그늘을 지게 만든다.

 

1부에서 첫아들 윌리엄은 엄마의 눈으로 세상을 체질한다. 그리고 그 여과 행위는 연인과의 관계를 파국으로 이끈다. 마치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를 답습하는 것처럼. 1부가 끝날 무렵, 윌리엄의 죽음 후 모렐 부인은 자신의 분신을 잃은 듯한 지독한 비탄 속에 빠진다. 그 슬픔을 두고 함께 고통을 느끼던 폴은 자신의 영혼을 엄마에게 묶는다. 모렐 부인의 삶의 초점이 윌리엄에서 폴로 옮겨 간다. 영혼의 매듭질은 과연 미리엄과의 사랑에 눈 뜬 폴의 삶을 행복으로 이끌 수 있을까.

 

지독하다. 진절머리 나게 지독하다는 말 외에 이 작품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어떤 말이 또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렐 부부 두 사람은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다. 둘의 결혼은 두 사람의 인생뿐만 아니라 태어난 아이들의 인생까지 옥죈 거나 마찬가지다. 가정 불화 및 폭력, 불안정한 애착 관계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영혼을 찢어놓은 건지 모르겠다. 작가의 자서전이나 마찬가지인 저서인데 자신이 겪어온 삶의 면면을 현미경으로 드러낸 듯한 작품. 번역투가 너무 심해서 질리는 것과 별개로, 읽는 내내 지독한 우울의 심연에 가라앉은 기분이라 2권은 당분간 읽고 싶지가 않다.

 

발췌

 

[...] 때로 삶은 한 인간을 사로잡아 그 육신을 이끌고 다니면서 그 사람의 역사를 완성하지만 그 삶은 진실로 여겨지지 않고 그의 자아는 무심하게 내버려진다.

 

[...] 그는 그의 모든 생각을 어머니의 마음을 통해 체질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 그들은 그녀로부터 나왔고 그들은 그녀의 일부였으며 그들의 일은 또한 그녀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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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 유시민의 30년 베스트셀러 영업기밀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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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톨로지를 재독 하고 싶다는 생각에 시리즈 앱을 켰다가 독서와 글쓰기에 관련하여 다시금 쓴소리를 듣자는 생각에 재독 하게 된 유시민 작가님이 쓰신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읽을 때마다 다른 포인트가 눈에 들어오는데, 처음 읽을 때는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추천하는 전략적 독서 목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싶어서 읽었었고, 두 번째 읽을 때는 글을 쓸 때 문장을 다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싶어서 읽었었고, 오늘은 독서와 관련해서 읽게 됐다.

 

 

어쩌면 뻔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읽고 얻은 교훈은 역시나 다독다작다상량多讀多作多商量 이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독해, 요약, 사유 및 토론의 과정이 오랜 시간에 걸쳐 수반되어야 한다. 요약은 발췌부터 시작할 수가 있는데, 어떤 텍스트를 요약하려면 가장 중요한 정보를 담은 부분을 정확하게 가려내는 작업을 먼저 해야 한다.

 

그렇다면 정확한 발췌 및 요약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높은 수준의 독해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책에 따르면, 독해는 어떤 텍스트가 담고 있는 정보를 파악하고 논리를 이해하며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그 정보와 논리와 감정을 특정한 맥락에서 분석하고 해석하고 비판하는 작업이다. 독해는 텍스트의 한계와 오류를 찾아내거나 텍스트를 다른 맥락에서 해석하는 작업을 포함한다. 독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같은 시간에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텍스트를 읽고 더 넓고 깊게 이해하며 때로는 남들과 다르게 텍스트를 해석한다. 독해력이 좋은 사람일수록 텍스트를 더 빠르게 더 정확하게 더 개성 있게 요약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요약하는 사람의 소망, 의지, 태도에 따라 같은 텍스트라도 다르게 요약된다고 짚어주신 점이었다. 그렇겠다. 살아온 배경과 읽어온 텍스트에 따라 세계관이 다를 테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도 달라질 테니까.

 

그러나 독해력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처음에는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다. 어려운 글은 밑줄을 긋고 사전을 뒤지고 인터넷에서 관련 정보를 검색해 가면서 읽어야 한다. 독서량이 늘어 아는 게 많아지고 생각이 깊어져야 텍스트를 읽는 속도가 빨라지고 비판적·창의적으로 독해할 능력이 생긴다. 높은 수준의 독해력과 글쓰기 능력이 중요한 논문 쓰기 과정에서 또한 중요한 것은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문자로 정확하게 옮기는 능력이지, 외국어 능력 그 자체가 아니다. 어느 언어로 생각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외국어로 쓰는 글도 모국어를 제대로 하는 사람이 더 잘 쓸 수 있다.

 

책을 읽은 후 (1) 독해 (2) 요약 (3) 사유 및 토론이라는 지난한 과정에 관해 곱씹어봤다. 학교에 다닐 때는 억지로라도 세 단계를 모두 거칠 수 있었는데, 졸업한 지 여러 해가 지난 지금은 나 자신의 의지가 수반되지 않으면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하게 됐다. 그런 점에서 무언가를 읽고 요약하고 내 생각을 덧붙인 기록을 남기는 계정을 꾸준히 굴려야겠다는 생각은 잘한 결정인 것 같다. 보잘것없지만 어쨌거나 내 삶의 기록이란 생각도 들고. 완벽하진 않아도 시간이 지나 돌이켜 보면 또 다른 묘미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글쓰기에 관해 관심은 있지만 아직 책을 읽어보지 않으신 분께는 꼭 추천을 드리고 싶은 책이다. 다른 무엇보다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담백하다. 글 좀 쓴다고 미사여구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책이 아니다. 별개로 조병영 교수님의 <읽는 인간 : 리터러시를 경험하라> 와 함께 읽으면 시너지가 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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